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때문에 인생 박살났지만 원망 안하는 일본인 기자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아마 여러분도 익숙하실 텐데 한때 인터넷 댓글 창이 ‘기레기’라는 단어로 도배된 적이 있습니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허위 사실과 가짜 뉴스, 근거 없는 모함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기자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사명으로 기자가 된 만큼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사실만을 전달하고, 이를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말고, 오로지 팩트만을 전달해 그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기레기라 불리는 이들, 아니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줘야 할 일본 기자가 한 명 있습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무조건 일본이 사과해야 한다며 팩트에 근거한 신문 기사 하나로 인생 전체가 부정당한 전설의 일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를 알아봐야겠습니다. 국제관계에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가까운 국가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국민들 사이 감정의 골은 깊습니다.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쌓이고 쌓인 적대감이 국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죠. 파키스탄과 인도가 그렇고, 인도와 중국이 그렇고, 중국과 일본이 그러합니다. 한국 역시 그러한데, 특히 일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다’는 용어로 묘사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적대감의 원인은 과거사 문제에 있죠.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특히 국교 정상화가 시작된 1965년 한일 협정에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를 하나도 넣지 못했고, 1980년대 중반 이후 한일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이 사죄 문제가 불씨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가 해결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가 터지면서 한일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죠. 그런데 그 어떤 일본 정치인도 입에 담지 않았던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물이 바로 아사히 신문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아사히 신문 기자로 재직 중이던 우에무라는 1991년 8월 11일 자 오사카 본사판 기사 한 편으로 특종을 했습니다.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전 조선인 종군위안부/전후 반세기 만에 무거운 입을 열다/한국 단체가 청취조사’라는 좀 긴 제목이었지만 그 내용은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그는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여자 정신대 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 군인을 상대로 부당행위를 강요당한 ‘조선인 종군 위안부’ 중 한 사람이 서울 시내에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안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가 여성의 증언 청취 작업을 시작했다. 협의회는 10일 여성의 이야기를 녹음한 테이프를 아사히 신문 기자에게 공개했다. 테이프에서 여성은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자신의 체험을 숨겨온 그녀들의 무거운 입이 전후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열리기 시작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보도했죠.

그간 일본 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일본 정부는 그간 이들의 존재를 철저히 은폐하며 관련 자료는 메모 하나, 사진 한 장까지 전부 태워버리며 은폐했는데 일본의 대표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니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는 곧 방한을 앞두고 있었고 이 기사 하나로 일본뿐 아니라 한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우에무라의 기사는 전 세계 곳곳으로 타전됐죠. 당시 기사에 익명으로 등장했던 분은 김학순 할머니로 그녀는 3일 후 서울에서 실명 기자회견을 열어 제1호 증언자가 됐습니다. 그녀를 기점으로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줄을 이었죠.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이렇듯 일본의 반인륜적 전쟁범죄는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고,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사과 의사 표명에 이어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한다는 담화를 발표했죠. 이것이 이른바 ‘고노 담화’입니다. 여성을 둘러싼 일본의 전쟁범죄는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남겼습니다.

UN은 즉각 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 린다 챠베즈로 하여금 관련 연구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했고, 한국과 필리핀, 일본 등을 방문해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1996년 ‘차베스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조직적이고 강제적으로 감행된 반인륜 범죄의 진상을 밝히고 그들을 ‘전시 성노예’로 명명해 주위를 환기했는데요.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그리고는 여성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전쟁 범죄에 대해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죠.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년 뒤에는 미국 하원이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며 역사적 책임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죠.

당시 결의안을 추진한 인물은 잘 알려졌듯 일본계 3세 마이크 혼다 의원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의 로비는 생각보다 훨씬 조직적이었다고 하죠. 혼다 의원과 함께 결의안 초안을 작성한 민디 코틀러 소장은 일본 정부는 결의안 저지를 위해 우리가 여러 차례 사과했고 역사 교과서에도 이 문제를 충실히 다루고 있다는 서한을 하원의원들에게 2차례 돌렸다고 고발했죠.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그녀는 그때마다 일본 정부는 진솔한 사과를 한 적이 없었고 일본 교과서는 왜곡됐다며 반박문과 관련 자료를 배포하는 것으로 맞섰죠. 이러한 조직적인 로비에도 미국 하원은 이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이 결의안 직후 서방 언론은 물론 알자지라 등의 중동 언론까지 끔찍하다는 표현으로 일본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세계 3위 경제 강국으로 꼽히던 일본의 명성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는데요.

