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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 광장 자리에 있던 철로의 정체? ‘OOOO’ 청산을 위한 한국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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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든, 이스탄불이든, 비엔나든, 하다못해 아주 작은 시골 도시까지 예외 없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중 구시가지는 발전을 선택하기보다는 원형 보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아스팔트도, 고층 건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건축 양식이든, 도로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그 자체로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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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쉽게도 옛날 모습을 간직한 구시가지가 많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35년 식민지라는 치욕스러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당시 일제가 지은 건물, 일제가 남긴 흔적을 최대한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건물에 그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육부터 문화, 언어까지 아주 사소한 것들이 우리 민족의 얼을 말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들이 많아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여전히 한국의 숙제로 남아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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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조선 시대 법궁인 경복궁 그리고 그 정문에는 광화문이 있습니다. 현재 광화문 광장은 그냥 광장이 아닙니다.

우리 근대사뿐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품은 소중한 장소로, 조선을 움직이던 6개의 중앙관청이 자리하고 있었고, 때때로 임금은 광화문 앞에 나와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유생들은 직접 임금을 만날 수 없어 상소를 올리기도 했죠. 이 자리에서 월드컵 거리 응원이 시작됐고, 이 자리에서 무능한 대통령을 끌어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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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상징적인 장소 광화문 앞 아스팔트를 걷어냈더니 상상도 못 한 유물이 하나 나왔습니다. 사실 유물은 발견되면 그 자체로 경이롭고 찬란하지만, 얼마 전 발견된 유물만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나온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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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현재 광화문 광장 끝에는 경복궁의 정문 역할을 하는 광화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었는데요.

이후 27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고종 2년인 1865년 중건을 위한 공사를 시작해 3년 2개월 만인 1868년에 마무리됐습니다. 엄연한 조선의 법궁이었음에도 상당히 모진 세월을 견뎌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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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경복궁보다 더한 세월을 견뎌냈습니다. 1867년 함께 중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에 짓겠다며 강제로 이축시켰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헐어버릴 계획이었지만, 여론이 좋지 않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으로 이축했는데요. 이 자리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했습니다. 결국 폭격으로 소실되어 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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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를 복원한다며 원래 자리인 경복궁 정면으로 이동시켰는데,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제가 강제로 이축시킨 광화문에 원래 자리를 찾아주겠다는 좋은 취지였는지 모르겠으나, 당시 그 건물은 광화문이라는 현판을 제외하고는 전부 돌과 콘크리트로 된 구조물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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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광화문은 목재로 만들어진 건물이었지만, 콘크리트로 지은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산림녹화사업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무분별한 벌채를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시범 케이스로 광화문 복원을 돌과 콘크리트로 복원하되, 목재는 전혀 쓰지 않았는데요. 기둥과 천장은 물론 서까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목재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지만, 1968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앞에 두고 이를 강하게 주장하는 인물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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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3월 15일 착공해 장장 272일에 걸쳐 88.6m, 높이 15.4m, 무게 7,800톤의 광화문이 경복궁 앞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돌과 콘크리트로 만든 것도 그렇지만, 광화문이 원래 광화문 자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1968년 복원 당시 그 터에 대한 고증을 거치지 않은 탓에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가 떨어졌고,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도 틀어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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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40년이 지나 흉물스러운 광화문을 헐고 다시 복원하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광화문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이를 위해 1968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광화문을 해체하면서 그 참에 광화문과 월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동시에 진행됐는데요.

월대란 광화문 앞에 돌로 쌓아 올린 일종의 광장입니다. 왕실의 행사, 임금이 직접 주재하는 과거시험, 군사 행사는 물론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기록상으로는 남아 있으나 어느 순간 없어져 버려 이를 찾기 위한 발굴조사가 함께 진행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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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기록은 1900년대 초에 찍힌 여러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광화문 앞으로 널찍한 월대가 T자 형태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도 <경복궁영건일기>에 나와 있는데,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는데, 작업자들이 궁 안에 쌓아둔 흙을 지고 오니 4만여 짐에 이른다.”라고 썼습니다.

즉, 그간 광화문 복원에만 힘썼지, 월대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있었는데, 이참에 월대의 흔적을 발굴하기로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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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존의 광화문을 허물고 보니 지표 70cm 아래에서 원 광화문 터의 기초들이 하나도 바뀌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 덕분에 강릉과 양양에서 최대 수령 250년에 이르는 금강송을 공수해 2010년 가까스로 현재의 광화문을 복원했는데요. 그렇다면 월대는 어떻게 됐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월대도 함께 찾아냈습니다.

고고학에서는 땅속에 묻혀 발굴 대상이 되는 매장 문화재를 크게 유물, 유구, 유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유물은 토기나 철기, 석기 등의 출토물을 말하고, 유구는 집터나 고분, 건물터 등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을 말합니다. 유적은 이런 유구가 모인 장소로, 마을터나 절터 등을 의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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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광화문 복원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문화재청은 월대 유구도 함께 찾아냈는데, 이보다 더 특이했던 것은 그 자리에서 일제강점기에 깔린 철로를 찾아냈다는 점입니다.

