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시나요? 튤립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역사책에서 배운 동인도회사 또는 유럽의 무역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그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마 2002년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 감독을 떠올리실 수도, 한국전쟁에 5,322명을 참전했던 참전국으로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유럽대륙과 한국이라는 거리 때문에 그렇게 가깝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의외로 우리와 네덜란드의 인연은 아주 오래됐는데요. 심지어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해 세계적인 책을 쓴 네덜란드인도 있었죠. 바로 ‘하멜 표류기’로 잘 알려진 헨드릭 하멜인데요.
조선시대에 조선을 알고 있는 외국인들의 상당수는 이 하멜 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엄청난 힘을 가졌었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동인도회사였습니다. 전 유럽 선박 3/4이 동인도 회사 소유였으니 대단한 수치죠.
이들은 이 배를 끊임없이 동양으로 보냈는데 동인도회사가 존재한 1602년부터 1795년까지 동양으로 갔던 네덜란드인은 약 100만 명에 달합니다. 네덜란드 전체 인구가 200만 명이니 인구의 절반이 동양으로 갔던 겁니다. 그리고 조국으로 돌아온 사람이 35만 명쯤이니 약 65만 명은 동양에서 사망하거나 그곳에 뿌리를 내렸을 겁니다.
1653년 7월 하멜 등 네덜란드인 64명은 상선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바타비아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를 향했습니다.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교역하던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에 선박은 항해 중 태풍을 만나 난파되고 맙니다. 이들이 바다를 표류하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조선의 제주도.
난파된 네덜란드인들은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은 끝에 서울로 압송돼 훈련도감에 편입된 후 강진과 여수 등의 병영에서 잡역에 종사하다 1666년 일행 7명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해 일본을 거쳐 본국으로 귀국했죠. 하멜은 억류된 14년간의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하멜 표류기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기록은 출판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조선에 억류된 14년간 동인도회사로부터 받지 못한 밀린 임금을 청구할 목적으로 썼는데 이것이 출판사를 통해 발표되면서 책으로 나온 겁니다. 그의 뜻과는 관계없이 조선에서 억류됐던 14년간의 기록은 조선이라는 국가를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입니다. 즉, 조선을 서양에 데뷔시킨 홍보대사였던 것이죠.
지금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조선에 온 외국인은 본국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국법이었고, 하멜은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보내달라며 울며불며 사정했다고 하죠. 그런데 어떻게 네덜란드인의 호소가 조선에서 통했을까요? 하멜이 한국에서 한국어라도 습득했던 걸까요? 아니면 조선에 네덜란드어에 정통한 인물이 있었던 걸까요?
체포 즉시 하멜은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보내달라며 울면서 요청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의 불빛이 되어 준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외모는 하멜과 비슷했지만, 조선인의 옷을 입고 조선인처럼 행동하던 남자였습니다.
하멜 표류기에는 그때 상황을 상세하게 남겨두었는데 ‘1653년 10월 29일 제주목사 옆에 붉은 수염 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목사가 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우리는 홀란드 사람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목사는 이 사람은 조선 사람이니 너희가 잘못 봤다며 껄껄 웃었다’라고 말이죠. 어눌한 네덜란드 말로 대화를 건넨 이 남자, 바로 조선 최초의 네덜란드 귀화인 ‘박연’이었습니다.
한국인과 생활방식이 거의 다를 바 없는 외국인들을 두고 요즘 말로 ‘한글 패치가 끝났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 보니 방송가에서는 샘 해밍턴이나 사유리, 테일러 등은 외국인 게스트가 아니라 거의 한국인 게스트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섭외한다고 하죠.
그런데 지금이야 흔한 일이 됐지만 국가 간 교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던 약 400년 전 한반도에서는 아마도 벽안의 외국인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동물원 원숭이 보듯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 보는 것이 흔하지 않던 400년 전 조선 한양 땅에서는 관복을 입고 다니며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쓰던 외국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 박연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통한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159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부 작은 도시 ‘더레이프’에서 태어난 ‘얀 아너스 벨테브레이’는 당시 동인도회사 소속인 ‘홀란디아호’의 선원이었습니다.
그는 일행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에 밀려 1627년 제주도 해안에 표도하게 되는데요. 제주는 사면이 바다인데다 지정학적으로 동북아 해상 중심에 위치한 섬이었기 때문에 제주도 인근을 해상하는 외국 선박들은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거나 파도가 덮쳐 제주에 표도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어쨌든 벨테브레이를 태운 선박은 표류하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 제주에 잠시 상륙했지만, 곧 관헌에 붙잡혀 즉시 서울로 압송됐죠. 1627년 인조 5년 당시 조선은 외교 또는 무역 관계에 있는 국가 출신이 표도하면 그 나라로 직접 돌려보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명나라에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요.
