누가 뭐래도 한국인의 주식은 밥, 즉 쌀입니다. 지금이야 한 공기의 양이 상당히 줄었지만, 조선시대에 찍힌 사진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밥을 드셨습니다. 반찬이야 고작 나물 반찬에 간장 등 몇 가지가 대부분이지만 우리 조상은 자신의 얼굴보다도 큰 밥그릇에 고봉밥을 드셨죠.
물론 지금은 워낙에 먹을 것이 다양해져서 쌀에 대한 소비는 줄고 있기는 합니다. 2022년 통계청에 따르면 1인당 연평균 쌀 소비량은 56.7kg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는데 쌀 섭취량이 줄었다고 한들 쌀은 영원히 우리 주식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현재 정치권에서도 이와 관련한 다양한 논의가 오가고 있는 것인데 차후 기회가 되면 ‘양곡관리법’에 대해서 자세히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밥’을 끌어와 대화를 나눕니다.
함께 밥 먹을 생각이 없어도 ‘언제 밥 한 끼 하자.’는 영혼 없는 인사는 물론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닌 범죄자를 앞에 둔 경찰은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묻기도 하고 좋은 사람은 ‘밥 잘 사주는 사람’이고 좋은 누나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고 최고의 힘은 ‘밥심’이고 최고의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밥 한 끼 살게’일 정도죠. 그만큼 밥, 즉 쌀은 우리에게 중요한 식량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쌀을 먹었을까요?
지금 현재도 전 세계적으로 벼농사가 처음 시작된 장소와 시기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어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다릅니다. 인도설을 믿는 학자, 중국 양자강설을 믿는 학자, 동남아설을 믿는 학자 등 아직까지도 통일된 학설은 존재하지 않는데요.
그런데 1970년대까지 가장 유력했던 설은 일본이 한반도의 쌀을 전파했다는 ‘일본 전파설’이었습니다. 옛날 어느 시기에 중국이 일본에 쌀을 전해줬고, 일본은 다시 이를 한반도로 전해줬다는 것인데요. 지리적으로 봐도 이해되지 않는 이 학설이 지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는 없는 유물이 일본에서만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76년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임금님 쌀의 고장 여주에서 발견된 볍씨 한 톨 덕분에 모든 주장이 뒤집어졌습니다. 1970년대 여주로 떠나보겠습니다.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는 후쿠오카현 이타즈케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가 기원전 4세기경으로 김해에서 발견된 쌀보다 앞섰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습니다.
탄화미란 유적 출토 곡물의 하나로 불에 타거나 산화된 상태로 땅속에 묻혀있는 쌀을 말하는데 흔히 벼농사의 흔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더 오래된 탄화미가 발견될수록 그 지역 또는 그 국가에서 벼농사가 시작됐다는 주장을 펼 수 있는 스모킹건이 되기도 하죠. 지난 1920년 김해에서는 조개더미가 발견됐는데 당시 패총에는 탄화미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사해 보니 기원전 1세기경의 쌀로 밝혀졌었죠.
그러다 1950년 일본의 후쿠오카에서 발견된 이타즈케 유적에서 탄화미가 발견되었고 기원전 4세기쯤으로 밝혀지면서 일본은 쌀은 일본이 한반도로 전해줬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이를 반박할 증거가 한반도에서는 나오지 않아 그냥 받아들여야 했죠.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어이가 없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중국에서 기원해 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것이 지리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죠. 중국과 붙은 한반도에 먼저 전해지고 일본으로 전해지는 것이 상식이지 바다 건너 일본에 먼저 전해지고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럼 이 주장은 언제 뒤집혔을까요? 잠시 1962년으로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마련한 큰 어른으로 불리는 김원룡 선생은 1960년경 경기도 여주의 한 주민으로부터 흔암리에 이상한 토기가 있다는 제보를 받습니다. 이에 김원룡 선생은 여주 흔암리로 가 대략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했더니 그 아래에서 청동기 시대 석기와 토기들이 대량으로 산포되어 있음이 발견됐습니다.
이 내용은 1962년 고고미술이라는 학술지에 소개되면서 일반에 알려지게 됐는데요. 이후 시간이 흘러 1972년부터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는 7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해 16개의 청동기 시대 집터와 더불어 구멍무늬, 골아가리무늬,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 등 소위 ‘흔암리 토기’들과 간돌검, 바퀴날도끼, 돌도끼, 반달돌칼, 가락바퀴 등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과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0세기 무렵으로 밝혀졌는데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에서는 마을 규모의 청동기 시대 유적이 조사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주에서 이러한 유적이 발견됐다는 것은 한국 고고학계에 큰 의미가 있었죠. 그렇게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 흔암리 유적의 진짜 가치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975년 11월 당시 흔암리 현장에 있었던 임효재 당시 서울대 고고학과 전임강사와 발굴팀은 화덕에 놓였던 12호 집터 바닥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임효재는 포대로 흙을 퍼 담더니 그걸 현장 연구실로 가져가 온종일 분석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선배 교수들은 ‘미국에서 이상한 걸 배워왔다.’며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는 1968년 미국에서 창안된 새로운 분석법을 적용하고 있었는데, 이른바 ‘부유법’이었습니다. 부유법이란 탄화 곡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화덕 주변의 흙에 물을 붓고 위에 뜬 물질을 채로 걸러내어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식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 스튜어트 스트루에버 교수가 1968년에 창안하는 발굴 방법입니다.