광화문 뒤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던 일제는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건춘문으로 옮겨버리고, 그 자리에는 전철이 다닐 수 있는 철로를 만들었습니다. 즉, 월대 자리에 철로를 만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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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된 바에 따르면 1917년 일제는 광화문 월대를 기준으로 Y자로 나누어 통의동과 안국동으로 가는 철로를 깔았습니다. 조선총독부를 짓는 데 필요한 자재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당시 동아일보는 “전차가 궁궐 앞마당을 헐었고, 광화문 앞 돌난간도 헐리게 될 모양”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여기에서 돌난간은 월대를 말하는데, 철로가 깔리면서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렸습니다. 별다른 보존 처리 없이 헐어 버렸으니 훼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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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어야 한다며 설치한 이 철로는 1966년 세종로 지하도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땅속으로 묻혔다가 57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겁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조만간 이 철로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월대도 복원할 계획인데, 몇 년 후면 경복궁의 완벽한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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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에서 수차례 언급했던 조선총독부 건물, 즉 광화문을 건춘문으로 옮기게 만든 장본인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두고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가까워지기 어려운 관계”라고 합니다. 고작 1시간 거리에 떨어졌지만,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저지른 악행은 용서가 불가한지라 과거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 아마 영원히 우호 관계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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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중에서 일본에 가장 강경한 대응을 펼쳤던 인물은 단연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을 텐데요. 1995년 장쩌민 전 중국 주석과 정상회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보통의 대통령이 하지 않는 표현을 써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고 말한 것인데, 앞서 에토 다카미 일본 총무청장관이 “한일 합방으로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라는 망언 직후였습니다. 이에 일본 관방장관은 “보다 절도 있는 발언을 해 주기를 바란다.”라며 항의하기도 했으나, 그는 절대 굽히지 않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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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발언은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1993년 취임 직후부터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업적은 35년의 치욕을 상징하는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입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로 한국에 남은 유무형의 흔적들을 ‘일제 잔재’라고 합니다. 가령 35년의 아픈 상처는 여전히 우리나라 곳곳에 존재하는데, 근 1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일제 잔재를 청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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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5년까지도 서울 한복판에 떡하니 버티고 선 건물이 있었는데, 바로 조선총독부 건물입니다. 현 광화문 뒤, 그러니까 경복궁 앞을 떡하니 버티고 섰던 이 건물은 그 건설 계획부터 조선의 얼을 말살시킬 목적이 컸습니다. 1926년부터 약 10년 동안 연인원 200만 명을 동원해 지은 이 건물은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가로막아 세웠습니다.

즉, 광화문 바로 뒤에 세운 것인데,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0년대 차례로 완공한 경성부청, 경성역, 조선신궁 등과 함께 완벽한 식민지를 구축하는 핵심 건축물이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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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건물을 짓고 보니 광화문에 가려 조선총독부 건물의 시야를 방해하자 일제는 이를 헐어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비록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는 했지만,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 역할을 하던 광화문을 헐어버리려던 겁니다. 하지만 여론의 반대가 거세지자 이를 통째로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이축했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당해 문루가 모두 소실됐습니다.

그 후 1968년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기기는 했지만,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위치를 찾지 못했고, 현재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 복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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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일제는 조선 왕궁의 맥을 끊을 목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자 형태로 만들었으며 남산 성곽에 세운 조선신궁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설계했습니다. 일제는 영리하면서 무자비했습니다.

경복궁을 허물고 지은 총독부 건물을 일부러 경복궁의 중심축과 동쪽으로 3.5도 비뚤어지게 지었으며, 남쪽 담장을 허물고 총독부의 동서 쪽 선상에 맞게 철책까지 만들었죠. 여기에 당시 제국주의 국가가 권력을 상징할 목적으로 박아둔 중앙의 높은 돔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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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지시하기 전까지 총독부 건물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습니다. 일제가 19년을 사용했고, 나머지 50년은 미군정 청사로 사용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 청사로도 사용됐습니다. 이후 1962년부터는 중앙정부 청사로 20년을 사용했고, 1983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편돼 1995년까지 사용했죠.

그러다 김 전 대통령이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며 철거를 지시해 철거가 결정됐습니다. 당시 이 철거를 두고 “일제 침략을 상징하는 건물을 그대로 살려 역사교육의 공간으로 사용하자.”라는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1995년 8월 15일, 총독부 건물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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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당시 생방송을 보신 분들도 꽤 계실 텐데, 건물 철거와 관련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 철거 이야기가 나올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은밀한 제안을 해 왔습니다. 자신들이 철거 및 이전 비용을 전부 부담할 테니 건물의 원형을 그대로 일본으로 이전해 가겠다고 말이죠.

하지만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던 김 전 대통령이 이를 허락할 리 없었고, 건물은 그대로 헐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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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헐어진 총독부 건물 잔해는 폐기물 처리됐고, 그중 제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높이 8m, 무게 30톤에 이르는 중앙첨탑, 첨탑 아래 석조장식물, 정초석, 정면 중앙부 석조 장식물, 원기둥 등 수십 개의 잔해는 천안으로 옮겨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 부지 전시공원’에 전시해 두었습니다.

약 1,270평 규모의 전시공원 곳곳에 모든 전시물을 아무렇게나 던져두었습니다. 관리조차 되지 않죠. 이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우리의 치욕스러웠던 과거를 전시하되 홀대하는 형식으로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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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중앙 동그란 원 5m 아래에는 첨탑을 반매장시켰는데, 이는 일제 잔재 청산과 극복이라는 의미 외에도 한국인들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도록 했는데요. 뿐만 아니라 이 공원은 일부러 독립기념관 주 건물인 ‘겨레의 집’ 서쪽, 즉 해가 지는 위치에 조성해 일제의 몰락을 상징하도록 했죠.

혹 천안에 가실 일이 있다면 독립기념관에 들러 일제의 잔재가 어떻게 전시되어 있는지 한 번쯤 보고 오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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