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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도 없는 ‘원나라 ○○’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 경주에서 발견된 사연

1231년 첫 침공을 벌인 이래로 근 30년간 8번 고려를 침략했던 몽골 군에 대항해 고려는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귀주성 전투 때 몽골의 한 노병은 “내가 군대에 몸을 들여놓은 이래, 이처럼 심한 공격을 받고도 항복하지 않는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라는 탄식을 남겼죠.

고려의 멸망을 지켜볼 수 없었던 고려의 태자(훗날 원종)는 항복을 결심하고 몽골로 떠나게 되는데요. 당시 몽골의 몽케 칸(헌종)을 찾아 수천 리 길을 떠난 태자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시름에 빠집니다. 얼마 뒤 직접 만나 항복하려던 몽케 칸까지 급사하게 됩니다. 항복의 대상이 갑자기 없어지자 태자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데요.

차기 칸의 자리를 두고 대립 중이던 몽케의 두 동생 ‘쿠빌라이’와 ‘아리부크’ 중 쿠빌라이에게 배팅한 태자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의 항복을 받자마자 “고려는 예전에 당 태종이 친히 정벌했어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세자가 제 발로 걸어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고 실제로 차기 칸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약 10여 년 뒤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원나라’로 바꿨는데요. 이 원나라의 기둥과도 같은 법전이 경상북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발견됐습니다. 약 7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원나라 최후의 법전은 어쩌다 경북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러시아, 카프카스, 크림반도, 볼가강 유역의 동유럽 국가까지 점령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정복한 칭기즈칸의 후예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 항복 후 몽골의 칸이 됩니다. 그 후 약 10여 년 뒤 1271년 원나라를 세우게 되는데요.

원나라는 중국 역사에서도 상당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이 세운 통일 제국이었는데, 의외로 이민족들이 굉장히 선진화된 정치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덕분에 원나라에는 수없이 많은 외국인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서양에 동양의 문물이 소개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양 최초의 기축통화인 ‘교초’를 사용했으며, 국가를 다스리는 기둥인 법전을 만들었죠.

그중 1346년에 간행된 원나라 최후의 법전인 ‘지정조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정’이란 법전이 편찬될 당시 원나라에서 사용되던 연호이고, ‘조격’은 법률 시행 규칙이나 세칙을 말합니다. 현재의 대통령령이나 시행령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정조격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지정조격은 편찬된 후 그대로 한반도로 유입되어 고려 왕조는 물론이고 조선 왕조에서 각종 검령을 마련할 때 적극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1377년 고려사에는 “중앙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옥사의 처결은 모두 지정조격에 의거하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1392년(공양왕 4년) 기록에는 “정몽주가 지정조격과 우리나라 법령을 상호 참작해 편찬한 새로운 법전을 왕에게 바쳤다”라고 적혀 있기도 합니다.

이 법전은 조선 시대에도 영향을 미쳤는데요. 1423년 세종은 지정조격 간행본을 50부 인쇄해 배포했고, 1493년 성종은 신하들에게 이를 하사해 읽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전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후 중국에서 지정조격의 원본이 사라져 찾을 수 없게 되어 그 법전의 이름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700년간 사라진 상태였던 지정조격 원본이 경상북도 경주의 한 시골 마을 라면 박스에서 발견됐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던 현존 유일의 지정조격 원본이 발견된 겁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경주는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세계적으로 희귀한 도시입니다. 기원전 57년 건국된 후 약 992년간 56명의 왕이 다스린 천년의 왕조 신라의 수도인데요. 서라벌 또는 계림이라고 불린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문화재 박물관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함부로 삽을 들고 집 앞마당을 건드릴 수도 없을 만큼 치밀하게 문화재 보호에 힘쓰고 있는데요.

지정조격이 발견된 곳은 경주의 양동마을입니다. 양동마을에는 경주 손 씨의 종갓집이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습니다. 1994년, 경주 손 씨의 종갓집 종손이던 손동만 씨는 오랫동안 쌓여 있던 책자와 문서들을 정리할 요량으로 창고를 정리하던 중 너덜너덜한 대나무 종이로 된 중국 책 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쓸모없는 책이라고 생각하고는 이를 라면 상자에 넣어 창고 한편에 다시 쌓아 두게 되는데요. 그 후 그의 아들 손성훈 씨가 집안의 문헌을 관리하게 됩니다. 그러다 손 씨가 거주하던 고택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 주관으로 고택을 수리하게 됐는데요. 이 과정에서 도난 사고가 발생합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재산을 도난당할까 봐 걱정했던 손 씨는 결국 고택에 있던 모든 책자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하기로 했습니다. 이 책자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연구원들은 중국 책이 무더기로 담긴 라면 박스를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장서각 안승준 책임연구원은 “뭔지는 몰라도 저희가 가져가서 정 쓸모없다면 버리겠다”라며 라면 박스를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지정조격이라는 국보급 유물이 발견된 겁니다.

지정조격은 원나라, 중국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유물인데 그 원형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가 원나라의 흔적을 없애면서 전부 불태운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책은 특히 몽골의 입장에서 국보급 보물입니다. 그들의 조상이 세운 통일제국 원나라의 기둥 역할을 했던 이 법전은 자신들의 중원을 지배했던 영광의 기록이자 기억이니까요.

이에 지난 2010년에는 몽골의 남바린 앵흐바야르(Nambaryn Enkhbayar) 전 대통령이 직접 한국을 찾아 이를 관람하기도 했는데요.

한국이 직접 만든 법전도 아닌데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법전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나라의 법률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몽주는 권문세족과 불교 승려의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여 법이 유명무실해지자 직접 법전을 하나 편찬했는데요. 이것이 ‘신정률’입니다.

당시 고려 법전은 ‘지정조격’이었지만 정몽주가 보기에 고려와 원나라의 현실이 달랐고, 고려의 법률도 그리 체계적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정몽주는 지정조격, 고려율, 대명률 등을 비교 참작해 새로운 법전 ‘신정률’을 편찬해 공양왕에게 바쳤습니다.

고려사 공양왕 4년 2월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공양왕은 “이 율(律)은 모름지기 깊이 연구하고 산정한 연후에 세상에 시행할 만하다. 깊이 살피지 않는다면 전체 판부 중에 삭제해야 할 조항이 있을까 두렵다. 법률이란 한 번 정하면 변경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깊은 감탄을 표했다고 하죠.

고려와 조선에 큰 영향을 미쳤던 지정조격이 어떻게 양동마을에 흘러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명문가 중 하나인 경주 손씨 집안은 고려 말에서 조선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4명의 문과 합격자를 배출했습니다. 그중 손사성(1396~1435)이라는 인물은 세종대왕 시절 승문원 교리를 역임하며 외교 문서를 담당했는데요.

당시 세종대왕은 외교 업무의 일환으로 손사성 등의 승문원 교리를 북경으로 자주 파견했는데, 당시 구매한 지정조격을 조선으로 가져왔고 세종대왕이 이를 50부 인쇄해 배포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경주 손씨 가문의 손사성이 이를 입수해 소유하게 됐고, 600년 동안 양동마을에 잠들었다가 빛을 보게 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우리 조상이 직접 편찬한 법전은 아니지만 우리 역사인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법률의 기초가 됐던 지정조격은 지난 2021년 2월 보물 제2118호로 지정됐습니다. 원나라가 만든 법전이 정작 중국에서는 사라지고 한국에서 원본이 발견되다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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