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1455년~1482년)는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어머니로 본관은 함안이며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고령 신씨의 딸이었습니다. 생년이 확실하지 않다고 전해지지만 국립고궁박물관 폐비 윤씨 태실에 있는 태지문에 단종 3년(1455년) 음력 6월 1일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은 집현전 학자 출신이었습니다.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었지만 요절했기에 폐비 윤씨는 홀로 된 어머니 고령 신씨 아래에서 성장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그녀의 외모는 마치 선녀와 같고,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서늘해질 만큼 미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들 연산군의 큰 키는 아버지 성종을, 전체적인 외모는 어머니 윤씨를 닮았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다”라고 했을 때 한 신하가 “그러면 거울을 보십시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입궁하기 전에 베를 짜서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효녀였습니다. 사극과 야사 등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집안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궁녀로 입궁해 승은을 받았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세조비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의 선택으로 간택되어 후궁으로 입궁하게 됩니다.
당시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는 병약했고 결혼 후 6년 동안 아이가 없었기에 신하들은 후궁을 들일 것을 청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윤호의 딸(훗날의 정현왕후)과 함께 입궁해 후궁에 간택됩니다.
성종 4년(1473년) 음력 3월 19일, 윤씨는 숙의에 봉해졌으며 입궐 후 검소하고 온화한 태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당시 왕실에는 세 명의 대비 즉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안순왕후(인혜대비)가 있었는데 윤씨는 이들을 극진하게 봉양했고 웃전의 신뢰를 얻게 됩니다.
그녀가 입궐한 다음 해인 1474년(성종 5년) 4월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비의 삼년상을 마친 후인 1476년 음력 7월 11일, 당시 숙의였던 윤씨가 국모로 결정됩니다. 이렇게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당시 임신 중이었고, 아들을 낳은 사실(장남 원자 이효신 5개월 만에 조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윤씨는 임신 중인 몸으로, 1476년 음력 8월 9일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3개월 뒤인 음력 11월 7일에 적통 대군인 원자(연산군)를 낳게 되면서 그녀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집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태어난 이후 윤씨의 좋지 못한 행동이 시작됩니다.
실록에 따르면 왕비는 질투심이 많아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을 음해했으며 출산 후에는 남편인 성종에게도 공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성종을 비롯하여 웃전인 세 명의 대비 그리고 후궁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야사에 따르면 성종이 자신의 처소인 교태전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의 처소만 찾자,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서 취조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성종의 눈 밖에 났고 결정적으로 성종과 말싸움하다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고 전해집니다.
1477년, 그녀의 방 안에서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비상이 묻은 곶감이 성종에게 발각되며 그녀는 결국 폐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대왕대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왕비의 폐비 논의가 처음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사건의 파장을 우려한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방양서와 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과 사비에게만 죄를 물었고 왕비는 별궁에서 근신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됩니다.
이후 윤씨는 셋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았으나 분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결국 1479년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 날인 음력 6월 2일에 왕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전문가들은 폐비 윤씨가 출산 후 급격하게 성격이 변한 원인을 산후 우울증이나 경계선 성격장애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계선 성격장애는 청소년기와 성년기 초기 때 잘 나타나는데요. 폐비 윤씨가 변한 모습을 보였을 시기가 바로 20살이었습니다.
그녀는 감정 기복이 심하면서도 충동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식사 도중 화를 참지 못해 상을 엎는 등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고, 후궁들을 협박하거나 성종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는 등 사람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성종 처소에 무단으로 침입하거나 궁녀에게 “전하를 모시면 죽을 줄 알아라”라는 협박을 하는 등 조선 왕실에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는데요. 이는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가 보이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자신이 짠 베를 팔아 겨우 먹고살았던 불행한 과거, 여자를 좋아하는 성종, 자신보다 친정 배경이 좋은 후궁의 임신으로 왕비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심리적인 불안이 폐비 윤씨를 경계선 성격장애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녀의 아들인 연산군 역시 유전적인 요인으로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았다는 설이 존재합니다. 윤씨가 폐위된 이후 조정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원자의 생모인 그녀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와 시위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는데요. 이에 많은 조정 대신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듬해인 1480년,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 자기 어미 얼굴을 기억하기 전에 하루빨리 새 중전을 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폐비 윤씨와 같은 날 입궁한 숙의 윤씨(정현왕후, 중종의 생모)를 왕비로 책봉시킵니다. 1482년 연산군의 세자 책봉이 거론되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됩니다.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가 된 이후 자기 행동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점, 원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상세히 알아보러 간 궁녀들이 폐비 윤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후궁인 숙의 엄씨와 귀인 정씨 등의 사주로 인수대비와 성종에게 거짓 보고를 하게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이에 마음을 굳힌 성종은 곧이어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들을 불러 폐비 윤씨의 처분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1482년 8월 16일 28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폐비 윤씨의 폐출 및 사사는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아닌 남편 성종이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종의 결정에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인수대비가 동조했고 대부분 신하는 후일을 염려해 반대하는 편이었습니다. 야사에서 윤씨는 자기 피가 묻은 적삼을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주며 “세자가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대중매체에서는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적삼을 건네받아 사건을 알게 되고, 이 때문에 폭주하여 관련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했다고 묘사되곤 합니다. 실제 역사 속의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일으킨 두 번의 사화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고도의 정치적인 사건으로 이로 인해 그는 절대왕권을 얻게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연산군은 폭주하지요. 이때 폐비 복위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배갔거나 파직당했던 대신은 연산군에 의해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반대로 윤씨 폐위에 앞장섰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대신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명에 따라 묘비도 세우지 못하고 묻혔는데요. 7년이 지난 1489년(성종 20년)에야 윤씨지묘라는 묘비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후 경기도 장단에 있던 폐비 윤씨의 묘소는 즉위한 아들 연산군에 의해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장되었고 묘호도 회묘로 정해집니다.
1504년(연산군 10년) 3월 25일 그녀가 제헌왕후로 추존되면서 묘가 회릉으로 격상되었는데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는 다시 폐비가 되었고 회릉 역시 왕릉에서 폐비윤씨지묘로 격하됩니다. 그녀의 무덤인 회묘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며, 이는 회기동 지명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일 경희대학교가 옮겨 오면서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로 옮겨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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