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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땅 대마도에서 발견된 국보급 보물 안에서 700년 전 비밀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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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693세가 된 이 불상은 참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왜구의 빈번한 노략질과 권력을 쥔 이들의 착취가 너무 심각해 백성들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고려 말, 수많은 백성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농사짓던 땅을 버리고 유랑민이 되기로 했습니다.

특히 한반도 해안지역에 살던 백성들의 피해가 심각했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부처님의 은덕으로 밝은 세상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요. 1330년 현재의 충남 서산에 해당하는 서주의 오래된 사찰, 부석사에서는 이런 희망이 모여 불상이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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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금동관음보살상이라 이름 붙여진 이 불상이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입니다. 보통 불상이나 탑 등을 만들 때는 유물을 함께 넣는데 그러한 유물을 ‘복장유물’이라고 부릅니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불교가 성행했기 때문에 천 년이 넘는 불상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이런 불상들은 보수 또는 개금을 필요로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복장유물을 통해 언제 이 불상이 조성됐는지, 왜 조성됐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1951년 일본의 한 승려가 발견한 복장유물 덕분에 정체가 밝혀진 이 불상이 지금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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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국 거라고, 일본은 일본 거라고 우기는 이 불상은 어쩌다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 때는 바야흐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현재는 일본 영토로 편입된 대마도의 사찰 관음사의 주지는 우연히 불상을 들어 올렸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관음사에서 신처럼 모시던 불상을 우연히 들어 올렸는데 그 아래에서 그 유명한 복장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보통 불상을 제작할 때는, 사리나 불경, 불화 등을 넣으면서 불상을 만들게 된 사연을 기록한 복장 조성문을 복장유물로 넣는데 그 불상 조성문이 발견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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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을 판독해 보니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는데요. 우선 이 불상은 고려시대 충선왕에 해당하는 1330년 고려의 서주 부석사에서 제작됐는데 그 조성 목적이 흥미롭습니다.

조성문에 따르면 ‘중생을 세상의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인연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발원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영원히 충만한 공양으로 현세의 복을 빌고, 내세에는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합니다.’라고 썼는데 서로 인연이 있는 이들이 힘을 모아 중생을 구할 목적으로 이 불상이 조성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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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자의 명단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계진, 심혜, 혜청 등의 승려뿐 아니라 김성, 국응달, 소화이, 담회, 국한 그 시대 장삼이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요. 그런데 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330년 충남 서산의 부석사에서 제작된 불상은 어쩌다 대마도까지 건너간 것일까요?

분명 조성문에는 충남 서주 부석사에서 제작됐다고 쓰여 있어 이것은 분명한 사실일 텐데 도대체 왜, 언제, 어떤 이유로 대마도까지 건너간 것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약간의 추론은 가능합니다. 우선 이 불상이 어떻게 한국과 일본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됐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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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12년 10월의 여섯 번째 날, 한국인 도굴꾼 일당이 대마도에 도착합니다. 이미 두 달 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치밀하게 현장을 답사한 그들은 밤이 될 때까지 숙소에 머물며 도굴 목표물을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새벽, 그들은 타쿠즈다마 신사에서 나가사키현 지정 문화재인 ‘대장경’ 1점, 가이진 신사에서 일본의 중요문화재인 ‘동조여래입상’, 그리고 간논지에서 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인 ‘금동관음보살좌상’을 훔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보통 도굴꾼이라면 최대한 많은 보물을 훔치는 것이 이득이지만 각 장소에서 1점씩만 도굴한 것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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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적들을 찾아보니 이 3개의 보물은 전부 한국에서 약탈 또는 훔쳐 간 문화재였던 것이죠. 그래서 한국으로 가져와 팔면 어마어마한 돈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이에 단 1시간 30분 만에 3개의 보물을 모두 훔친 이들은 즉각 후쿠오카로 이동해 히카타항을 거쳐 부산으로 입국했는데 X-레이 탐지기가 설치되지 않은 항구를 선택한 겁니다.

그리고 무사히 부산으로 입국한 그들은 다행히도 장물 전문가들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중요 문화재를 도굴했을 때는 사태가 가라앉기까지 보통 1년에서 10년가량을 묵혀두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들은 한국에 오자마자 즉각 장물 시장에 이 문화재들을 내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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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20억이니 15억이니 떠들며 판매를 시도했는데 도난 문화재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경찰의 귀에 들어갔죠. 즉각 수사에 나선 경찰은 두 달 만인 12월 이들을 검거했고 불상들을 전부 회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훔친 것은 분명 대장경과 동조여래입상, 금동관음보살좌상 총 3점인데 회수된 것은 2점뿐입니다. 왜냐하면 도굴꾼들은 대장경의 행방을 추궁하자 가치가 없어 보여 오는 길에 버렸다고 진술했는데 이 말은 벌써 팔아넘기고 꺼억했다는 뜻입니다. 회수가 불가하다는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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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점의 불상은 모두 회수해 정부의 관리하에 들어갔는데 일본 정부도 한국과 일본은 법치국가니까 훔친 문화재는 돌아올 것이라 믿었고 한국 정부도 훔친 문화재이므로 돌려줘야 한다는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발 변수가 등장합니다. 관음사에서 훔친 금동관음보살좌상 때문인데요.

