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에서 최고의 명문가로 꼽히는 호소카와 가문은 가문을 방문하는 고위급 손님들을 대접할 목적으로 1932년 약 8천 평짜리 초대형 연회장을 만들었습니다. 연회장은 단순한 연회장이 아니라 실내 장식이 어마어마합니다.
벽, 천장, 바닥까지 연회장 전체를 소위 ‘일본의 혼’이라 부르는 옻으로 뒤덮었는데 작품 수가 무려 5천 점을 넘는다고 하죠. 일본 정부가 역사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을 정도로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바로 ‘메구로가조엔’인데요. 그러다 1988년 홍수와 지진으로 메구로가조엔이 훼손되자 호소카와 가문은 이를 복원할지 부술지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게 되는데요.
왜냐하면 수많은 옻 예술품을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일본 장인은 물론 중국, 한국까지 수소문했지만, 마땅한 실력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공개입찰을 진행했는데 무려 3천 명이 넘는 일본 장인들과 외국인 장인들이 입찰했는데 결국 복원은 한국에서 온 36살의 전용복에게 맡겨졌습니다.
10대 시절부터 옻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1980년대 초 우연히 메구로가조엔을 방문했다가 그 규모와 퀄리티에 깜짝 놀랐습니다. 건물 내부가 얼마나 호화스러웠던지 각 방부터 정원, 복도, 심지어는 화장실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가슴을 떨리게 만든 것은 실내 장식품 전부가 그가 가장 잘하는 옻과 나전 기법으로 만들어진 예술품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5천여 점의 작품이 전부 그랬는데 하나하나 살펴본 그는 이 작품의 80% 이상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온 조선 장인들의 피와 눈물로 빚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짐하죠. 반드시 자기 손으로 이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하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3년 뒤 1991년 11월 13일, 마침내 다시 재오픈한 메구로가조엔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눈앞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본 39살의 전용복은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습니다.
이 작품들을 복원한 후 일본 정부는 그에게 문화기금을 제공할 테니 귀화하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그는 ‘나는 조선의 옻쟁이’라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콘텐츠에서 소개해 드렸듯 우리 조상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다뉴세문경을 제작했을 정도로 손재주가 대단했는데 옻칠 공예, 자개, 나전칠기 등 우리가 개발한 것이 아니어도 이를 어나더 레벨로 끌어올리는 것이 우리 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민족 최고 예술품 중 하나인 나전칠기를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몇 년 전 한국을 여행한 한 일본인의 SNS 글이 꽤 화제가 됐었습니다. 그는 서울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쓰레기로 버려진 장롱을 하나 보고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버리고 있다고 쓰면서 사진을 두 장 올렸는데 우리가 시골 할머니 집에서 흔히 보는 장롱이었습니다.
‘저 장롱이 나전칠기 장롱이다’라고 말하면 대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시간을 돌려보면 여느 가정에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자개농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때때로 대단한 것을 대단하다고 인지하지 못해 쓰레기로 버리는 경우들이 있는데요. 보통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나전칠기를 꼽습니다.
나전칠기에 나는 조개, 소라, 진주 등을, 전은 보배롭게 꾸민다는 의미를, 칠은 옻칠하다를 뜻하며, 기는 그릇을 의미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줄여 ‘자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나전칠기는 자개보다 훨씬 복잡한 예술품입니다. 옻칠이 더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전칠기는 옻칠한 그릇이나 가구에 전복이나 소라 껍데기 등을 얇게 갈아 모양을 만든 후 박아 넣고 다시 옻칠로 마무리하는 예술품인 겁니다.
이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고 역사를 되돌려 보면 나전 기법은 중국 상나라에서 시작해 당나라 시기에 크게 성행한 기법입니다. 이는 신라를 거쳐 일본까지 전해지지만, 중국과 일본은 나전 기법보다 칠기 기법이 발달해 나전 기법은 곧 쇠퇴하게 됩니다. 반면 신라에 전해진 나전 기법은 신라인들의 손을 거쳐 독보적인 예술 분야로 발달했죠.
나전칠기 장인은 크게 조개껍데기를 가공하는 ‘섭패장’, 이를 자개 무늬로 만드는 ‘나전장’, 이를 옻칠로 마감하는 ‘옻칠장’으로 나뉘는데 그 어떤 분야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데요. 그렇다면 우리의 나전칠기가 유독 특별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잠시 언급했듯 나전과 칠기는 서로 다른 공법인데, 나전의 경우 전복껍데기 등을 무늬대로 잘라 목심이나 칠면에 박아 넣거나 붙이는 기법으로 예부터 우리는 이를 자개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은 송나라 때부터 나전 기술이 쇠락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이 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습니다. 보통 고려 하면 도자기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나전 역시 도자기 못지않은 고려의 대표적인 공예입니다.
