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3월 12일 스페인의 엘 파이스는 그룹 방탄소년단의 리더 RM과의 인터뷰를 공개했습니다. 엘 파이스는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K팝의 성공과 한국의 역사, 그의 개인적인 예술품 수집 등 다방면에 걸친 대화를 나눴는데 RM의 우문현답이 큰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우선 기자는 K-POP과 한국 문화가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노력을 강요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을 던지자 RM은 ‘서양 사람들은 이해 못 합니다. 한국은 침략당하고, 파괴되었고, 둘로 갈라진 나라입니다. 7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나라입니다. 우리는 IMF와 UN의 원조를 받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죠.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건 바로 우리 국민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혹독하게 일하기 때문입니다.’라며 오히려 한국에 노력하는 문화에 큰 가치를 부여했죠.
그리고 기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K-로 명명되는 꼬리표가 지겹지 않냐는 질문이었는데, 기자가 의도한 바는 명확합니다. 최근 K-POP이니 K-푸드니, K-무비 등등 한국을 뜻하는 코리아의 K가 붙는 것이 손발이 좀 오그라들지 않느냐는 다소 무리할 법한 질문이었는데요.
그런 질문에 대해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가 우리 모두를 K팝이라고 부르는 것에 질릴 수도 있지만, 그건 프리미엄 라벨이다. 우리 조상들이 싸워 쟁취하려고 노력했던 품질 보증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짧은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적어도 한국을 하는 이들에게 알파벳 K는 꽤 큰 의미를 지닌 표식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 K가 있습니다.
같은 K라는 표식이 붙었고 그 가치는 한국사를 통째로 뒤흔들 만 위대한 것임에도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기만 기다리던 보물.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잠시 이동해 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전국의 고지도 목록을 작성 중이던 한국 역사 문화 지리 학회 전문가들은 국립 중앙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사실 약 41만 점에 달하는 유물이 전시되거나 보관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만큼 전문가들이 가장 기대했던 방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유물은 가이드라인에 맞게 완벽한 상태로 보관되고 있었지만,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은 국가입니다.
즉, 일본인들이 소장하던 유물들을 인수받기도 했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의 포격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기 때문에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또는 제대로 파악하지를 못한 유물이 상당수였죠. 그런 유물들은 대부분 수장고에 보관 중이었는데요. 박물관은 전문가들에게 3개월의 조사 기간을 허락했지만 3개월 동안 고지도는커녕 제대로 된 성과도 없이 하염없는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사도 오늘로 마지막이었습니다. 큰 성과는 없었지만 협조해 준 박물관 측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뒤돌아서던 찰나 당시 국립 중앙 박물관 수장고 담당자였던 소재구 학예사는 전문가들을 불러 세워 박물관 소장품 중에 흥미로운 목각품 11점이 있는데 진위를 판단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죠.
수장고로 들어간 소재구 학예사는 수장고 깊은 곳에서 목판 하나를 꺼내와 전문가들 앞에 내놨는데 이 유물에는 K-93이라는 임시 번호가 붙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K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물이라는 의미였는데요.
이 목판은 원래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923년부터 보관하고 있던 유물인데 당시 작성된 유물 목록에 본관 9739, 조선총독부 소장품으로 기록되어 있었을 뿐 유물 자체에는 번호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른 유물들과 함께 부산으로 경주로 피난했다가 1970년대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복귀했으나 유물번호가 없어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죠. 그래서 임시번호인 K93을 부여하고 목제품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소 학예사가 꺼내 온 목판은 총 11점으로 가로 43cm, 세로 32cm 크기에, 두께는 1.5cm에 달했습니다. 여타 목판 대비 상당히 큰 크기였는데 평소 수장고를 드나들던 그는 이 목판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비범해 보이는 모습도 그렇지만 그 목판에 적힌 글 때문이었는데요. 오른쪽 아래에는 고산자교관이라 쓰여 있었고, 표지에 적힌 제목은 무려 대동여지도였습니다.
이 목판본을 본 전문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간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던 대동여지도 목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요. 만약 이것이 진품이라면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하는 국보급 유물이, 다른 곳도 아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서 약 30년간 빛도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요.
대놓고 제작자의 이름과 작품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음에도 고산자 김정호의 평생의 역작인 대동여지도 목판은 가짜 또는 복제품이라는 허위 사실이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언제부턴가 한국인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라는 인물은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내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3번이나 왕복하면서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는 점. 그리고 조선의 무지몽매한 지도자였던 흥선대원군이 국가기밀누설죄로 김정호 부녀를 참하고 대동여지도와 목판을 전부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상왕으로 불렸던 대원군이 목판까지 불태워 버렸다는데 누가 이 목판이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사건은 이 허위 사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 허위 사실이 처음 등장했을까?, 1925년입니다. 당시 육당 최남선이 쓴 것으로 보이는 사설 하나가 동아일보 10월 8일 자에 등장합니다.
