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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립박물관 창고에 꽁꽁 숨겨둔 중앙아시아 보물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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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즉위 3년 후 1866년 9월 프랑스는 3척의 군함을 끌고 와서는 무력시위를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탄압해 사망에 이르자 이를 빌미로 중국 텐진에 머물던 극동사령관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온 것이죠. 1차 침공 때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순찰만 하고 돌아갔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7척의 군함과 600명의 군인을 대동해 강화도를 침공해 점령해 버렸었죠.

병인양요가 시작된 겁니다. 프랑스는 흥선대원군의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는데요. 사실 프랑스는 이때 큰 마음 먹고 조선을 점령해 식민지로 삼았을 수도 있었는데 조선을 너무 얕잡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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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국가를 점령하겠다며 고작 전투병 450명을 이끌고 왔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인 패인이었던 선발대 160명으로 강화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다 양헌수 장군이 이끈 500명의 조선군 포수에게 완패하면서 전의를 상실해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퇴각하면서도 프랑스군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782년 정조는 왕실과 관련된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했는데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이를 불태워 전각이 소실됐습니다.

무려 5천 권 이상의 책이 타버렸고, 의궤 297권을 강제로 배에 실어 프랑스로 가져가 버렸죠. 당시 한국에 왔던 프랑스 군인 중 한 명이 ‘프랑스 군인 지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라는 책을 1883년 출간했는데 그는 ‘로즈 제독이 강화읍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군함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라고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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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로즈는 아무 성과도 없이 퇴각하는 것이 아까워 강화도에 불을 지르고 전리품을 챙겨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로 약탈해 간 의궤는 145년 뒤 2011년 8월에야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 중인 297권의 의궤는 우여곡절을 거쳐 반환받기는 했으나 이마저도 완전한 반환이 아니라 5년마다 대여 계약을 갱신하는 조건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약탈해 간 문화재를 환수받을 수 없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불법, 부당하게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 환수를 추진하는 문화재청 산하 기관인데 홈페이지에는 ‘229,655’라는 숫자가 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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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 세계 27개국에 흩어진 한국 문화재의 숫자를 나타내는데 일본이 95,000점이 넘는 문화재를 가지고 있죠.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와야 할 우리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런데 그간 한국은 빼앗기기만 한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도 약탈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본국으로 가져가면 국보급으로 인정받을 1,500점이 넘는 문화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국도 남의 물건을 약탈했던 것일까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문화관이라는 별도의 전시장을 마련해 두고 있는데 그중 3층 중앙아시아실에는 1,500여 점의 중앙아시아 유물이 순회 전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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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전시장에는 중앙아시아실이라는 이름보다도 오타니 컬렉션이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는데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 지역을 탐험했던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스웨덴의 스벤 헤딘과 영국의 마크 아우렐 스타인을 들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를 꼽을 수 있는데 오타니는 일본 교토의 유명 불교 사찰인 니시혼간지의 21대 문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본에서 절을 소유한 집은 대대로 귀족인데 그 역시 9살에 출가했다가 1898년 22살의 나이로 당시 권문세가의 딸과 결혼해 백작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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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처제는 나중에 일본 123대 왕 요시히토와 결혼해 데이메이 왕후가 됐습니다. 귀족이었던 오타니는 1900년 영국 런던에서 유학 생활을 했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고고학적 탐험이 한창 불붙고 있었습니다. 오타니 역시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이 되어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었죠.

이 과정에서 스벤 헤딘 등 중앙아시아 탐험가들과 교분을 쌓으며 지식을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02년, 1908년, 1910년 세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조직해 어마어마한 유물을 수집했는데요. 일반적으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기스탄, 투르크매니스탄을 중앙아시아라 부르는데 우리는 이 지역을 투르기스탄 또는 서역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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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3차에 걸친 탐험은 서역 지방을 중심으로 티베트, 네팔, 인도 그리고 중국 운남성과 사천성까지 탐험했는데 탐험 때마다 엄청난 양의 중앙아시아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왔죠. 오타니 컬렉션은 이 유물들을 이야기합니다.

