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고, 한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국가에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단일 민족이니 똘똘 뭉쳐야 한다는 말로 단합을 강조해 국난을 극복해 내기도 했죠.
그런데 단일 민족, 즉 하나의 민족이라면 그 생김새가 아주 유사하거나 적어도 비슷해야 합니다만, 지금 당장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이목구비가 상당히 뚜렷한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유독 이목구비가 뚜렷한 분들은 “너 혼혈이야?”라는 말을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한국인 DNA와 한국인 피를 가졌는데도 여러분이 혼혈일 수도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1899년 조선 땅을 처음 밟은 미국 외교관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1930년 조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동해상사기>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제물포항에 처음 내린 그는 한국인을 보고 “항구에서 만난 조선인 중 일부는 회색과 푸른색 그리고 갈색 눈동자에, 머리카락은 붉고 안색이 좋았다. 그들의 신장은 모두 180cm가 넘었다. 그들 가운데는 얇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를 내린 인물은 비단 샌즈뿐 아닙니다.
그보다 5년 앞서 제물포항에 도착한 영국인 이사벨라 버나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에서 “한국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는 진짜 한국인 중에는 눈동자가 회색이거나 푸른색인 사람이 없고, 머리카락이 붉은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1800년대 말이라면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해 키가 180cm를 넘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 비숍이 ‘체격이 훨씬 좋다’라고 쓴 것도 이상해 보입니다.
그런데 눈 파란 외국인이 본 사람들이 특정 계급이라면 이런 평가가 가능합니다. 만약 그들이 백정을 봤다면 말이죠.
아마 백정이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원래 백정은 고려시대까지 평범한 농민층을 일컫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천민 집단에 속하지도 않았고, 차별을 받는 집단도 아니었죠.
원래 고려시대에는 재인과 화척이라는 천민 집단이 존재했었는데, 재인은 창극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을, 화척은 도축이나 도살업에 종사하던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다 새 국가가 세워졌지만, 재인과 화척은 여전히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정착해서 농사를 지을 토지가 없던 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전국을 유랑하며 고리버들 제품을 제작해 판매하거나 사냥한 짐승을 도축해 판매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떠돌이 빈민 집단이었던 그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백성과 다른 생활양식이나 직업을 갖고 있었고, 관적이나 부역도 모른 채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죠. 또 그들은 농업에 필요한 소의 도살 금지를 어겼고, 떼를 지어 약탈 행위를 했으며, 심지어 왜구로 가장하여 도적질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그러한 특징은 조선시대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왕조를 개국한 조선으로서는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아다니며 농사를 짓지 않고 범죄에 가담하는 재인과 화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는데요.
이에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이들을 천민 취급하지 않고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하고, 그러한 이들은 신공을 면제시켜 줬습니다.
그러다 1423년 10월 8일, 세종은 재인과 화척의 호칭을 아예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백정으로 고치도록 명령했는데요. 왜냐하면 일반 백성들은 고려시대의 재인과 화척의 직업이 비천하고 호칭이 특이하다 보니, 그들을 마치 이방인으로 취급해 이들과 함께 거주하거나 혼인하는 것을 꺼렸고, 이들 역시 자기들끼리의 집단생활과 유랑생활을 이어갔죠.
이에 세종은 재인과 화척을 백정으로 호칭하도록 해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고자 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호칭을 변경하고 사회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예전처럼 고리버들 제품의 제조와 판매, 도축, 가죽 제품 제조와 판매 그리고 오락 제공 같은 비천한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여전히 사회적으로 천대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백정은 고려시대의 농민을 뜻하는 백정이 아니라 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집단이 되었고, 백정은 노비보다 더 낮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재인과 화척, 즉 조선시대의 백정은 어떤 이들이길래 이토록 사회와 동화되지 못하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들은 민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백정을 화척이나 재인, 혹은 달단이라고 부르는데,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다. 본래 우리 민족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는바, 이들이 본래 우리 민족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에는 “우리나라의 재인과 백정은 그 선조가 호종이다.”라고 하여 재인과 백정이 호종, 즉 북방인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한반도 위쪽의 북방인들은 부단하게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는데, 삼국통일 당시 나당 전쟁으로 수많은 거란인과 말갈인이 당나라 군사와 함께 한반도로 들어왔죠. 그리고 후백제를 공격하던 태조 왕건의 흑수, 달고, 철록 등의 용병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여진족, 거란족 등이 귀화하거나 포로가 되어 왔기 때문에 이들을 수용한 별도의 거주지인 거란장도 존재했죠.
달단은 원래 몽고족의 한 부족인 타타르를 부르던 말이지만, 달단은 몽고 지방 또는 몽고족 전체를 칭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는 여진족, 거란족, 말갈족, 타타르족, 송나라, 발해 유민 등등 수많은 외국인이 이주해 왔고, 조정은 이러한 북방 유목민을 정착시키면서 거란장을 포함해 한 곳에 모여 천민으로 살도록 했습니다.
고려시대 외국인 이주 현황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에 살았거나 왕래했던 외국인은 연간 수십만 명에 달해, 전체 인구 약 250만 명의 고려에서 최소 10%가량이 고려에 살거나 왕래했습니다.
1033년 한 해 동안 기록된 고려사 기사 53건 중 26건이 외국인의 왕래 및 이주와 관련된 것일 만큼 고려시대 외국인 정책은 유연했는데요. 그러다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고려시대의 화척과 재인을 백정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고, 일반 백성들과의 혼인을 장려하게 된 겁니다.