사설은 ‘김정호 선생은 팔도강산을 샅샅이 답사했고, 이를 위해 백두산만 7번 올라갔다. 대동여지도를 위해 십수 년간 과객 노릇을 하여 가장 정명하고 적확한 지도를 만든 이지만 이런 국보적인 인물이 화액을 당했다. 국가의 요새를 외국에 알릴 장본인이라는 죄명 때문에 대동여지도 목판은 몰수당하고 김정호는 인간에게 가장 참혹한 운명으로써’라고 쓰고 있는데요.
내용을 간추리면 당시 조선은 김정호의 위대한 업적을 몰라보고 욕하는가 하면 외국 간첩이라고까지 의심하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 일제였습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어독본 교과서에 이 이야기를 교묘하게 각색해 게재했으니까요. 당시 일제는 김정호가 백두산을 8번 오르내렸고, 전국 방방곡곡을 3차례나 돌며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지만, 흥선대원군은 국가기밀누설죄로 김정호와 그 딸을 옥에 가두었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는 것인데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제에게 이는 훌륭한 먹잇감이었을 겁니다.
김정호처럼 훌륭한 인물에게 누명을 씌울 만큼 조선은 우매한 국가이므로 문명국인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이 가짜 뉴스가 점차 증폭되어 광복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을 끝내고 꽤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설 준비에 여념 없었던 1993년 초등학교 5학년 국어 읽기 교과서에까지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해당 교과서에는 ‘김정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임을 당했다.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지도를 보고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김정호의 피땀이 서린 지도의 목판까지 압수하여 불살랐으니 정말 안타깝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어독본에도 없던 ‘목판을 압수해 불살랐다.’는 표현이 60년 뒤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한 겁니다.
즉, 일제가 교묘하게 조작해 온 식민 사관이 60년이 지난 초등학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겁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 김정호가 손수 제작하고 목판으로 인출해 간행한 전국 지도로 한반도 전체를 남북 120리 간격으로 구분해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마다 동서 방향의 지도를 수록해 1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각 층의 지도는 1권의 책으로 묶어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접고 펼 수 있도록 만들어 휴대가 간편하고 보기 쉽게 만들어졌죠. 그래서 22권의 책을 모두 펼쳐 연결시키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에 이르는 대형 한반도 전도가 됩니다.
대동여지도에는 산줄기와 물줄기가 상세하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고, 산과 산줄기, 하천, 바다와 섬은 물론 읍, 성, 목장, 온천, 도로 등 다양한 정보가 오늘날의 지도처럼 기호로 표시되어 있으며, 상세하게 기재된 교통로에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지역과 지역의 거리를 쉽게 계산할 수 있게 해 두었죠. 이는 근대적인 측량 기술로 제작된 지도와 비교할 때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지도 제작 전통이 집대성된 최고의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이 이런 지도의 가치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다고 깎아내리기 위해 이런 식민사관을 만든 겁니다. 조선과 우리 민족을 깎아내리기 위해서는 김정호의 업적을 더욱 과장할 필요가 있었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김정호가 백두산 등 한반도 모든 지역을 직접 걸어 다니며 지도를 작성했다는 허위 사실입니다.
오히려 김정호는 속설과 달리 삼국사기, 고려사부터 신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동국 팔역도, 해동여지도 등 수많은 지도를 연구한 후 대동여지도에 흡수시키고 지구전후도 같은 세계 지도 제작에도 참여해 있던 지도 제작자이자 학자였죠.
김정호의 호 고산자. 즉, 옛 고, 뫼 산, 아들 자로 되어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김정호 스스로 ‘옛 산의 아들’이라며 자신의 호를 지었다고 하죠. 그의 호에서 지도에 대한 강한 애착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직도 미디어 매체에서 김정호가 지도를 걸어 다니며 제작하고 또 조선 권력층에게 핍박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당시 일제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잘못된 소문입니다.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의 역작이자 최대 업적이며 한국사 최고의 보물로 지도의 서문에 해당되는 지도유설에서 춘추전국시대 손자의 글을 인용해서 제작 목적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국방상의 요충지를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잘 알아야 한다고 말이죠.
지금이라도 김정호라는 위대한 학자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던 의도와 그에 대한 기록이 잘 보존되어 변형되었던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안에는 정리되지 않은 유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출처를 모르거나 중도에 잃어버린 유물만 1만 4,000여 점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에도 K라는 표식이 붙어 있을 겁니다. 그중 보물, 국보급 유물이 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관심 있게 봐야 할 K는 TV에만 있는 게 아닌 셈이죠. 우리 문화와 역사가 온전히 밝혀지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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