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랑받지 못하고 쫓겨날 뻔한 후궁 안빈 이 씨”
안빈 이 씨는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의 후궁으로, 아버지는 공조 참의를 지낸 이응헌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안빈 이 씨는 효종이 봉림대군이었던 시절 첩으로 들어왔으며, 1637년 병자호란 이후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와 함께 청의 볼모로 심양에 끌려갔을 때 따라가 끝까지 그를 보필합니다.
1645년 청나라에서 봉림대군과 귀국한 그녀는 같은 해에 숙녕옹주를 낳게 됩니다. 안빈 이 씨의 소생은 외동딸 숙녕옹주만이 있었으며, 숙녕옹주는 효종의 막내딸이자 유일한 서녀였습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른 후 딸을 낳은 그녀에게 봉작을 내리지 않다가 1656년이 되어서야 종4품 숙원의 첩지를 내리게 됩니다.
안빈 이 씨는 드디어 바라던 후궁이 되었지만, 그녀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그녀의 생활비는 호조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것만으로는 생활에 어려움이 있어 세자였던 현종이 효종에게 궁중에 남은 물자로 안빈 이 씨의 부족한 생활비를 보태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효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네가 은혜를 베풀도록 남겨두는 것이다.”라고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그녀를 포함한 조선시대 후궁들은 자녀를 낳아도 자신이 어머니라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후궁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정실인 왕비를 어머니로 모시는 것이 궁중 예법이었고, 신분 또한 옹주가 후궁보다 높습니다. 이로 인해 후궁은 자기 친자녀들에게도 함부로 반말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안빈 이 씨는 자신의 딸 숙녕옹주에게 무심코 ‘너’라고 반말을 한 적이 있었고, 이 사실을 안 효종이 노발대발하며 쫓아내려는 것을 정비인 인선왕후가 말려서 진정시켰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안빈 이 씨는 다행히도 효종 사후, 현종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1661년 종4품 숙용으로 진봉 되었고, 석 달 후 다시 종2품 숙의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종1품 귀인을 거쳐 효종의 손자인 숙종에 의해 1686년 정1품 빈으로 승격되어 안빈이라는 작호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말년을 편하게 보낸 안빈 이 씨는 1693년 10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숙종은 안빈 이 씨의 장례를 선조의 후궁이었던 온빈 한 씨의 예에 따라 거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안빈 이 씨가 지아비를 따라 청나라까지 갔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특별히 국가에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는 특전을 명하고, 그녀의 본가인 경주 이 씨 후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했습니다.
이후 1790년 8월 9일, 정조는 제수로 쓸 돈과 쌀, 집을 주도록 하였고, 철종은 1859년 10월 29일에 안빈 이 씨의 사당을 수리하라 명합니다.
안빈 이 씨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66번지에 있으며, 후궁의 묘지로는 드물게 1991년 사적 제366호로 지정됩니다. 현재 안빈 이 씨의 묘소는 사적지 원형 보존을 위해 비공개로 관리 중이며, 학술조사 등의 목적으로 허가받아야만 출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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