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전 우리 조상이 만든 거울, 최첨단 기술로도 복원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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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918년 태봉국의 수도 철원에서 당나라 상인 왕창근이라는 자가 한 노인에게 쌀을 주고 헌 거울을 샀는데, 그 거울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왕창근은 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해 궁예에게 바쳤죠. 그 뜻을 해석하지 못한 궁예는 이를 해석하고자 문인 송함홍에게 의뢰했는데 송함홍이 보니 당시 궁예 아래에 있던 왕건이 임금이 된다는 내용이었죠.

허나 송함홍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이 내용을 거짓으로 보고했지만, 왕건은 고려의 왕이 되었습니다. 거울에 관련된 설화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어느 날 거울이 떨어져 깨지는 꿈을 꾼 후 무학대사가 이는 필시 왕이 될 꿈이라고 해몽하자 자신감을 얻어 조선을 건국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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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시대의 거울이란 어느 집에나 있는 것이고 단순히 치장을 위해 사용되지만, 옛날의 거울은 오히려 신성시하던 물건이었습니다. 전 세계 각국에서 종교인들이 칼과 방울, 거울을 이용해 점을 쳤으니 분명 거울에는 신비한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한국 땅에서 2,000년 전 거울 유물이 출토됐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이 참호를 파다 발견했는데 얼마나 훌륭했던지 국보로 지정됐는데 오늘은 이 거울을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군인은 야전에서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보통 땅을 파서 참호를 만듭니다. 그래서 직접 삽을 들고 참호를 구축하는 것도 훈련의 일환인데 아무래도 땅을 파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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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충남 논산훈련소 근방에서는 훈련병들의 참호구축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훈련병이 땅을 파다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잔뜩 꺼내 올렸는데 흙이 잔뜩 묻은 청록색 빛을 띠는 고색창연한 물건들이었죠.

이날 발견된 물건은 동심원과 삼각형 문양이 잔뜩 새겨진 청동거울 1점, 방울이 8개 달린 팔주령 2점, 포탄 모양의 간두령 2점, 엑스가 교차된 조합식 1점과 아령 모양의 쌍두령 2점 등 양이 꽤 됐습니다. 그런데 이 물건들은 한 장소에서 발견됐지만 이산가족이 됐는데요. 결과적으로 청동거울은 현재 국보 제141호 ‘정문경’으로 팔주령 등은 국보 제146호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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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보들을 발견한 훈련병은 이를 중간상인에게 팔아넘겼는데 중간상인이 이 중 청동거울을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팔았고, 나머지 청동방울 일괄은 수집가 김 모 씨를 거쳐 호암미술관으로 넘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동거울은 막연하게 강원도에서 출토됐다는 이야기가 생겨났고 10여 년 전까지도 강원도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 청동기를 판 중간 상인인 고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이들은 논산훈련소 훈련병들이 수습한 청동기 유물이라고 증언하면서 실체가 드러나게 됐죠. 그런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국보 제146호 청동방울 일괄도 대단한 유물이지만 숭실대 박물관이 소장한 제141호 정문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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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현대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다고 제목에 넣은 것이 아닙니다. 이 거울을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울은 평면의 유리 한 면에 수은을 발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인류가 최초로 거울처럼 사용한 것은 아마 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물은 늘 흐르기 때문에 명확한 모습을 비출 수 없는 것은 물론 소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6천년경 돌로 만든 거울, 즉 석경이 등장합니다.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거울은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동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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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또는 구리합금으로 만들어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까지도 사용했는데 이 동경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수준의 유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잠시 언급한 정문경은 다릅니다.

사실 정문경은 현대식 명칭이고 옛 명칭은 ‘다뉴세문경’입니다. 청동기 후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유행한 청동거울로 고리가 많은 가는 무늬 거울이라는 의미인데 거울 뒷면에 달린 고리 때문에 붙은 명칭입니다. 그렇다면 논산에서 발견된 정문경은 무엇이 다를까요? 정문경을 자세히 바라보면 경이로운 느낌을 받지만, 의문투성이 유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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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지름은 지금껏 발견된 것 중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실제 지름은 고작 21.2cm에 불과합니다. 아마 훈련병이 물건을 찾으면서 입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를 제외하면 지름 21cm 안에 1만 3천여 개의 가느다란 선이 그려져 있죠. 이 말은 고작 1mm 안에 머리카락 굵기의 선을 3개씩, 즉 0.3mm의 극초정밀 기술을 넣었을 뿐 아니라 원과 직선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까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한반도에 최첨단 나노기술이 존재했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한때는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위조 논란까지 일었었죠. 사실 이 정문경이 국보로 지정된 후 1만 3천여 개의 선과 100여 개의 비밀을 풀기 위한 최첨단 기계가 전부 동원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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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분석기를 이용해 21개의 원에 대한 반지름을 구한 결과 반지름의 분포가 동일한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이를 토대로 유추할 때 이 원들은 여러 개의 바늘이 달린 컴퍼스로 그렸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한 번에 여러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도록 다치구를 직접 제작해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현대식 컴퍼스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분포의 반지름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즉, 다치구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 도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cm 안에 20개의 바늘을 박아야 하는데 이는 현대식 초정밀 기계로도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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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300년 전 초정밀 기계의 도움도 없이 어떻게 이를 만들어 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죠. 그래서 이 다뉴세문경을 동일하게 제작해 보기 위해 복원에 도전했던 장인들도 사람이 만든 물건이 아니라면서 존경심을 드러냈었죠. 그런데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의문점이 있습니다.

