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무슨 일이 이렇게도 많이 일어났던 거냐?’ 최근 들어 제 영상에서 유물이나 국보와 같은 발굴스토리를 다루다 보니 많은 구독자분이 남겨주시는 댓글입니다. 실제 한국은 인구수로는 그렇게 적지 않지만, 국토 면적으로 보자면 전 세계 200여 개 국가 중 100위권에도 들지 못할 만큼 작고 아담합니다.
그렇다 보니 ‘역사가 길어봐야 얼마나 길겠어?’라며 깔보는 분들도 있지만 이는 절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를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면 한반도 곳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켜켜이 쌓아온 수많은 역사의 기록이 세상 빛을 볼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불가피하게 땅을 뒤집어엎을 때 이러한 역사의 기록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죠. 지난 2020년 6월 19일 네이버 지식인에는 ‘금괴 30kg발견…, 금 시세와 소유권 질문’이라는 제목의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자신을 29살 청년이라 소개한 글쓴이는 ‘강원도에 땅을 사서 아버지와 함께 집을 지으려고 밑 작업을 하는 도중 누군가가 묻어놓은 듯한 금괴를 발견했다. 흙을 털어내고 무게를 재니 총 30kg 정도 되고 작은 금괴를 금은방에 가져가 의뢰하니 순금이 맞다고 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한 누리꾼은 ‘현재 골드바 1kg에 7,762만 2천 원 정도 한다. 30kg이면 23억 2,866만 원 정도’라고 답변을 남겼습니다.
이 골드바의 정체가 범죄수익금인지 혹은 누군가의 실수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금괴 30kg을 우연히 발견했다면 소유권의 문제 이전에 개인의 입장에서는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개인이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한국 땅에서 발견된 유물 중 몇몇은 단번에 한국의 국격을 높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1978년 주한미군에 근무하던 그렉 보웬 상병이 경기도 연천에서 발견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전 세계 고고학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버리면서 한반도에 이미 70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고,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흔적인 고인돌은 전 세계의 50% 이상이 한반도에 남아있습니다.
이에 전북 고창, 전남 화순, 인천 강화 등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죠. 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조각만 발견될 뿐 완전한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청동검은 한국의 어느 박물관에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인류의 가장 소중한 작물로 자리 잡은 콩의 원산지 역시 한반도입니다. 식물의 경우 그 변이종의 다양성으로 원산지를 추정하는데 일찍이 콩의 가치를 알아챈 미국은 1929년 유전자원 확보를 위해 ‘동양 농업 탐험 원정대’를 파견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조선과 일본, 만주를 돌아다니며 총 4,471점의 야생 콩을 수집했는데 그중 579점이 일본에서, 513점이 만주에서, 3,379점이 조선에서 얻었습니다.
당시 원정대장을 맡았던 도셋과 모스는 조선에서 모은 데이터와 사진만으로도 훌륭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보고서에 쓰기도 했죠. 그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벼농사의 흔적도 한국에 남았습니다. ‘소로리 볍씨’로도 불리는 이 볍씨는 충북 청원군에서 발견됐는데 기존에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보다 무려 4,000년 이상 앞섰습니다.
이 볍씨 때문에 전 세계에서 발간되는 고고학 개론서가 개정되기도 했죠. 이 작다고 느끼는 한국 땅에는 그러니까 70만 년 전부터 우리 조상이 살았던 흔적을 켜켜이 보관하고 있고 어쩌면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바닥 지하에도 어떤 시대, 어떤 유물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유물들이 발견될지 아니면 영원히 땅속에 묻혀 있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득이하게 지형에 변화가 생기는 경우, 가령 재건축을 위해 땅을 뒤집어엎을 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보물이 등장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죠.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마 재건축일 겁니다. 서울 아파트값이야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고 여기에 신축 아파트라면 그 가격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재건축이 승인되고 공사가 시작됐다고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지난 2019년 8월 주민들을 전부 이주시키고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하려던 찰나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삼국시대 문화재가 쏟아져 나온 겁니다.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6조 1항은 ‘건설공사의 시행자는 해당 건설공사 지역에 문화재가 매장, 분포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사전에 매장문화재 지표조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잠실 진주 재건축 조합 역시 용역업체를 선정해 문화재 지표 조사와 참관 조사를 진행했죠.
그런데 2021년 12월 참관 조사 과정에서 84개 지점에서 굴착을 시작했는데 36개 지점에서 백제 한성기와 6세기 신라문화층에서 다수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이에 용역업체는 즉각 정밀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문화재청에 제시하며 18,700제곱미터를 정밀 발굴 조사로 전환 조치해 유적의 분포 범위와 시기, 성격 등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죠.