반면 칠기는 옻을 입히는 기법인데 원래 옻 진액은 옻나무에서 채취했을 때는 노란빛이 조금 도는 미색입니다. 그러나 이 옻이 마르면 검은색이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검은빛이 사라지고 고동색으로 변했다가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이를 옻이 핀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옻은 굉장히 위험한 재료입니다. 흔히 옻이 오른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독성 때문에,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자칫 식도에 옻 독이 오르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옻의 독성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렇다 보니 칠기 장인들의 손가락은 전부 검은색으로 변합니다.
수백 수천 번 옻을 만지면서 생기는 직업병 같은 것이죠. 중국에서 전해진 초기 나전 공예는 하얀색의 야광패를 사용했지만, 우리나라로 전해진 이후에는 하얀색과 청록색을 띤 전복껍데기를 많이 사용했고 이는 칠기와 합쳐져 고려만의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흑칠 위에 나전, 대모, 은사, 동사를 감입하여 무늬를 만드는 특징이 있었으며, 자개는 전복껍데기를 종잇장같이 얇게 갈아서 사용했는데 이런 기법은 당시 당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죠. 고려 나전칠기의 중요한 기법의 하나가 바로 복채법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대모를 얇게 갈아 그 뒷면에 색을 칠하거나 금박을 입혀 표면에 비쳐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고려 나전칠기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금속선을 사용하는 것으로 무늬의 덩굴줄기나 무늬와 무늬 사이 경계선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했는데 이런 세밀한 공예 방식 역시 중국 것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고려 때 사신으로 왔던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는 ‘그 기법이 매우 세밀하여 귀히 여길 만하며, 나전이 장식된 말안장도 매우 정교하다’라고 고려의 나전칠기를 평가하고 있고,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고려 문종 때 고려에서 요나라에 나전칠기를 예물로 보냈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칠공예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단조한 편에 가깝고, 생칠, 흑칠, 주칠과 자개를 활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옻칠의 질이 좋고 특유의 자개 솜씨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예부터 목기와 칠기가 발달했는데 창원 ‘다호리고분’이나 광주 신창동 등지에서 발굴된 칠기 유물을 보면 우리나라 칠기의 기원은 이미 가야 시대에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옻나무는 우리 전역에 분포해 환경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런 덕분에 과거 신라에서는 칠기를 전문으로 만드는 칠전이라는 기관이 있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옻나무를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재배할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조선시대 말기로 접어들면서 나전기법은 좀 더 다양해집니다. 문양보다는 자연의 사실 묘사가 더 많아지고, 끊음질 기법으로 ‘귀갑문’, 즉 거북 등껍질을 형상화한 거북등무늬와 같은 기하학적 무늬를 전체에 뒤집어씌운다든지 나전기법으로 산수화 한 편을 그려 넣는 등 예술적 가치는 더욱 높아졌죠.
결과적으로 민간에서 발달한 나전칠기는 왕실과 귀족, 사대부 등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가 조선시대 말기에 접어들며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됐죠. 콘텐츠 초반에 언급했듯 일제시대 수많은 조선의 장인들이 반강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나전칠기 작품을 만들었고 지금도 잊을만하면 일본의 나전칠기 작품 뉴스가 들려오곤 합니다.
2020년에는 전 세계에 단 3점뿐인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을 환수하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더 귀한데 전 세계에 딱 20여 점만 존재하는데 그마저도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 주요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일본인이 서울에서 본 나전칠기 장롱은 아마 진짜 나전칠기가 아니라 자개농이었을 겁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만든 도자기나 막사발에 환장했던 것처럼 나전칠기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당시 전복이 풍부했던 통영 등지에 대량 생산 체제가 최초로 도입됐고 1980년대까지 그 주변으로 수많은 나전칠기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물론 어느 집에서나 하나씩 가지고 있던 장롱은 진짜 나전칠기는 아니고 옻칠을 대신해 일본에서 들여온 캐슈라는 저렴한 대용 칠 재료를 사용해 만든 것입니다.
진짜 옻칠이 가미된 나전칠기는 최소 수천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죠. 나전과 칠기가 만나면 천년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족히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한국인 특유의 섬세함과 예술적 손놀림이 가미된 나전칠기의 매력은 쉽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혹 시골집에서 발견하시거든 자세히 감상해 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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