1915년 오타니는 ‘서역고고도보’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탐험대를 조직한 목표는 불교의 동진 경로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옛 중국 구법승의 이동로 흔적을 찾고,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불교가 받은 압박 상황을 밝히고 중앙아시아에 남아있는 불상과 불경, 불구 등을 수집하고, 나아가서는 지리, 지질, 기상학의 자료를 찾고자 했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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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값을 치르고 구입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발굴이라는 미명 하에 무단으로 반출한 약탈품이라서 오타니 약탈품이라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벽화부터 시작해 불경, 석상, 불상, 고문서 등을 대량으로 반출했지만 전문 고고학자가 아닌 까닭에 그는 상세 보고서는커녕 발굴품들의 출처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일한 운송수단인 낙타에 실을 수 있을 만한 무게로 벽화를 자르다 보니 훼손도 심했는데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타니 약탈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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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는 말씀드렸듯 니시혼간지 21대 문주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22대 문주가 됐습니다. 보통 서양에서는 중앙아시아 탐험에 국가가 지원하거나 박물관이 후원하고는 했지만, 오타니는 모든 탐험 비용을 사찰 자금을 활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찰 재정에 적신호가 켜지고 말죠.

결국 1914년 문주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유물들도 팔려나가기 시작했는데 1916년 11월 오타니의 저택과 남아있는 모든 유물을 일본인 구하라 후사노스케가 사들입니다. 그리고 구하라는 조선에서 광산채굴권을 얻기 위해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에게 이 유물을 기증했는데 데라우치는 1945년 광복 때까지 이 유물들을 경복궁 수정전에 보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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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러한 내용은 기사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패망하게 되고 이 1,500여 점의 유물은 고스란히 한국에 남게 됩니다. 현재 한국이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타니 약탈품을 보유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 유물들은 6.25를 겪으면서 여자 미라가 훼손되는 등 자칫하면 잿더미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었지만, 박물관 직원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미군의 협조 덕에 부산으로 옮겨져 무사히 전쟁을 버텨내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데요. 차후 콘텐츠에서 6.25 전쟁 때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박물관 직원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미군 이야기를 한번 다뤄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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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현재 한국이 보유한 오타니 악탈품은 질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데 한 점 한 점이 전부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국보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자료들입니다. 특히 벽화의 경우 독일에 남아있었던 서역 벽화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상당히 소실됐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서역 벽화들의 가치는 더 높아졌는데요. 그런데 여기에서 논쟁이 생깁니다.

한국은 빼앗긴 문화재를 돌려달라며 정부 산하 기관까지 두고 있으면서 우리도 약탈한 것이 분명한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다면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입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힘을 과시하며 무분별하게 문화재를 약탈한 국가들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한국도 이 악마들 사이에 있으니 난감한 상황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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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환하는 것도 반환하지 않는 것도 정답을 내리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자면 한국은 이 문화재들을 강제로 취득한 가해자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한국에 남겨지게 된 것이고, 또한 이를 돌려준다면 반환처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줘야 할지, 투르크매니스탄에 반환해야 할지, 우즈베키스탄에 반납해야 할지 반환처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국가 간 합의에 의해 반환해야 하는데 협상 테이블에 앉을 주인공이 없는 것이죠.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 현재 알려진 국외 반출 문화재는 23만 점에 육박합니다. 이마저도 확인된 수치인 것이지 개인이 소장하고 절대 공개하지 않는 숨겨진 문화재까지 더한다면 아마 100만 점은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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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제국주의 시대나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불법, 부당하게 외국으로 반출된 문화재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반환받아야 합니다.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 반환 문제는 ‘누가, 언제, 누구 소유의 문화재를, 어떻게, 어느 나라로 가져갔고, 지금 특정 국가, 예컨대 한국이 그 문화재를 무슨 근거에 의하여 반환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일 텐데요.

현재 한국 정부가 직접 문화재를 회수하거나 반환받는 경우 1995년 체결된 UNIDROIT 협약에 따라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소유자에게 합당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문화재란 우리나라 조상들의 얼과 삶이 살아 숨 쉬는 것들이고,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할 유산입니다. 조금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우리의 소중한 유산을 다시 찾아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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