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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적 루머 생성으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왕후… 그녀의 최후는?

  • 지식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명성왕후 김씨(1642년 ~1684년 1월 (1683년 음력 12월 )는 조선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어머니로 머리가 비상하고 총명하였으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현종이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본관은 청풍으로, 인조 20년(1642년) 5월 17일 효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손녀이자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의 장녀로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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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이 된 그녀는 효종 2년(1651년) 11월 2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빈례를 거행하고 왕세자빈에 책봉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 왕세자였던 현종과 가례를 올리게 되면서 왕실의 일원이 됩니다.

그녀는 효종 9년(1658년) 세자빈일 때 임신하였고 곧바로 산실청이 설치되어 장녀인 군주를 낳지만 일찍 죽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이 된 그녀는 숙종과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게 되면서 내명부의 수장으로서나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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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종 14년(1673년)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를 같은 해에 잃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듬해인 1674년에는 남편 현종마저 병으로 승하하게 됩니다. 이렇게 명성왕후는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가 된 후, 왕이 죽고 자기 친아들이 즉위하여 왕대비가 된 유일한 왕실 여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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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리고 당시 병이 많았던 아들 숙종이 즉위하자 명성왕후 김씨는 왕권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현종의 사촌 동생인 복선군을 경계하게 됩니다. 그는 1671년(현종 12년)에 발생한 경신 대기근 당시,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조선 왕실을 조롱했던 청 황제에게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대량의 구휼품을 얻어온 호국의 공이 있는 자였습니다.

숙종은 왕위에 오를 당시 나이가 불과 14세였던 데다 흔히 알려진 강한 이미지와 달리 몸이 꽤 허약했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계유정난 같은 사태가 생길까 봐 불안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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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명성왕후는 복선군의 형제인 복창군과 복평군이 평소 여색을 탐하여 궁녀를 희롱하였던 것을 빌미 삼아 이들 세 형제를 노렸습니다. 또한 후궁이 되지는 못했지만 남편 현종의 승은을 받은 궁녀 김상업의 제거도 꾀하게 됩니다.

결국 1675년(숙종 1년) 3월 12일, 명성왕후 김씨의 친정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상소문을 올려 삼복형제(복창군, 복선군, 복평군)를 고발하는 홍수의 변을 일으킵니다. 이 상소에는 복창군이 인선왕후의 초상 때 입궁하여 현종의 승은을 받은 궁녀인 김상업을 범해 임신시켰다는 충격적인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왕비 시절 명성왕후가 중병을 앓을 때, 현종의 부름으로 복평군이 그녀의 치료 절차를 맡아 궁에 지내는 동안 여종 귀례를 희롱하다 강제로 범하고 임신시켰다는 내용도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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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건은 의혹이 많았습니다. 조정 신료들이 이 사건은 왕실의 일이니 관여하지 않겠다고 발을 빼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형식적으로 시작한 수사에서도 복창군과 복평군이 간통을 저지른 증거는 고사하고 이에 대한 근거와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는 복창군, 복평군, 김상업 그리고 명성왕후가 개별적으로 체포하여 대비전에서 고문을 한 여종 귀례마저도 억울하다며 무죄를 호소했습니다. 이렇게 홍수의 변은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고발과 명성왕후의 증언 이외엔 그 어떤 물증도, 증언도, 증인도 찾을 수 없었고 당사자도 강력히 부정했기에 수사가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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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평소 어머니 명성왕후와 외조부 김우명의 지나친 간섭에 시달려왔던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지극히 아꼈던 복선군 형제에게 굳이 벌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하루 만에 무죄판결로 사건을 종결시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남인인 윤휴와 허목은 상소문을 올려 왕족을 모함한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무고죄 그리고 무고한 자에게 같은 벌을 받게 하는 법인 반좌율로 다스릴 것을 주청했습니다. 이는 현종 시대부터 세도를 부려온 김우명의 행적에 대한 탄핵으로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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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들은 왕대비 명성왕후는 폭주했습니다. 그녀는 숙종의 왕명을 사칭하여 한밤중에 대신들을 긴급 소집하였고 편전에서 소복 차림과 대성통곡으로 이들을 맞이하며 자진하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녀는 대신들에게 삼복 형제(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와 김상업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아버지 김우명을 방면하라는 교지에 서명해 이를 즉결 시행할 것을 강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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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성왕후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논란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2차 예송논쟁 때의 관계 탓에 그간 묵인해 왔으나, 현종 때부터 시작되어 숙종 즉위와 함께 극대화된 청풍 김씨 일족의 세도 행위에 대한 비판이 일게 됩니다.