거울 모양의 청동이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이 거울 모양을 만들어 냈냐는 점입니다. 뗀석기나 간석기처럼 원래 존재하는 자연 사물을 이용해 만든 것이 아니므로 정문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주물 기술이 필요한데 과연 2,400년 전 이러한 기술이 존재했느냐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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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을 아무리 정밀하게 그렸다고 하더라도 이 도안을 바탕으로 주물을 떠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주물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주물 기술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머리카락보다 얇은 선을 1만 3천 개나 정밀하게 반영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풀려면 정문경에 사용된 주석과 구리의 비율과 거푸집의 재질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풀어냈습니다. 지난 2007년 숭실대학교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정문경의 보존 처리와 함께 제작 방법을 규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문경에는 구리와 주석을 황금비율로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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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가장 오래된 기술 관련 백과사전 중 ‘주례고공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나라 사람이 지은 공예 기술서라는 의미인데, 이 책에는 도성의 건설, 궁궐 조영, 수레, 악기, 병기, 관개, 농기구 등의 제작에 관한 기록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지식을 담고 있죠. 한국의 경복궁도 이 주례 고공기를 참고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죠.

그런데 이 책에는 ‘구리 67대 주석 33이 황금비’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문경의 성분을 분석해 보니 구리 61.68%, 주석 32.25%, 납 5.46%로 나타났습니다. 구리와 주석의 비율만 보자면 65.7대 34.3인데 이는 고대 청동 거울의 황금비와 고작 1% 정도의 오차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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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분분석을 담당했던 유혜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은 정문경은 고대 청동거울 제작을 위한 황금비율을 그대로 반영했다며 청동기 기술이 최고 정점에 달할 때 제작된 유일무이한 작품이라고 극찬하기도 했죠. 그러니까 2,4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자연스럽게 황금비를 습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아마 수차례 실패 끝에 이 비율을 찾아냈을 겁니다.

주석 함유량이 높으면 은백색이 되어 거울의 반사율이 높아지지만, 일정 비율을 초과하는 순간 강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작은 충격으로도 쉽게 깨지게 됩니다. 보존과학팀은 우리 조상들이 구리대 주석 비율을 65.7:34.3으로 다른 청동거울보다 주석 함유량이 약간 높은 편이고 제작 당시 거울면은 은백색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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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물을 부어 틀을 만드는 거푸집은 어땠을까요? 정문경을 만든 거푸집의 재질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많았습니다. 아직 그 시대 거푸집이 출토된 적이 없어 유추와 추적만으로 그 재질을 알아내야 했으니까요. 몇 차례 복원 시도를 통해 거푸집의 재질을 테스트했는데 밀랍으로 했을 때는 최종 주물에서 무늬가 망가지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존과학팀은 거울면과 문양면에 걸친 당시 결함 부위를 분석했을 때 주물사, 즉 거푸집 모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거푸집의 재질이 모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거울의 단면에 모래가 밀려 올라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거푸집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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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만약 동일한 소재의 거푸집 재료를 찾아낸다면 정문경을 동일하게 복원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시도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릴 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름 18.2cm 안에 삼각형과 사각형, 동심원을 활용한 정교한 선이 0.3mm 간격으로 1만 3천 개를 새겨 넣어야 하니까요.

실제로 카이스트에서도 도전에 나섰지만, 슈퍼컴퓨터도 이 동심원을 그리지 못했고, 일본 역시 오랜 세월 재현 실패만 거듭해 왔죠. 그리고 여기 그간 고고학계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이를 완벽히 복원해 낸 장인이 있습니다. 이완규 주성장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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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7호이기도 한 그는 2006년 우리나라 최초로 정문경을 재현했는데 덕분에 2007년 제32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간 관심이 적었던 석재주조법을 썼습니다. 활석이라는 돌에 문양을 새긴 후 청동 쇳물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인데 이 주성장은 이 방법으로 정문경을 복원했습니다.

활석은 무른 돌을 말하는데 워낙에 입자가 고와서 땀띠 날 때 바르는 베이비파우더에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활석에 정문경과 동일한 문양을 새긴 후 청동 쇳물을 부어 복원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가 이를 복원해 냈을 때 우리나라 고고학계는 그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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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받지 않은 현대적 기법으로 재현한다는 것이 이유였죠. 사실 그는 활석 주조법에 그을음을 입혀 완성하는 방식으로 이를 성공시켰는데 이 그을음 기법은 1982년 청동검 재현 당시에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당시 숭실대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검 옆에 거푸집이 있었는데 거푸집을 살펴보다 보니 표면이 미끌미끌하고 조직이 치밀한 활석이었습니다.

그리고 웬일인지 거푸집에는 까맣게 그을음이 묻어 있었죠. 영문을 몰랐으나 거푸집에 그을음을 입힌 것처럼 보였고, 즉각 활석을 구해 청동 거푸집을 만든 후 그을음을 입혀 쇳물을 부었더니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청동검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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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그을음 기법을 활용해 정문경을 완벽히 복원해 냈죠. 그는 학계는 추정만으로 실증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며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만 제대로 된 청동기 유물을 재현해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직접 청동 쇳물을 붓는 실증작업도 없이 오로지 추정만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패만 거듭될 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인데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재현한 다뉴세문경 비파형 동검, 신라 범종 등의 재현기를 담아 ‘한국의 문화유산 청동기 비밀을 풀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주변 학자들이 관련 책을 저술하면 후대에 남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아 어렵게 쓴 책인데 꼭 기회가 되신다면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갈고닦은 장인의 노하우를 한번 감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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