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방송 진행자는?”이라는 기습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인물의 이름이 나오게 될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유재석 씨를 거론할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유재석 씨보다 더 많은 답변은 아마 이분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자든 남자든 10대든 70대든 인생을 살아가며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들어 봤을 방송인, 바로 ‘송해’ 선생님입니다. 1988년부터 34년 동안 매주 일요일 점심, 국민의 일상을 찾아오시는 송해 선생님이 최근 기네스북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1951년 11월 10일, ‘휴 비버’라는 인물은 친구들과의 새 사냥 모임에 참가해 열심히 사냥에 나섰으나, 너무 빨리 날아다니는 통에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잠시 사냥을 쉬는 틈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유럽에서 가장 빠른 새가 어떤 새일까?’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으나, 현존하는 그 어떤 책에서도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요. 결국 그날의 논쟁은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한 상태로 마무리됐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던 1954년, 당시 아일랜드의 유명 맥주회사 기네스의 중역이었던 휴 비버 경은 회사의 프로모션을 준비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만약 세상의 모든 기록을 모은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다다랐고, 당시 런던의 신문 업계에 각종 기록과 수치를 제공하는 일을 맡았던 ‘맥 워터’ 쌍둥이 형제에게 작업을 의뢰합니다. 맥 워터 형제는 기록광이자 스포츠 기자로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비버 경은 그들을 초대해 진귀한 기록을 모은 책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합니다. 두 형제는 기네스 양조 회사의 이름을 따 ‘기네스북 오브 레코즈’라고 책 이름을 정했고 이후 ‘기네스북’으로 불리게 됐는데요. 1955년 8월 27일, 드디어 198쪽짜리 양장본에 사진과 그림이 곁들여진 세계 최고의 기록을 모은 ‘기네스북 초판본’이 출간됩니다.
이 책은 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미국판, 프랑스판, 독일판, 일본판, 스웨덴판 등등 전 세계로 확장되어 현재까지 무려 1억 5,000만 부라는 판매고를 기록 중입니다. 인류 역사상 1억 권 이상 판매된 책은 성경과 코란, 해리 포터 시리즈뿐이기 때문에 이 기네스북이 얼마나 대단한 책인지 감이 오시나요? 사실 한국인 또는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은 많지만, 오늘 영상의 주인공이신 송해 선생님은 기네스북보다 더 많은 역사를 온몸에 간직하신 살아 있는 역사책입니다. 지난 11월에는 송해의, 송해에 의한, 송해를 위한 영화 ‘송해 1927’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죠.
한 국가를 이끌었던 지도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도 많지 않은데 방송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의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요. 최근 KBS는 1988년부터 34년간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해 온 그를 “최고령 TV 음악 탤런트 쇼 진행자”라는 타이틀로 기네스북 등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등재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데, 이미 기초조사를 마치고 후속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기네스북에 등재된다면 한국 최고령 연예인을 넘어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령 MC’로 공식 인증됩니다. 송해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요?
올해 나이 만 95세의 송해 선생님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군입니다. 1927년 일제 강점기 시절, 현재 북한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도 ‘송해’가 아닌 ‘송복희’죠. 그러다 그가 23살이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1·4 후퇴 당시, 홀로 미군 함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 온 이산가족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름이 송복희에서 송해로 바뀐 것은 스스로 바다를 건너온 실향민이 되었기 때문에 평생 그곳에 두고 온 가족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에 ‘바다 해’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잠시 송해 선생님은 ‘살아 있는 역사책’이라고 말씀드렸던 이유는 일제강점기, 해방, 전쟁 분단까지 누구는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삶의 굴곡도 많죠. 한국 전쟁 당시, 월남해 한국군 통신병으로 복무했는데 복무 3년 차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휴전 협정이 체결됐는데 당시 전군에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를 기점으로 모든 전선의 전투를 중단한다는 내용의 모스 부호를 보낸 것도 송해 선생님입니다. 1955년 제대 후,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그는 당시 서울에 극단이 왔다는 소식에 무작정 찾아가서는 “이북에서 해주 음악 전문학교를 나와 노래도 잘하고 악기도 다룰 줄 알고 군대에서는 콩쿠르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았다”며 셀프 PR로 연예인이 됐습니다.