물론 대부분은 물에 뜬 기름처럼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이전의 생활 방식을 유지했지만, 적지 않은 수의 백정은 사회에 동화되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북방 유목민과 일반 백성의 혼혈이 태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북방 유목민의 특징은 지금 우리가 TV에서 보는 몽골 유목민, 즉 눈썹이 짙고 움푹 들어간 눈에 엷은 색의 눈동자, 유독 하얗거나 까무잡잡한 피부가 특징입니다. 평범한 황인종과는 이목구비가 달랐던 것이죠.
이렇게 혈통이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백정은 더 이상 북방 유목민이 아니라 전문 도축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는데요. 수백 년에 걸쳐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로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잊혀졌지만, 진짜 뿌리는 달랐던 것이고,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혼혈이냐?”라는 말을 듣는 것도 그 선조가 진짜 외국인이어서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나 백정은 사회적인 노력에도 미천하고 비천해 노비보다 더 낮은 계급, 쉽게 말하면 인도의 불가촉천민으로 인식됐습니다. 그 핵심에는 그들이 우리와 다른 ‘이종’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으로, 백성들은 그들의 선조는 ‘오랑캐의 종족’이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더구나 국가에서는 그들은 다른 종족이라 여겨 군역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외래 종족이라는 점을 기정사실화했죠.
조선시대는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정에 대한 차별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백정들은 돈이 있어도 기와집에 살 수 없으며, 일반민들과 떨어진 성 밖의 일정 지역에 모여 살았습니다.
명주옷을 입거나 망건,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두루마기도 입을 수 없었죠. 신발도 맨발이거나 검정 버선에 짚신을 신었으며, 머리도 삭발해야 하고 수염도 길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털모자도 쓸 수 없고,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패랭이를 써 신분을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패랭이 갓 끝도 대나 구슬, 베로 만든 건 맬 수 없었으며, 종이나 짚으로 새끼를 꼬아 매야만 했는데요.
그리고 여자들은 비녀를 꽂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민 어린이에게도 항상 복종하고 ‘소인’이라 칭해야 했으며, 나란히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성과 이름도 제대로 쓸 수 없었고 호적에 올리기 위해 이름을 썼지만, 이름에 충, 효, 인, 의와 같은 의미를 담은 한자는 쓸 수 없어 금걸, 만석, 억석, 무검, 소개 등과 같은 단순한 이름을 써야 했습니다.
일반민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음식점에도 들어갈 수 없었는데, 겨우 음식점에 들어가도 토방에 따로 앉아서 술을 마셔야 했죠.
백정의 차별은 죽은 후에도 지속됐습니다. 상복이나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고, 풍수를 볼 수 없었으며 묘지도 일반인 묘지보다 낮은 곳에 써야 했습니다.
또한 함부로 직업도 가질 수 없어 백정은 도산업, 육류 판매, 피혁, 쇠기름 생산 판매, 소의 피를 이용한 식품 제조와 판매, 가축의 내장과 뼈 판매, 이를 이용한 음식점 등 외에는 별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러한 직업이 그들을 더욱 천하게 만들었죠. 농경 사회인 조선에서 농사에 필요한 소의 도살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예를 지극히 중요시하는 조선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는 궁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의식이었죠. 그런데 이 제사에 꼭 필요한 것이 소고기인데, 소를 직접 잡고 싶지는 않았기에 소에 대한 도축을 백정에게 전담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천한 일을 한다’라며 천대했죠.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어졌는데, 해도 해도 너무 심각해지자 이에 대한 반발이 시작됩니다. 바로 형평사 운동인데요. 쉽게 말하면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입니다.
1894년 7월 30일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됐습니다. 당시 천민 대우를 받던 노비 등에 대한 면천이 개혁안에 담겼죠. 하지만 이 개혁안에 백정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1896년 제정된 호구조사규칙에는 백정들도 일반인처럼 호적에 올릴 수 있었지만, 1909년 제정된 민족법에는 백정들은 본적란에 반드시 ‘도한’, 즉 도살업을 하는 자라는 붉은 글씨를 써야 했습니다. 누구나 쉽게 백정임을 알 수 있었죠.
결국 곪았던 불만이 터지고 맙니다.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 사회를 만들자는 목적 아래 형평사가 창립됐는데요. 형평사원들은 백정이라는 호칭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분노하고 그렇게 부른 사람들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그 호칭과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불과 1년 사이 전국에 79개 지사와 분사를 거느린 대규모 조직이 됐습니다.
형평사 설립을 주도한 ‘이학찬’은 진주 중앙시장에서 정육점을 하던 자산가였습니다만, 재산이 넉넉해도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킬 수 없게 되자 형평사 창립을 주도해 백정 해방 운동에 나섰습니다.
또 다른 인물로 ‘강상호’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양반 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진주 사회에서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꼽히던 그는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진주 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 한 명이 죽임을 당하는 꼴을 본 것이죠.
청년들은 백정 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했으나, 그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자 결국 매질을 시작합니다. 매질을 견디지 못한 그 백정은 결국 사망하고 말죠.
이에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했으나, 법원은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즉, 살인죄가 성립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지만,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상호는 신분을 뛰어넘은 백정 해방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만일 단일 민족이라는 용어가 단군 이래로 이어진 하나의 혈통을 의미한다면 단일 혈통이라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살펴보았듯 이미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는 수많은 북방 유목민이 이주해 왔고, 그들로부터 시작해 조금씩 조금씩 피가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전 세계 그 어디에도 진돗개와 같은 단일 순수 종자의 민족은 없습니다. 수사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죠. 그래서 단일 민족 국가 또는 단일 혈통 국가를 내세우는 것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정신 승리에 불과합니다.
600만 명이 넘는 인구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씨족을 형성하고 있는 김해 김씨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김수로 왕과 혼인한 허 황후로부터 피가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씨족의 조상부터 인도인인 마당에 왜 굳이 단일 혈통을 내세워 차별하고 천하게 여겼던 것인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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