불에 탄 곡물은 미생물에 의해 부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보존되어 있고 수분이 모두 날아갔기 때문에 분명 물에 뜨기 때문에 상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보일 수 있지만 탄화 곡물을 찾기에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죠.
흙을 채로 걸러 물을 부어 부유물 하나하나를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모습이 선배들의 눈에는 미덥지 않았지만 5개월 뒤 현장연구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울대 학부생 이남규가 급하게 임효재를 부르더니 뭔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전형적인 타원형 탄화미였습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토기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석기 등을 찾아내는 것이 발굴의 전부였을 뿐 당시 국내 고고학계에서 자연 유물을 찾은 적도 심지어 시도된 적도 없었는데 6개월간 눈이 빠지게 매달린 결과 탄화미를 찾아냈습니다.
즉각 이 탄화미는 연대 측정을 위해 함께 출토된 목탄과 함께 한국원자력연구소 및 일본 이화학연구소에 보냈습니다. 교차검증을 시도한 것인데요. 그리고 두 연구소 모두 이 탄화미는 기원전 10세기로 결론 내렸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흔암리 탄화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탄화미인 동시에 일본보다 600년 이상 앞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흔암리 이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탄화미는 김해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의 것이고, 일본의 이타즈케에서 발견된 것이 기원전 4세기니까요. 이 엄청난 발견에 고고학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간 벼농사 기원을 일본이라고 우기던 일본 학자들의 한반도 전파설이 단번에 깨졌죠.
이로써 흔암리에서 발견된 볍씨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쌀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래되지 않아 흔암리 볍씨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납니다. 이후로 한국 땅에서 지속적으로 볍씨가 출토됐기 때문인데요.
흔암리 탄화미가 발견된 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와 서암리 일대에서는 한반도 벼농사의 시작을 밝혀줄 곡물이 출토됐습니다. 가현리 지표 아래 약 4m 아래 토탄층에서 고대 볍씨를 포함해 각종 씨앗이 출토됐습니다. 토탄이란 이탄이라고도 하는데, 식물이 퇴적되어 수천 년 간 물속에서 생화학적으로 분해되지 않고 탄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조사에서 흔암리에서 탄화미를 찾아냈던 임효재 당시 서울대 박물관 관장도 참여했는데 여기서 발견된 접시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이 볍씨들은 5천 년 전에 생산될 쌀임이 입증됐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의 벼 재배 역사는 5천 년이 넘는 것으로 앞당겨졌는데요.
당시 임효재는 다시 한번 부유법을 사용해 50여 일간 조사에 매달려 5천 년 전 볍씨를 발견한 후 ‘2천 년 전 볍씨가 출토된 곳은 4천 년 전 한반도에서 최초로 재배됐던 볍씨가 나왔던 이탄층에서 50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통진면 가현리 일대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이어지는 한국 벼농사 발달 양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자료로 평가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991년에는 고양 덕양구 가와지에서도 볍씨 4톨이 발견됐는데 이 볍씨 역시 5천 년 전 것으로 측정되었고, 이는 자연 볍씨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키운 ‘재배 벼’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물론 이 가와지 볍씨 이전에도 한반도에서 볍씨가 출토되기는 했지만, 재배 벼, 즉 인간이 직접 싹을 틔워 정성껏 키우고 수확했던 볍씨가 출토된 것은 최초의 사례인데요.
그러니까 이미 5천 년 전에 한반도에 살던 신석기시대 조상들은 쌀을 직접 생산해서 섭취했다는 의미가 되고, 이는 그간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문화가 시작됐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고 이를 신석기시대로 끌어올린 의미 있는 발견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볍씨들은 평균 길이와 너비가 각각 7.03mm, 2.78mm인데 약간 가늘고 길지만, 오늘날의 단립종 벼인 자포니카와 유사합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벼는 북방으로부터 전래되어 김포와 고양 등 서해안 지역으로 유입된 후 남쪽으로 전파시켜 일본에까지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 증거라면 그간 일본에서 한반도로 쌀을 전해줬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인지 확실히 증명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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