따라서 일단 전체 면적의 약 2.3%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재개발은 중단된 상태로 정밀발굴 조사 결과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러한 결과는 예상됐습니다. 잠실 진주아파트가 자리한 송파구는 백제 678년 역사 중 가장 긴 493년간 한성백제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지나가던 개가 땅을 파도 문화재가 발굴된다는 소문도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1997년 풍납동에서는 그간 베일에 싸였던 한성백제의 왕성이 발굴됐는데 그게 바로 ‘풍납토성’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송파구 풍납동 일대에서 주택을 건축하거나 정비 사업을 진행하다 문화재가 발굴되면 그간 주민이 직접 부담해야 했던 발굴 비용을 전액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풍납 토성 보존 및 관리에 관한 특별법까지 제정된 상태죠.
그런데 비단 송파구 풍납동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에 수많은 국가가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좁은 한국 땅에는 그 양을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출토됩니다. 특히 천년왕국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나무 한 그루도 제대로 심지 못하는 형편이죠.
그런데 최근 20여 년 사이 ‘바다의 경주’라 불리는 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지난 2019년 9월 19일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유물 발굴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한 주민이 태안 청포대와 달산포 사이의 해변에서 조개를 캐다 땅속에서 용머리가 장식된 큰 유물을 찾았는데 3시간 팠는데 꺼내지 못하겠다는 전화였습니다.
이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9월부터 2년간 발굴 조사 끝에 총 4점의 유물을 찾아냈는데 용머리 모양 취두 3점과 장수상 1점입니다. 취두란 독수리 머리라는 의미로 독수리 머리 모양으로 조각된 기와를 의미합니다. 이름은 독수리지만 사실은 용머리 문양이 훨씬 더 많죠.
보통 취두는 기와지붕 모서리에 얹어 안정성을 더하기도 하지만 주로 장식용으로 사용되는데 용을 그린 최고급 기와로 궁궐에서나 사용되던 고급 기와입니다. 세자도 함부로 쓸 수 없고 왕이 쓰는 건물에서만 사용할 수 있죠. 취두는 처음부터 나눠서 만들지 않고 한 덩어리로 새겨 만든 후 이를 둘로 나눠 가마에 굽고 하나씩 지붕에 올려 조립합니다.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을 하는 이유는 크고 무겁기 때문인데 당시 발견된 취두만 하더라도 높이 103cm의 무게도 상, 하부 총 120kg이 넘기 때문에 인부 1명이 이를 지붕까지 들고 나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반으로 잘라 굽고 지붕으로 올려 조립하는 방식을 쓰죠.
하부 기와에는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린 위엄 있는 용의 형상을, 상부 기와에는 몸을 꼬고 있는 작은 용 한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아무래도 임금이 사는 건물에서 사용하다 보니 비늘이나 갈기 등이 상당히 정교하게 새겨졌습니다. 조선 전기에 사용되던 장식 기와가 상하부 완벽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취두와 더불어 장수상도 발견됐는데 이 역시 장수 모양의 기와입니다.
장수상은 건물의 추녀마루에 열을 지어 올린 짐승과 사람 모양의 장식 기와 일부분으로 대열의 가장 앞에 배치되는 장식입니다. 정교한 비늘이 새겨진 갑옷을 장착한 무사가 무릎 위에 왼손을 올린 모습이 상당히 생동감 있게 표현됐는데 이는 경복궁이나 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장수상과 형태나 문양 표현 방식이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는데요.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조선 전기 왕이 사용하던 건물에 장식된 기와라면 서울 근교에서 발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왜 하필 저 먼 서해 태안에서 발견됐냐는 점인데요. 국립태안해양문화연구소는 그 답을 물살이 강한 태안 앞바다에서 찾았습니다.
태안에서는 지난 2007년 주꾸미가 바다 아래에서 고려청자를 끌어올리면서 연이어 고려시대 침몰 선박 3척을 찾아냈는데 전부 대단한 유물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태안을 두고 ‘바다의 경주’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정답은 바닷길 때문입니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곡창지대였던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생산된 곡물을 싣고 수도인 개경과 한양까지 운반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태안 앞바다를 지나야 합니다. 예전 ‘안흥량’이라고도 불리던 태안 앞바다는 예부터 해남의 명량, 황해도의 인당수, 김포 손돌목과 더불어 4대 위험한 바닷길로 꼽힙니다. 특히 태안의 해무가 짙고 암초가 셀 수 없이 많아 ‘배 지옥’으로까지 불리던 곳이죠.
옛날에는 선박을 정박시킬 때 사용되는 나무 닻이 물속에 가라앉도록 ‘닻돌’이라는 큰 돌을 사용했는데 선박 1척당 1개의 닻돌을 사용했죠. 그런데 태안 앞바다에서는 현재까지 120여 개의 닻돌이 발견됐는데 이로써 최소 100척 이상의 선박이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태안에서는 주꾸미가 고려청자를 끌어 올리고, 침몰된 선박에서 수천 점의 고려청자가 발견되는 겁니다. 괜히 바다의 경주라고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발굴 기술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앞으로 한국 땅에서는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될 것입니다. 이런 유물들 전부 소중한 역사의 파편이니 하찮아 보이는 물건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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