이후 유랑 극단에서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등과 함께 쇼 무대에 서며 코미디의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이후 라디오 진행자로 이름을 알리다 1970년대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여자 코미디언 ‘이순주’와 콤비로 활약하며 큰 인기를 끌었죠. 쾌활하고 순수하며 맑고 수탈하신 선생님이지만, 그의 삶은 절대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 쾌활한 모습은 진정 삶의 모든 고난을 이겨낸 후에야 보여줄 수 있는 해탈의 경지입니다. 그는 극단 시절 여러 번 삶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아 삶을 포기하려고 남산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는데 가까스로 소나무 가지에 얹혀 목숨을 부지했죠.
온갖 삶의 굴곡을 겪은 그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1986년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동양 방송에서는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1974년부터 송해 선생님이 진행을 맡았습니다. 매일 라디오 시작할 때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로수를 누비며’ 송해입니다, 우리 오늘도 안전 운전합시다”라는 멘트로 시작했던 프로그램인데 1986년, 그는 갑자기 하차를 선언하죠. 그의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 ‘송찬진’ 씨는 가수의 꿈을 가진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22살이던 시절, 한남대교에서 일어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요절했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말인지 알게 됐다”면서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들이 “아버지 살려주세요”라고 남긴 마지막 말이 그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서울예전에 다니며 가수를 준비하던 그의 아들이지만 그는 아들의 꿈을 응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는 단절됐고, 이것이 그의 생에서 가장 큰 상처가 됐습니다. 하루 3번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도 하차하게 됐는데 매번 오프닝에서 “자, 우리 오늘도 안전 운전 합시다”라는 말이 도저히 입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삶의 희망이 모두 무너지고 의욕마저 떨어졌을 때 그에게 PD 한 분이 찾아옵니다.
바로 배우 안성기 씨의 형, 안인기 씨였는데 그는 송해 선생님을 찾아와 “라디오에서 매주 일요일에 했던 것처럼 방송에서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처음 그는 고사했습니다. 그러나 끈질긴 안 PD의 설득에 1988년 5월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전국 노래자랑입니다. 61세의 나이로 말이죠.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을 치유해 준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 KBS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 방영됐던 ‘KBS배 쟁탈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한국에 최초로 등장한 TV 가요 경연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대단했습니다만 70년대 말 사라지게 됩니다.
77년, MBC에서 시작한 대학 가요제에 밀렸기 때문이죠. 그렇게 사라졌다가 1988년 송해 선생님과 함께 ‘전국 노래자랑’으로 재등장했고, 이후 34년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송해 선생님이 아니면 진행할 수 없는 프로그램입니다. 한국의 모든 도서산간을 다니며 일반인 참가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해야 하는데 한국의 방송인 중 일반인들과 그렇게 찰떡같은 케미를 보일 수 있는 인물이 감히 없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 전국 노래자랑 레전드라고 검색해 보시면 34년이라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모든 하이라이트 영상을 볼 수 있는데 전혀 예측 불가능한 모든 참가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무려 34년이나 이어온 관록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전국 노래자랑’은 KBS의 상징이 되었고, KBS가 앞장서서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해서, 현역에 있다고 해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고약한 성격을 가졌거나 두 얼굴을 가졌다면 절대 현재의 자리까지 오를 수 없죠. 그는 자신이 코미디언 출신인 것을 잊지 않고 1년에 한두 번씩 100명이 넘는 코미디언 후배들을 고급 음식점으로 불러 밥 사 주고, 용돈 주는 너그러운 선배이면서, 출연자들의 사연이 슬프면 같이 울고, 즐거우면 같이 웃고, 아이 출연자가 등장하면 PD의 지갑에서 용돈도 지어 보내는 편한 동네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꾸밈없이 소탈한 송해 선생님은 반드시 읽어볼 만한 역사책이 되었고 지친 국민들의 삶에 웃음과 희망을 안긴, 90이 넘은 나이까지 정상을 지킨 레전드가 되었습니다. 부디 자신의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오신 그가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전 세계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방송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이 오래오래 ‘전국 노래자랑’에 남아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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