경찰이 회수한 불상은 아무리 살펴봐도 수작 중의 수작이었습니다. 화상으로 그을린 두 뺨과 녹아내린 손가락 끝으로 지난 675년간 도굴까지 견뎌온 고단한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에 단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결가부좌 한 앉은키 50.5cm의 이 불상은 아무리 봐도 대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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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위에서 언급했듯이 1951년 관음사 주지가 복장유물에서 발견한 조성문은 ‘1330년 고려시대 32명의 백성이 서주 부석사에서 제작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 불상 가운데서도 제작연대, 제작자, 제작 동기와 원소장처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매우 희귀한 문화재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부석사가 알게 된 겁니다. 부석사에 따르면, 부석사가 이 불상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30여 년 전인 1980년대로, 1996년에는 당시 주지 도광 스님이 일본 관음사를 방문해 반환을 요청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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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2013년 1월 31일 대전지방법원에 ‘원래 부석사에서 제작된 불상이고, 왜구가 약탈한 것이 분명하다. 불상을 일본에 반환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가처분 소송을 냈고 법원은 2월 26일 부석사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하지만 국가를 대리한 검찰이 항소하면서 항소심이 진행됐는데 2심 법원은 ‘소유권이 일본에 있다.’라고 판결했습니다. 그 이유는 불상이 제작된 서주 부석사와 현재 소유권을 주장하는 부석사를 같은 곳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고 왜구가 약탈해 반출했다고 볼만한 증거도 있지만, 도난 전까지 일본 사찰에 60년간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돼 20년의 취득시효를 넘겼다는 판결이 올해 1월에 내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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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이에 대해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황인데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 불상은 언제 어떻게 한국 땅에서 일본의 대마도로 건너간 것일까요? 우선 정상적인 경로로 이동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대마도 관음사에는 사찰에 대한 기록이 쓰여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1526년에 창건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1330년 부석사에서 제작된 불상이 1330년과 1526년 사이의 부석사에서 관음사로 옮겨진 것인데 이는 부석사가 관음사에 기증한 것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장 유물의 조성문에는 승려와 장사 미사들이 힘을 합쳐 영원한 공양을 위해 이 불상을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만약 관음사에 기증할 목적이었다면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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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넘겨준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는 고려시대까지 흥했던 불교를 가혹하다 싶을 만큼 억압했고 유교를 숭상했습니다.

또한 예의를 중요시하는 유교에서는 승려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고 부모를 떠나 출가하는 불교는 불충과 불효의 아이콘이라 여겼죠. 그래서 이 불교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찰을 금폐시키고 온갖 불교 유물을 파괴하고 불태웠는데요. 하지만 그런데도 불상만은 함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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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폭군이라 불린 연산군조차도 사찰을 철거하면서 나온 불상들을 전부 다른 사찰로 옮기도록 했고, 1500년에는 불상을 파괴한 유생 6명에게 장형 100대씩을 때리는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연산군도 불상을 훼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중대한 범죄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강제로 보낸 것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구가 침입해 강제로 약탈한 것은 아닐까요? 사실 이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지하듯 고려 말 지금의 서해 지역은 왜구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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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후반부터 약탈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1391년부터 41년간 왜구는 무려 294번이나 한반도를 침략했는데 1년에 7번, 그러니까 두 달에 한번꼴로 한반도를 침략해 고려인들을 괴롭힌 것이죠.

이때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공주의 영정을 훔쳐 가는가 하면 태조 왕건 아버지의 초상화를 훔쳐 가기도 했죠. 그렇다면 서산 일대는 어땠을까요? 고려사에 따르면 1352년부터 약 30년 사이 왜군은 다섯 차례에 걸쳐 서산을 침략했습니다. 특히 ‘1380년 8월에는 왜적이 서주를 침략하고 부여, 청양, 유성 등을 거쳐 계룡산까지 이르렀다.’라고 쓰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위 불상이 제조된 것은 133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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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유출 경위를 보여주는 기록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역사적 기록으로 살펴볼 때 1352년 이후 30년 사이에 이 불상을 약탈해 갔다고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론이죠. 분명히 불상은 도굴꾼들이 대마도까지 건너가 훔쳐 온 장물은 맞습니다.

그래서 돌려주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도 같지만 일본의 무지막지한 문화재 약탈에 심기가 불편한 한국인들에게는 약탈이 거의 확실한 명품 불상을 넘겨주는 것이 상당히 거슬리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자칫 이 불상을 너무 고집하다 보면 현재 7만 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 환수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보니 정부가 외교의 묘미를 살려 해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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