일본 우익들을 중심으로 우에무라 다케시 기자에 대한 보복이 시작된 것도 이 즈음입니다. 그의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죠. 우에무라가 위 기사를 썼을 당시 34살이었던 그는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 사회부에 근무하며 좋은 기자가 되겠다는 정의감 하나로 살았습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원래 그는 위안부에 대한 특집기사를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취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다녀도 그녀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이 한국 정대협이 피해 할머니들을 청취조사하고 있어 할머니들의 증언이 시작됐다는 정보를 전해주면서 한국을 오게 됐죠. 한국에 오자마자 정대협 윤재옥 공동대표가 조사 내용과 함께 증언 테이프를 들려줬고 이 내용을 다듬어 아사히 신문의 톱기사로 보도해 세계적인 특종을 낸 겁니다.

그런 그의 삶은 2014년부터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월 일본 주간지 ‘주간문춘’은 ‘위안부 날조 기사를 쓴 아사히 신문 기자가 아가씨들의 여자대학 교수로’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뽑은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이는 이른바 우에무라 공격의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당시 그는 기자 생활을 접고 3년째 삿포로의 한 대학 강사로 재직하며 2013년 고베의 고베 쇼인 여자 학원대학 부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간문춘의 기사와 동시에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됐죠. 가족은 물론 새로 이직하기로 결정된 대학, 현재 재직 중인 대학을 대상으로 우익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시작됐죠.

그 수위는 무서운 수준이었습니다. 협박 전화와 편지, 온라인 등을 통해 고등학생이었던 딸에 대한 끔찍한 위협과 협박이 시작됐죠. 일본 정치권이야 우익이 장악하고 있어 얼마든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언론 기사를 내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기사를 내보낸 지 23년 만에 다시 언론의 중심에 섰습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물론 부임 예정이던 대학과의 계약도 취소됐죠. 그런데 당시 주간문춘과 우익들이 그를 ‘날조 기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위안부를 설명하면서 ‘정신대’라는 표현을 썼고, 그들이 강제로 연행됐다고 쓴 겁니다. 우익들은 우에무라 기사 때문에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개망신당했다고 몰아붙였죠.

혹 헷갈리는 분들이 있을 수 있어 용어를 조금만 다듬고 가겠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신대’를 사용했었습니다. 정신대는 일본 측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으로, 제국주의 전쟁에 필요한 인력 동원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은 누구나 일본 국가에 몸을 바친다’는 뜻의 제도상의 용어입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1940년경부터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했었으나 1944년 여성을 군수공장에 동원하기 위해 제정한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된 이후 특히 여자 근로정신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죠. 하지만 여자 근로정신대에 동원된 여성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한 경우가 있고, 그중 일부는 위안부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개념에 혼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이 때문에 정신대로 동원되어 일한 여성들까지 위안부로 여겨지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어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일본 우익들은 이 용어에서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겁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정신대와 위안부는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또한 ‘강제 연행됐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속아서’라고 언급했을 뿐이죠. 그러니까 일본 우익들은 사실보다는 그의 기사에 흠집을 내고 그를 날조 기자라고 낙인찍어 공격할 좌표를 찍어준 것에 불과합니다.

공격을 참을 수 없던 우에무라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명예훼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주간문춘을 대상으로 도쿄 재판소에, 주간신문을 대상으로 삿포로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죠. 최고재판소까지 가면서 총 5년의 세월이 소요된 이 판결은 결국 우에무라의 패소로 확정됐습니다. 1심을 맡았던 도쿄지방재판소는 주간문춘의 의견을 받아들여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라고 판단했는데 이는 2심 판결에서 인용됐고, 최고재판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외반응 일본반응 중국반응 한류 해외리얼반응 외국반응 해외언론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도쿄재판소 판결 당시에는 자발적으로 그를 돕고자 했던 변호사 170여 명이, 삿포로 재판소 판결 당시에는 약 100명의 변호사가 그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최고재판소의 최종 판결이 내려진 직후 일본 저널리스트 회의, 미디어종합연구소, 일본 매스컴 문화 정보 노조 회의 등이 나서서 최고재판소의 결정을 수긍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죠.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극우의 상징과도 같았던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자신의 SNS에 ‘우에무라 기자와 아사히 신문의 날조가 사실로 확정됐다는 것이네요.’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재판 결과를 다룬 기사를 첨부하면서 덧붙였는데, 일본에 불리한 팩트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기자의 삶이 이렇게 망가져도 되는 걸까요?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