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왕후(1661년~1680년) 김씨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정비입니다. 본관은 광산, 본명은 김진옥이며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서원부부인 한씨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김만기는 조선 중기 예학의 대가 사계 김장생의 4대손이자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의 문하생입니다.
침착하고 후덕한성격 하는을 가졌으며 딸이 왕비가 된 뒤에는 더욱 말을 삼가고 행동을 가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은 <구운몽>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인데요. 두 형제는 나란히 대제학을 지내게 되고 현종과 숙종 대의 공신으로 종묘에 올라가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인경왕후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서인 기호학파) 규수였습니다. 1661년(현종 29년) 음력 9월 3일 서울의 회현방 사저에서 태어난 인경왕후는 날 때부터 울음소리가 약하고 조용했으며 자라서도 말수가 적고 존귀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1670년(현종 11년) 10살의 나이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의동별궁에 들어갔으며, 다음 해 음력 3월에 책봉됩니다. 이후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남편 숙종이 즉위하자 그녀는 왕비에 오르게 되고, 1676년 16세에 정식으로 책봉됩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1677년(숙종 3년)과 1679년(숙종 5년)에 두 명의 공주를 낳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일찍 죽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후 1680년(숙종 6년) 인경왕후는 경덕궁(경희궁)에서 천연두(마마) 증세를 보이게 되는데요. 남편인 숙종이 천연두를 겪지 않았기에 영의정 김수항과 약방 도제조의 건의에 의해 숙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인경왕후는 음력 10월 26일 발병 8일 만에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경덕궁 회상전에서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신하들은 왕비의 죽음을 왕에게 보고하려 했지만, 숙종 또한 며칠 전부터 구토를 하며 앓아누운 상태였습니다. 결국 신하들은 이를 왕대비에게 알리고 서둘러 상을 치르려 하였으나,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숙종이 죽은 왕비를 찾아가 이별을 고하게 됩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장례가 서둘러 진행되는 과정에서 왕이 왕비의 죽음을 하루 늦게 알게 된 이 일로 인해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상복의 기준일이 왕비가 죽은 날이어야 하는가, 왕이 왕비의 죽음을 알게 된 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죠. 결국 경덕궁에 있던 사람들은 왕비가 죽은 26일, 창덕궁에 있던 이들은 왕이 안 27일을 기준으로 상복을 입기로 하면서 무사히 장례가 치러지게 됩니다.
안타깝게 요절한 인경왕후는 남편과 금슬이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한성격 하는하는 숙종과의 사이에서 정사, 야사를 통틀어 단 한 번의 불화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숙종은 인경왕후가 왕비였던 동안 그 어떤 궁인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인들이 왕에게 후궁이 없다는 이유로 간택을 추진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숙종이 가까이한 여성은 오직 인경왕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숙종의 사랑으로 왕후는 17세에 첫 딸을 낳고 19세에 둘째 딸을 낳았으며, 20세에 셋째 아이를 가지지만 곧바로 유산하게 되는데요. 짧은 생애 동안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걸 보면 중궁전을 찾는 왕의 총애가 절대 작지 않았음이 분명했습니다.
참고로 희빈 장씨의 자녀는 두 명이었고, 숙빈 최씨의 소생은 세 명이었는데요. 만약 인경왕후가 그녀들처럼 40세 넘어서까지 살았더라면 숙종과 인경왕후 사이에 더 많은 자녀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정통성 있는 왕자를 낳았을 수도 있죠.
인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숙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인현왕후가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인경왕후와 먼 친·인척이었는데요. 젊은 나이에 승하한 인경왕후와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인현왕후는 서인(인현왕후)과 남인(희빈 장씨)이 대립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에 따라 후일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기사환국과 다시 복위하는 갑술환국 등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죠.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존호와 휘호가 올려지게 되는데요. 1713년(숙종 39년)에는 존호 “광렬”이 올려졌고, 1722년(경종 2년)에는 휘호 “효장명현”, 1753년(영조 29년)에는 존호 “선목”이, 1776년(영조 52년)에는 존호 “혜성”, 1890년(고종 27년)에는 존호 “순의”가 각각 올려집니다. 최종적으로 인경왕후의 시호는 “광렬선목혜성순의효장명현인경왕후”였습니다.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난 후 일 년 상이 치러졌으며, 그녀는 1681년 2월 22일에 서오릉 중 하나인 익릉에 안장됩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날 경우 왕은 삼년상이 기본 원칙이지만 왕비는 죽을 때 배우자인 왕이 살아있느냐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지게 됩니다. 왕이 살아있는 상태라면 죽은 왕비는 일 년 상을 치르고 세자가 장례를 주관했지만, 왕이 먼저 죽은 경우라면 삼년상을 치루는게 원칙이기에 인경왕후는 일 년 상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이후 숙종은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지만 인경왕후의 익릉은 간소화하라는 명을 내리기 이전에 조성된 능이었기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오릉의 가장 높은 곳에 있게 됩니다. 가장 화려하지만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능이며, 심지어 숙종은 사후 본인의 뜻에 따라 정비인 인경왕후의 익릉이 아닌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의 명릉에 묻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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