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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와서는 안됐던 1,500년 전의 그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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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즉 50년이라는 시간은 꽤나 긴 시간입니다. 그럼 시간을 돌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70년대로 가볼까요? 1970년대 우리나라는 나라 곳곳에 촘촘한 경제의 뿌리를 만들고 있던 시기로 여전히 배고프고 힘들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마다 기억하는 키워드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격동의 시대라는 점에 이론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한민국의 고고학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1971년 배수시설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1,500년 만에 세상에 속살을 드러냈고, 1973년에는 천마총이, 바로 직후에는 황남대총이 발굴됐습니다. 이후 고령 지산동 44호분과 신안해저유물까지 모습을 드러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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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에서만 5,200여 점, 천마총에서 11,500여 점, 황남대총에서 58,4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고, 최초 수중 발굴로 기록된 신안에서는 24,000여 점의 유물과 28톤에 이르는 동전 800만 개가 쏟아졌죠. 그런데 지금이야 함부로 땅을 파헤칠 수 없도록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잘 사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던 당시는 모든 것이 생소했습니다.

발굴 경험 부족으로 무령왕릉은 하룻저녁에 졸속으로 발굴되었고, 이마저도 전국 기자들이 몰리는 바람에 왕릉 주변이 모두 훼손됐습니다. 이런 사건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문화재 발굴에 대한 체계가 잡혀 나갔는데 정부가 끝끝내 발굴을 망설이던 무덤이 있습니다. 경주의 황남대총인데, 이는 애초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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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수많은 고분 중 규모가 가장 큰 제98호분 황남대총을 발굴해 관광객에게 내부를 공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했죠.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의 무덤을 발굴한다는 것이 금기였을 뿐 아니라 고고학계가 아직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에는 발굴 기술이나 경험이 일천한 관계로 난색을 표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에 앞서 연습용으로 경주에 깔린 수많은 고분 중 하나를 연습 삼아 발굴하기로 했는데요. 그렇게 선택된 것이 황남대총에서 130m 떨어진 제155호분입니다. 그리고 1973년 4월 6일 마침내 발굴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최소 1,500년은 된 것으로 보이는 백마 한 마리가 무덤 속에서 발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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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호분은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경주미추왕릉지구 발굴조사단을 조직해 시행한 국가 주도의 첫 번째 기획 발굴 사례입니다. 제155호분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덧널을 넣은 뒤 그 위를 돌로 덮고 다시 흙을 씌워 만들었는데 지름 약 47m, 높이 12.7m로 생각보다 큰 무덤입니다.

황남대총에서 겨우 130m 떨어져 거리로나 규모로나 연습 삼아 발굴하기에 훌륭한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곳곳이 무너져 내린 봉분은 이미 도굴꾼들의 손을 타 내부 훼손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담감도 덜했죠.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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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야 신라의 천년고도인 덕분에 도굴은 가장 흔한 범죄였는데 고분 제155호도 그럴 것이라 믿은 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겉모습만 훼손됐을 뿐 내부는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1973년 4월 6일부터 진행 8개월의 발굴에서 천마총은 무려 11,297점의 유물을 쏟아냈습니다.

특히 금제품이 780점 출토됐는데 으뜸 증의 으뜸은 금관입니다. 현재까지 신라시대 고분에서 수없이 많은 금관이 나왔지만, 그중 화려하기로 최고를 꼽으라면 천마총 금관을 꼽습니다. 높이 32.5cm의 금관은 3단 장식에서 발전해 4단으로 꾸며졌는데 이 금관 덕분에 천마총이 왕릉급 무덤임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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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금관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1970년대 천마총 발굴 당시 이 사업의 모든 초점은 오로지 금관에 있었습니다. 황남대총을 포함한 경주 고분 발굴 사업을 승인한 박정희 전 대통령 정령은 금관이 나온다면 이를 공개해 관광상품으로 만들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황남대총에 앞선 연습 발굴 당시 그는 금관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가를 물었고, 당시 정재훈 문화재관리국 사무관은 아주 높다는 말로 설득했죠. 그런데 신라금관 중 가장 화려한 천마총 금관이 발굴될 당시 천재지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발간된 발굴조사보고서는 날마다 기록했는데 7월 27일 자 일지에는 놀라운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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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7월 27일 맑은 후 비. 금관을 들어 올릴 때 청명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급변한 천기에 무섭고 놀라서 경건한 다음으로 금관을 수습하여 세척을 끝냈을 때는 밤하늘도 씻은 듯이 맑아져 있었다.’라고 쓰고 있죠.

당시 천마총에서 금관을 들고나오던 조사원은 갑자기 쏟아지는 뇌성벽력과 폭우에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고 간신히 금관을 내려놓은 후 현장 사무실로 피신했습니다. 그렇게 국보 제188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죠. 황금 유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금으로 만든 관모와 금으로 만든 허리띠 등도 발굴됐는데 각각 국보로 지정된 천마총 관모와 천마총 금제 허리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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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섬세하게 제작된 관모와 허리띠를 통해 당시 신라의 금속 세공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덤을 발굴하자 황금 유물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엄청난 관심을 받았고, 주요 유물이 출토될 때마다 언론은 속보 전쟁을 벌였습니다. 외신들 역시 한국 고고학 발굴의 큰 사건이라며 주목하기도 했죠.