벨테브레이 일당의 네덜란드는 조선과 통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로 보내려 했지만, 당시 명나라가 후금과 대치 중이라는 이유로 거부해 버립니다. 이에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보내려 했더니 일본은 이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죠. 당시 도쿠가와막부는 가톨릭의 유입을 막기 위해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로도, 일본으로도, 네덜란드로도 보내지지 못한 박연 등 3명의 네덜란드인은 조선에 머물게 됐는데 이들은 그로부터 10년 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자 전투에 참여했고 그중 2명이 사망합니다. 그 후 박연은 조선에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고는 조선인과 결혼해 1남 1녀를 슬하에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무과에 응시해 장원으로 급제해 조정의 신임을 얻었죠. 그런데 박연은 통교 관계도 없는 외국인이었음에도 현재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훈련도감에 근무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인데 훈련도감에서 외국인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항복해 온 일본인과 청나라 포로를 감시하는 일, 그리고 청나라를 피해 조선으로 귀화한 명나라 사람을 비롯해,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을 맡았죠. 그런데 그가 조선에 선물한 무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홍이포인데요. 보통 조선의 대표 무기라면 창, 검, 활 정도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조선은 1,600년대에 무려 홍이포라는 대포를 가졌습니다.
홍이포는 원래 네덜란드에서 유래한 대포입니다. 중국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되었고, 명나라는 이를 수입해 자체 제조에도 성공했죠. 이 대포는 유효사거리 2.8km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월등한 위력을 가진 화포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공격할 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선은 그 치욕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화포를 보유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음을 말이죠. 그런데 조선 땅에 사는 외국인 중 네덜란드 출신이 있으니, 눈이 번쩍 뜨였을 겁니다. 더구나 북벌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서양의 군사기술을 보유한 박연을 훈련도감에 배속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박연이 하멜 일행을 만난 것도 이즈음입니다. 조선에 정착한 지 26년 만의 일이었죠. 1653년 하멜 일행을 태웠다가 난파한 스페르베르호는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효종실록’은 해당 배 안에 묵향 94포, 용뇌 4항, 녹비 2만 7,000이 실려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 화폐로 30만 냥에 달하는 엄청난 가치였죠.
그러나 거센 풍랑을 만나 배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선원 64명 가운데 단 36명만 살아남아 제주도에 표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록에서는 먼저 와 있던 박연과 이들의 만남을 기록해 두고 있는데 ‘이전에 조선에 온 남만인 가운데 박연이라는 자가 있다. 박연이 서양인들을 보고는 과연 남만인이 맞다고 확인시켰다. 서양인들은 대개 화포를 잘 다뤘기 때문에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라고 실었습니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박연은 하멜 일행이 표도하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제주도로 내려가 그들을 만났습니다. 윤행임의 ‘석재고’를 보면 박연은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 사람인 것을 알고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고 전했으며, 조선 조정은 그때까지 남만인으로 알고 있던 박연이 아란타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한국 패치가 완료된 박연은 모국어를 거의 기억하지 못해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죠. 당시 하멜이 기록한 표류기에도 박연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박연 역시 처음에는 조선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멜이 ”훈련도감에 근무하면서도 조정에 요청해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조선 왕이 ‘날개가 있어 날아가지 못할 바에는 기대하지 말라. 이 나라에 표착한 외국인은 결코 본국으로 보내지 않는 게 조선의 국법이다’라며 거절했다”라고 적혀있죠. 다만 네덜란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융숭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결국 조선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연과 하멜은 결국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박연, 즉 벨테브레이는 귀화해 조선인 박연으로 살았지만, 하멜 일행은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동료 7명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조선을 탈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됐죠. 여기까지 네덜란드인 박연의 이야기를 접한 분들은 이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우리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박연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라고 말이죠.
물론 이것이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가 외국에 강제로 갇혀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박연이 조국을 그리워한 것이나, 하멜이 목숨 걸고 탈출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우리에게나 살기 좋은 조국이지, 외국인에게도 살기 좋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다만 박연은 그 고통을 감내하고 조선에 귀화한 결과 현재는 네덜란드와 한국의 인연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서울 광진구 어린이 대공원 분수대 옆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박연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더레이프에서 제작해 1991년 한국에 기증한 것이죠.
하멜 역시 전남 강진군과 전남 여수시에 두 개의 동상이 있으며 둘 다 그의 고향 네덜란드 호르큄에서 제작해 기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동상들이 더레이프와 호르큄에도 세워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확히 얼마인지 파악되지는 않지만, 박연의 후손들은 우리나라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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