또한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존재를 무시하고 불법으로 유사 수렴청정 행위를 자행하며 국사에 함부로 간여해온 명성왕후의 월권행위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인 남인의 불만이 폭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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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대해 윤휴는 숙종에게 직설적으로 “왕대비를 조관하라.”라는 간언을 올리게 되는데요. 당시 윤휴가 말한 ‘조관’이란 어머니의 뜻을 잘 살펴 관리하라는 뜻이었지만 나중에는 불효의 의미로 해석됩니다.

허목은 내종의 부녀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숙종에게 사사로운 정을 버릴 것을 주청했으며 부제학 홍우원, 이제학 등은 왕대비의 행위가 월권이라 지적했습니다. 심지어 승지 조사기는 “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이때의 남인인 윤휴, 허목, 홍우원, 조사기 등의 발언은 훗날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의 빌미로 인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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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영의정이자 남인 온건파인(탁남) 허적은 “모후께서 주상 전하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주상전하를 모시는 신하 된 도리로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며 명성왕후의 정사 개입을 합리화합니다. 이를 두고 남인 강경파인(청남) 윤휴와 허목은 면전에서 아부한다며 허적을 질타하였지만, 숙종은 이를 계기로 왕대비의 의사를 묻게 됩니다.

이렇게 더욱 힘을 얻은 명성왕후는 삼복 형제가 궁녀들과 불륜을 맺은 것은 조작이 아닌 사실이니 아버지인 김우명을 즉시 무죄 방면할 것, 삼복 형제를 처형하겠다고 맹세할 것, 그리고 당장 그녀의 눈앞에서 교지를 적을 것을 명하였습니다. 왕대비의 행위에 곤혹스러워진 숙종과 대신들은 그녀의 요구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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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삼복 형제(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와 김상업에게 유배령이 내려졌습니다. 딸인 명성왕후 덕분에 처벌은 면하였으나 대대적인 망신을 당한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마음고생을 심하게 합니다. 조정에선 그의 외척 행위를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며, 대신들이 명성왕후를 사대부가 조선 최악의 왕비로 꼽는 문정왕후에 빗대어 언급한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불편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수시로 병을 핑계하여 자리에 누워 버리고 공개적으로 치료를 거부하여 숙종과 대신들을 압박하는 딸 명성왕후의 행위는 김우명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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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치심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김우명은 실의에 빠져 같은 해에 모든 관직을 사임한 뒤 두문불출한 채 술로 여생을 보내다가 2개월 후인 1675년(숙종 1년) 6월 18일 죽게 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화병으로 사망, 혹은 자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삼복 형제(복창군, 복선군, 복평군)는 그해인 1675년(숙종 1년) 9월 16일에 유배에서 방면되어 다시 신분을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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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아버지 김우명의 죽음과 친정의 몰락 위기, 그리고 자신을 향한 비난을 삼복 형제와 남인의 탓으로 생각한 명성왕후는 그녀의 가문에 정치적, 개인적으로 원한을 갖고 있던 서인 산당(송시열 일파)을 회유해 삼복 형제와 남인 타도에 나섭니다. 이에 이루어낸 것이 삼복의 옥입니다. 이는 숙종의 환국 정치에 맞물리면서 결국 복선군, 복평군과 관련된 남인들이 사형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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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680년 남인 정권에서 서인 정권으로 넘어간 경신환국이 이루어진 후, 왕대비 명성왕후는 숙종이 지극히 사랑하던 궁녀 장씨(훗날 희빈 장씨, 장희빈)를 궁에서 쫓아냅니다.

이는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의 삼년상이 1년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송시열의 친척이자 그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송준길의 외손녀 민씨(인현왕후)를 간택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으며,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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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위세 등등하던 명성왕후의 최후는 현대 시점으로 봤을 때 애틋하면서도 매우 황당합니다. 숙종이 병(두창, 천연두)에 걸려 시름시름 사경을 헤매게 되자 평소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왕대비 명성왕후는 숙종의 무사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무당이 왕의 쾌유를 위해서는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라는 계시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명성왕후는 아들을 위해 무당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혹독한 겨울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을 얻어 1683년 음력 12월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신하들은 문제의 무당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숙종은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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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의 삼년상이 끝나자 쫓겨났던 궁녀 장씨(장희빈)는 그녀를 후원하던 대왕대비 장렬왕후에 의해 후궁으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됩니다.

이후 명성왕후가 뿌린 씨앗은 그녀와 꼭 닮은 성격을 닮은 아들 숙종에 의해 활짝 피게 됩니다. 숙종은 강력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서인과 남인들의 대립을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을 이용하면서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 정치를 하게 됩니다. 이는 기사환국, 갑술환국, 무고의 옥, 신임사화 등의 비극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면서 조선 후기 정치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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