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의 친아버지, 대원군”
대원군은 선왕의 직계 자손이 아니면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친아버지에게 주는 작위로, 조선시대 왕위 계승에서 왕이 형제나 자손 등 후사 없이 승하하게 되면 가장 가까운 종친 중의 한 사람을 왕위 계승을 위해 전대 왕의 후사로 입적하기에, 이때 생부를 구분 짓기 위한 호칭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최초의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었습니다. 이후 인조의 아버지와 철종의 아버지를 전례에 의하여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으로 추봉합니다. 조선시대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총 4명으로, 이 중 3명은 자식이 왕위에 오를 때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서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보고 대원군에 오른 인물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유일합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대원군으로는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이 있었습니다.
덕흥대원군은 조선 최초의 대원군으로 이름은 초, 자는 경앙이며, 아명은 환수입니다. 그는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나 1538년에 덕흥군에 봉해집니다. 이후 그는 1542년,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과 혼인하여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 등 3남을 두고, 30세가 되던 1559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그의 아들 하성군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는데, 그가 바로 선조입니다. 선조는 북송 영종이 친아버지 복왕을 추존했던 고사에 따라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1569년에 덕흥대원군, 하동부대부인으로 추봉합니다. 이로써 덕흥대원군은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 됩니다.
정원대원군은 조선 중기에 대원군에서 왕으로 추존된 인물로, 이름은 이부입니다. 그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능양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아들로 둡니다. 그는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광해군 집권 당시 아들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죽는 것을 보고 술병과 화병이 나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인조반정을 계기로 그의 첫째 아들인 능양군이 새로운 왕이 되자 대원군에 추봉됩니다. 인조는 선조-정원대원군-인조로 이어지는 왕통을 세우기 위해 1627년에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하였고, 명나라에 요청해 공량이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전계대원군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며 철종의 친아버지로, 사도세자의 서장남인 은언군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작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사후, 출궁했던 아버지 은언군은 상인들에게 많은 빚을 졌고, 이를 조부인 영조가 알게 되면서 사치를 부린다는 명목으로 1771년에 직산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가 1774년에 풀려나게 됩니다.
하지만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 이담이 홍국영에 의해 1779년 정조의 양자로 내정되면서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고, 결국 1786년에 독약을 마시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유배 생활을 계속하던 은언군은 정조의 남은 유일한 형제라는 이유로 보호를 받게 되지만, 정조 사후,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인 상계군 이담의 부인 신씨가 1801년에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은언군도 버티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도주하다 사사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전계대원군은 부모와 형, 형수의 죄로 연좌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으며, 불우한 일생을 보내다가 1830년이 되어서야 방면되었고, 1841년에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사후에도 고난은 계속되어 장남 이원경이 반란에 휩쓸렸고, 이로 인해 남은 일가족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셋째 아들 이원범이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르며 비로소 전계군이라는 작호가 내려집니다. 이후 축호와 사식을 송나라 복황과 수왕 그리고 조선의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의 전례에 따라 다시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에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로 안국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기에 혈연적으로는 왕실과 멀지만,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인 은신군 이진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종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하응은 헌종과는 7촌, 철종과는 6촌 사이였습니다.
이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의 큰 어른으로 다음 대의 왕위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이하응의 차남인 명복을 선택하였고, 곧바로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적되는 절차를 거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종입니다.
이때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어 섭정으로서 정책 결정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쇄국정책의 강경책으로 대응했습니다.
이렇게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대원군은 10년 가까이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으나, 직접 간택한 며느리 명성황후에 의해 권력에서 축출당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을 하게 되지만, 다시 청나라에 끌려가며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1898년, 흥선대원군은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에 대원왕으로 추존되고 헌의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풍운아이자,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굉장히 엇갈리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게 될 경우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중요한 역사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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