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에서 거지 취급받은 외국 노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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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국 TV 프로그램에 등장한 한 외국 노인, 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커다란 비닐백을 손에 들고 길을 걸어 다니며 남이 버린 물건이 주워 담는 그의 모습, 집에는 온갖 물건이 가득 쌓여 있어 마치 수집벽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방송 내내 이 노인은 남의 나라에 와서 구걸이나 하러 다니는 사람처럼 묘사되었는데요.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이 외국 노인의 진짜 정체가 밝혀지며 한국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1952년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음악학과를 졸업한 미국 청년, 실력과 재능을 겸비했는데 좋은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주변에서는 그가 당연히 음악도로서 탄탄대로를 걷겠다고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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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년 뒤, 그가 서 있던 곳은 연주회장도 강연장도 아닌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였습니다. 그것도 그의 나라 미국도 아닌 낯선 아시아 국가, 대한민국의 전쟁이었습니다. 강원도 야전병원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하게 된 미국 청년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정말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 2~3시, 늦은 밤 병원 앞 산에서 갑자기 쿵, 쿵, 꽹~ 정신이 번쩍 들 만큼 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건 북, 태평소, 징, 꽹과리 등 한국 악기들이 연주되는 소리 같았는데요. 갑자기 산에서 들려온 이 의문의 소리, 군인들의 컨디션을 망치려는 빨치산 교란작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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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군인들은 이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해 괴로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미국 청년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이 소리에 자신은 상쾌한 기분이 들었는데요. 특히 태평소의 소리가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이게 미국 청년과 국악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죠. 휴전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음악 공부를 시작했는데요. 공부하는 내내 그의 귓가에는 한국 전통악기가 계속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 유학생 한 명을 만나 친분을 나누게 되었고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한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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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에서 그는 굉장히 흥미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다양한 장르의 국악이 있고 다양한 전통악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한국에서의 짜릿한 만남 이후 국악을 잊지 못하고 있던 그는 한국 전통 음악 연구에 뜻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전쟁 이후라 민간인의 입국이 쉽지 않았기에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석사를 따고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려는 찰나, 1960년 드디어 한국에 민간인 입국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즉시 미국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행을 준비했는데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그의 이런 행동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잘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한국에 가냐며 뜯어말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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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한국행을 택했다고 합니다. 탄탄대로로 놓인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죠. 그리운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된 그는 인사동 옆에 있는 한국 국악 예술학교를 찾아가 한국 전통 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대신 자신은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딜을 넣었죠.

당시 한국의 사정이 너무 안 좋다 보니 교장선생님은 우리가 돈이 없어서 월급을 제대로 지급해 줄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미국 청년은 돈은 필요 없고 대신 악기와 소리를 알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한국 국악 예술학교에서 영어와 오선보를 가르치며 국악을 공부하게 되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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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악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었고 그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습니다. 여류 명장 박녹주 선생님을 만나면서 제대로 국악을 공부하게 되었고 동시에 연세대 한국어학당 교재를 구입해 한국어를 독학해 나갔습니다.

가야금, 거문고, 민속장고, 태평소, 설장고 등 우리나라 전통악기란 악기는 다 접하고 공부했으며 대부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공연까지 이어가며 그의 입지는 점점 더 커졌는데요. 한국인들의 눈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한국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부르는 모습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렇게 이 미국 청년의 이름은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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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찰스 헤이먼, 헤이먼 씨의 국악사랑은 단순히 국악을 배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국악을 해외에 알려야 된다며 자신이 앞장서서 일이 진행했습니다. 1963년 미국 뉴욕 아시아학회에서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발표, 바라춤을 직접 선보이며 미국에서 한국 국악의 매력을 선보였습니다.

1964년 우리 전통 공연예술단이 미국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뉴욕 필하모니 홀 공연뿐만 아니라 미국 대학 27곳에서 순회공연을 하게 되었죠. 헤이먼 씨는 미국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았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에도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 해 그는 국악 역사의 놀라운 사건 하나를 만들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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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저명한 음악가 존 레비가 한국을 방문해 가곡, 판소리, 궁중음악, 기악 연주, 민속음악 등 한국 전통음악을 집대성할 수 있도록 2달간 머물렀었는데요. 당시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녹음기 나그라를 이용해 CD 10장에 우리 소리를 담게 되었습니다. 존 레비의 컬렉션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음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만약 이 컬렉션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옛 음악을 고음질로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후세들에게 물려줄 중요한 기록물이죠. 이 존 레비의 컬렉션을 추천한 것이 바로 헤이먼 씨였습니다. 헤이먼 씨는 이렇게나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국악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번역 작업까지 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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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악부, 정축진찬의궤, 설중화춘곡. 특히 예술적 가치가 높았던 이 3가지의 국악 자료를 포함해 무려 200여 점의 고서적과 녹음 자료를 국립국악원에 기증해 한국 전통음악 보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헤이먼 씨는 국악을 연구하며 한국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뤘는데요. 그리고 자녀 중 장남도 국악을 공부하여 국립국악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995년 아예 한국으로 귀화하여 법적으로도 한국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해이먼 대신 해의만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죠. 해의만 선생님은 서울 해씨의 시조인데요. 우리나라에서 해의만 선생님의 공로를 인정해 은관문화훈장, 국무총리 표창, 한국 유네스코 위원회 문화상, 한국국제문화협회 문화상 등의 수많은 표창과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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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외국인이 한국 국악을 하면 눈에 띄고 많은 공로까지 세웠는데 왜 그는 TV나 언론에서 자주 보지 못했던 걸까요? 아마 지금 해의만 선생님에 대한 존재를 처음 아신 분도 계실 텐데요. 그리고 그가 인터뷰를 모두 거절해 왔던 이유가 한참 후 김수현 기자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의만 선생님이 언론을 피하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한국의 TV 프로그램에 해의만 선생님이 출연하셨는데, 해의만 선생님을 외국 노인이 커다란 비닐백을 들고 길가에 버려진 물건을 주워 와 집에 쌓아두는 걸인처럼 방송을 낸 것이었습니다. 마치 남의 나라에 와서 구걸하고 다니는 외국 노인인 것처럼 말이죠. 이걸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는 헤이만 선생님은 이 사건 이후 방송 기피증이 생겨 출연을 거부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김수현 기자는 해의만 선생님이 문화훈장을 받게 된 날 찾아가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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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계속해서 거절당했지만 그날만은 경사스러운 날이어서인지 아니면 김수현 기자의 정성이 통해서인지 해의만 선생님이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날 인터뷰에서 그동안 해의만 선생님의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된 것이죠. 해의만 선생님은 고령에도 끝없이 공부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연구해도 연구를 못 끝낼 것 같다며 너무나 아쉬워하셨습니다.

김수현 기자의 노력으로 인제야 한국 방송에 대해 마음을 조금 여셨는데 2013년 3월 1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타계하셨습니다. 평생 한국 전통음악을 위해 노력하셨는데 한 방송국의 실수로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못해 너무나 아쉬울 따름인데요. 오늘 콘텐츠로 많은 한국인에게 푸른 눈의 국악인 해의만 선생님이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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