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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만 2억 명” 미국 대통령에게 ○○○ 가르친 후 대박 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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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여러분에게 “한국과 관련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이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할 건가요? 아마도 많은 분이 BTS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한국 가수 역사상 최초로 빌보드 메인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한 보이그룹이니까요.

Dynamite로 한국 가수 최초 빌보드 HOT 100 1위에 이름을 올린 후 피처링으로 참여한 ‘Savage Love’ ‘Life Goes On’ ‘Butter’ ‘Permission to Dance’ ‘My Universe’까지 총 6개의 곡을 HOT 100 정상에 올렸습니다. BTS는 최근 10년간 빌보드 메인 정상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아티스트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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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팬클럽 아미의 전 세계 회원 수는 얼마나 될까요? 그 어디에서도 정확한 수가 공개된 적은 없으나 데이터 분석 기업인 브랜드와치는 지난 2022년 온라인에서의 BTS 언급량을 기준으로 아미 가입자 수를 약 1,800만 명이라 추산했습니다. 이 수를 군대로 환산한다면 1개 사단을 10,000명이라고 잡았을 때 1,800개 사단이며, 1개 사단을 50,000명으로 집계할 경우 360개 군단이 됩니다. 아주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의 수치입니다.

아미센서스가 팬클럽을 대상으로 자체적으로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미는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 분포해 있다고 합니다. 응답자 국적 상위 10개국은 인도네시아, 멕시코, 미국, 페루, 필리핀, 러시아, 인도, 한국, 브라질, 이집트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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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잊혀진 한국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국기(國技) 태권도입니다. 올림픽 정식 종목이기도 한 태권도의 전 세계 수련인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놀라지 마세요. 최대 2억 명입니다. 세계태권도연맹(WTF)에 가입한 국가가 210개국인데요. 이는 유엔 회원국 수인 193개국보다 많습니다. 2억 명 중 중국에서만 한국 전체 인구에 버금가는 5천만 명이 수련 중이라고 하죠.

이슬람교 신자의 평생 소원이 메카를 방문하는 것이듯 전 세계 2억 명에 가까운 수련생은 한국을 마치 메카와 같은 성지로 여기며, 죽기 전 한국에 꼭 한번 방문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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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를 수련하는 한 이탈리아 청년은 “한국은 내게 스승의 나라이며 아버지의 나라다.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배운 나는 태권도 종주국인 스승의 나라 한국에 꼭 가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아마 태권도를 배운 사람이라면 인종을 막론하고 태권도 종주국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태권도는 종교이며,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은 교주이고,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은 성지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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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작은 지구로 불리는 미국에는 ‘태권도계의 교주’라고 불리는 남자가 있습니다. 2000년 1월, 미국의 국가이민포럼이라는 단체는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민자 203인을 선정했는데요. 그 안에는 ‘이준구’라는 낯선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아인슈타인, 그레이엄 벨 등 미국의 역사를 바꾼 인물 사이에 낀 유일한 한국인인데요. 그는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인물이기도 하죠.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도 있겠지만 이준구는 미국에서 ‘Master Rhee’ 또는 ‘미국 태권도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 태권도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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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전 세계에 ‘Korea’라는 이름을 알린 계기 중 하나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올림픽에서 태권도는 사상 최초로 시범 종목으로 소개됐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습니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태권도는 ‘몸과 마음을 함께 수련할 수 있는 스포츠’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세계적으로 태권도 수련생이 급격히 증가했는데요.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점수화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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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태권도의 겨루기는 발을 사용하는 싸움의 일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올림픽 종목 선정에서 번번이 탈락했는데요. 겨루기용 보호장구가 개발 및 보급되면서 종목 채택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 보호장구를 개발한 인물이 바로 이준구죠.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과정만 봐도 이 정도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이준구는 미국 대통령 특별고문,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 특별고문, 미 국방부 태권도 지도자, 미 해병대 태권도 지도자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에게 ‘아큐펀치’라는 필살기를, 이소룡에게는 발차기를 가르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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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932년 충남 아산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몸이 작아 친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16살에 당수도를 접했는데요. 그는 당수도 스승 이원국을 존경했고, 언젠가 그처럼 훌륭한 태권도 사범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하지만 학자 집안답게 태권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아버지는 극구 반대했죠. 다행히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태권도를 계속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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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6·25 전쟁이 끝난 후 어릴 적부터 꿈꿨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요. 45달러를 들고 미국에 간 그는 사우스 텍사스 주립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고, 학비 마련을 위해 교내 태권도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흑인 학생이 뒷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흑백인 분리법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교 식당, 대중교통 등에서 백인과 흑인은 분리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발견한 그는 태권도에서는 누구나 똑같다며 정문으로 들어오라고 지시했는데요. 이 흑인 학생이 바로 미국 흑인 최초의 10단 소지자 프레드 사이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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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태권도 스승인데요. 그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있습니다. 텍사스에서 토요일마다 태권도를 가르치던 어느 날 오후, 그는 워싱턴 국방부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국방부 태권도 사범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그는 즉각 ‘Yes’라고 답했죠. 태권도를 전 세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반드시 워싱턴 정치권과 친분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즉각 워싱턴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그를 초청했던 직원이 퇴직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죠.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태권도 도장을 차리기로 결심합니다. 1962년 6월 28일 그는 ‘준리 태권도’ 도장을 오픈합니다. 미국 최초의 태권도장이죠. 워싱턴은 6월 28일을 ‘준리의 날’로 선포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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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장을 오픈한 그는 즉각 마케팅을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에 태권도를 보급하려면 각국에서 파견된 대사와 친분을 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각국 대사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죠. 대사들의 자녀를 태권도장으로 보내 달라 요청한 것인데요. 태권도뿐 아니라 인성과 학교 성적까지 약속하는 편지였습니다.