1973년 7월에는 박 전 대통령의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았는데 현직 대통령이 현장을 찾은 첫 사례로 천마총 이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탄력적으로 진행되는 마중물이 됐습니다. 그런데 진짜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155호 고분을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한 주인공이 발굴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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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단원들 사이에서도 절대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천마도입니다. 1973년 8월 22일 발굴 일지는 ‘8월 22일 맑음. 오늘 동부 중앙의 투조금동판식 축제장니를 드러내자, 그 밑에서 하늘을 나는 천마가 채색된 백제수피판이 나타났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바로 하얀 천마도가 등장한 겁니다.

천마도는 말 안장의 부속구인 장니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장니란, 말이 달리면서 발굽에서 튀는 흙을 차단하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린 판입니다. 순우리말로는 말다래라고 하죠.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장식성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행사나 행렬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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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물론 그림이 그려진 판 역시 중요한 유물이기 때문에 천마도와 장니를 합쳐 천마도 장니라고 부르는 겁니다. 어쨌든 천마도 장니는 부장품을 넣어둔 궤짝에서 1쌍이 발견됐는데 당시 발굴단원들 사이에서는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 나왔다는 탄식이 터졌습니다.

천마도를 담고 있는 나무상자는 옻칠이 되어있었고, 상자 모서리에 금판이나 금박이 붙어있어 귀중한 물건이 담겨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죠. 그리고 상자 덮개를 여는 순간 모든 이들은 경악했습니다. 무려 1,500년 전 신라인들이 색칠한 원형 그대로의 채색된 그림을 봤으니까요. 세계적인 대 발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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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한줄기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색감을 간직한 상태로 무려 1,500년을 버텼으니 보는 이들이 얼마나 환희를 느꼈을지 감이 오시나요? 지금이야 공기에 노출되고 보존 처리하느라 색감이 다르지만 막 출토됐을 당시에는 원색을 보존하고 있어 황홀했다는 것이 발굴단원들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왜 이 천마도 장니는 나와서는 안 된다는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을까요? 하얀색 천마가 그려진 장니는 가로 75cm, 세로 53cm, 두께 6mm의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서 누볐습니다. 그 위에 천마를 그린 것인데 그림판이 다른 것도 아니라 목재, 즉 자작나무 껍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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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물로 된 유물이 햇빛에 노출되면 그대로 으스러져 미세한 가루로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를 자신 있게 발굴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도 남기고, 이를 바탕으로 재현할 수는 있겠지만 실물이 사라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총 4점의 천마도가 섬세한 붓칠로 하나하나 발굴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붓을 이용해 첫 번째 천마도에 가라앉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고 촬영과 실측을 진행했습니다. 그림 속 하얀색 천마는 다리 앞뒤에 마치 고리 모양과 같은 돌기가 있고 혀를 쭉 내밀고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흰색 말과 함께 붉은색과 갈색, 검은색으로 덩굴무늬도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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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라 사람들은 하늘을 달리는 흰색의 말이 동물의 신으로, 숨진 이 들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고 하죠. 어쨌든 한 점씩 조심스레 발굴하다 마지막 천마도 발굴을 시작하는 순간 발굴팀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천마도에서 벌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가루로 변해버릴 것이 자명했으니까요.

어떻게든 완벽하게 수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함석판을 구해 장니 밑으로 깊이 밀어 넣어 조심스레 마지막 작품을 수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과서에 수록된 그 천마도죠. 언제 공기를 만나 사라질지 몰라 지금도 자주 공개되지 않는 천마도가 그렇게 완벽히 수습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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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금관과 금제 허리띠에 천마도 장니까지 함께 매장했던 무덤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학계 전문가들은 출토된 황금 유물과 무덤 크기로 볼 때 왕릉급 무덤일 것으로 추정했는데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마총 설명에서 ‘무덤에 묻힌 사람은 황금으로 치장한 고대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보인다.’ 정도로만 쓰고 있죠.

왕이나 왕에 준하기는 하지만 그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한 겁니다. 무덤 주인을 특정하려면 능묘 비나 지석과 같은 증거가 발견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증거로 삼을 만한 약간의 문헌 기록이라도 남아있어야 가능한데, 천마총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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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특별한 자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천마총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얀 천마의 무덤으로 남게 될 것이고, 그래서 무령왕릉이나 선덕여왕릉처럼 주인의 이름이 아니라 천마총으로 불리게 된 겁니다. 이후 경주 김 씨 985명이 무덤 주인은 ‘경주 김 씨 아무개의 무덤’으로 바꿔야 한다는 취지의 청원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대로 천마총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천마총은 발굴된 유물의 가치 외에도 우리나라 고고학에 큰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천마총 발굴 이후 ‘실측’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이전까지 발굴 시 유물을 꺼내는 게 전부였지만 이후 구조나 축조 기법까지 조사하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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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경주의 신라 고고학이 체계화되는 기점이 되었으며 학문적으로도 진일보를 이뤄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천마총 발굴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경주의 모습도 많이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 경주에 가신다면 다시 한번 천마총을 들렀다 오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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