이후 각국 대사들의 자녀가 태권도를 배운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돌기 시작했고 수강생은 어마어마하게 몰렸습니다. 태권도가 미국 전역에서 알려질 수 있게 된 계기도 그때 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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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4월 워싱턴 포스트에는 하원 의원인 공화당의 제임스 클리블랜드가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강도에게 당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준구는 기사를 읽자마자 즉시 클리블랜드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강도에게 당하지 않도록 태권도를 가르쳐 주겠다며 무료 강습을 제안했습니다. 그해 5월 첫 강습에 클리블랜드 의원은 동료 몇 명을 데리고 와서 이준구에게 태권도를 배웠는데요. 그중 한 명이 미국 대통령인 조 바이든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준구는 국회의사당에서 일주일에 2, 3회씩 국회의원을 상대로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태권도를 배운 제자 국회의원만 350명이고, 이 중 19명은 검은 띠를 땄죠. 민주당의 아이스 스켈턴은 ‘이준구 사범은 국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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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열화와 같은 반응이 이어지면서 워싱턴의 4개 방송국은 매일 그를 방송에 출연시켰고, 이를 계기로 거의 모든 미국인이 태권도라는 스포츠를 알게 됐습니다.

잠시 언급했듯 그는 국회의원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워싱턴으로 파견된 각국 대사의 자녀에게도 태권도를 가르쳤습니다. 외교관들은 그에게 자녀를 보냈고, 자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태권도 사범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 세계 181개국에 태권도가 보급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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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문을 걸어 잠근 소련에도 눈을 돌렸습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면 소련에서 무분별한 자유로 인한 혼란이 생길 것이라 예상해 소련에도 태권도장을 오픈하는데요. 1989년 소련에 처음 태권도장을 설립할 당시, 소련에서는 종류를 불문하고 무술은 불법이었습니다. 이때 이준구는 체육부 장관을 만나 태권도에 진정한 목적을 알려 태권도 합법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들어섰지만 태권도는 그 명맥을 유지했고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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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가 이소룡과 무하마드 알리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소룡과 이준구가 처음 대면한 것은 1964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열린 국제 가라데 대회였습니다. 당시 이준구는 32세, 이소룡은 23세였는데요. 이준구는 주최 측의 요청으로 시범을 펼치기 위해 대회장을 찾았습니다.

이소룡은 이준구의 높이차기를 부러워했고, 이준구는 이소룡의 권법을 부러워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준구는 자신의 발차기를 부러워했던 이소룡에게 옆차기, 돌려차기, 뒤돌려차기 등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둘은 친형제 이상의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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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준구는 이소룡과의 관계를 회고한 ‘Bruce Lee and I’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는데요. 이 책의 서문은 이소룡의 부인인 린다 리 카드웰이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유명 영화배우이기도 했던 이소룡은 이준구를 영화의 길로 이끌었고, 이준구는 1973년 한국 홍콩 합작 영화 <태권도가 타격할 때>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는데요. 영화에서 이준구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이진동을 연기했습니다. 당시 홍금보가 조연으로 출연했죠. 영화를 찍은 후 미국으로 돌아온 이준구는 이소룡으로부터 영화 편집이 거의 완료됐고 곧 개봉된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는데요. 전화 통화 다음 날 이소룡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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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에게 태권도를 배운 유명인 중에는 무하마드 알리라는 전설적인 복서도 있었는데요. 그와의 만남은 알리가 1975년 4월 일본을 상대로 한 농담에서 비롯됐습니다. 한 파티에 참여한 알리는 그 자리에서 일본 아마추어 레슬링 협회장인 핫타 이치로를 만났는데요. 그에게 “동양의 격투가 중 누구라도 나를 이긴다면 백만 달러를 주겠다”라는 농담을 던졌습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알리 타도’를 외치던 일본에서 한 레슬러가 도전장을 내밀었는데요. 바로 일본 레슬링계의 전설인 안토니오 이노키입니다. 알리가 그와의 대결을 수락하면서 1976년 6월 26일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름으로 경기가 잡혔는데요. 알리는 이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준구를 소개받았습니다. 이준구는 그에게 속도를 키우면 파워가 배로 늘어난다는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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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진 천부적인 힘에 속도를 추가한 ‘아큐펀치’를 필살기로 장착한 알리는 조 프레이지어를 상대로 아큐 펀치에 의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특히 1975년 영국 복서 리처드 던을 상대로 세계 타이틀을 방어한 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알리는 KO 승리의 비결을 그랜드 마스터 준리가 가르쳐 준 아큐펀치 덕분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이준구의 존재감이 다시 한번 세계를 뒤흔들었죠. 이듬해 알리와 이노키는 도쿄 부도칸에서 경기를 펼치게 되는데요. 이준구는 직접 일본으로 가 경기를 지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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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허무하고 실망스러운 경기가 펼쳐져 팬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경기 후 이준구는 알리에게 한국에 방문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알리는 “미스터 리의 힘이 컸다. 나의 스승 이준구”라며 한국을 방문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죠. 그는 3일간 한국에 머물며 하얀색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상태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이준구는 통역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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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1955년입니다. 당시 육군 소장 최홍희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승인받았는데요. 태권도의 세계화를 준비하던 한국에는 ‘가라데’라는 장애물이 존재했습니다.

태권도보다 먼저 세계시장으로 진출한 가라데는 북미, 유럽, 중남미 등지에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태권도가 가라데를 앞서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죠. 1972년 국기원이 설립되고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됐지만 홍보 효과가 없어 태권도를 ‘코리안 가라데’ 또는 ‘코리안 스타일 가라데’라고 알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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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준구 등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한국의 태권도와 일본의 가라데를 분리해서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이러한 노력이 합쳐져 1980년 IOC 총회가 세계태권도연맹을 정식 단체로 승인했습니다. 1994년에는 태권도를 하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였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등장했죠.

이제 태권도는 가라데, 우슈 등의 무술을 뛰어넘어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반대로 가라데가 ‘재패니즈 태권도’ 또는 ‘재패니즈 스타일 태권도’로 불리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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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태권도 스승인 이준구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136세까지 살아 태권 철학이 공유되는 세계를 만들고, 태권도의 완벽한 세계화를 이룬 후에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는 201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대상 포진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늘로 떠났습니다. 그가 이루려던 태권도의 세계화는 완벽히 실현됐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미국 언론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기사를 쏟아냈고, 다시 한번 그의 명성이 미국에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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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을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하려면 엄청난 끈기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류의 원조 격인 태권도는 그 오랜 시간을 감내한 끝에 하나의 종교가 되었죠. 사범은 교주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준구 한 명이 모든 역할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라는 큰 국가에서 ‘태권도의 아버지’라 불린 그의 업적은 분명 인정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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