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그날을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1922년 11월 26일은 내 평생 가장 근사하고 황홀한 날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날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통로의 돌과 흙을 치우는 일은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우리는 그 내용물과 섞여 있는, 깨지기 쉬운 물건들 때문에 작업을 천천히 진행해 나갔다.
그러다 오후 중반쯤 돼 바깥문에서 9m쯤 되는 곳까지 파 내려갔을 때 첫 번째 문과 거의 똑같이 생긴 두 번째 문이 나타났다. 밀봉된 그 문에 찍힌 인장 자국은 첫 번째 문의 인장 자국보다 덜 선명했으나 왕들의 공동묘지 인장과 투탕카멘왕의 인장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 문의 벽토 자국에도 역시 누군가 뚫었다가 다시 밀봉한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22년 11월 4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이집트에서 우연히 무덤을 하나 발견합니다. 그가 위에서 ‘절대 잊지 못할 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된 3,300년 전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힘이 없었던 투탕카멘은 18세의 이른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투탕카멘 무덤이 엄청난 발견이었던 것은 그 무덤에서 어마어마한 고고학적 가치를 가진 유물이 발굴됐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문화든 왕의 무덤은 도굴의 타깃이 되고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훼손될 가능성도 높아지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도굴의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도 미력한 왕이었던 까닭에 람세스 6세의 피라미드가 그의 무덤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한국에서도 투탕카멘에게 뒤지지 않는 거대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무덤으로 흘러드는 물을 막기 위해 시작한 배수로 공사 도중 마주한 거대한 벽, 그 뒤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요? 1971년 한여름 충남 공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인 1971년 그해 전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백제 왕족의 무덤이 밀집해 있는 충남 공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긴 장마에 공주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일본인들이 죄다 도굴해 버린 6호분은 벽면 사방에 사신도만 남았는데 여기에 천장에 구멍까지 생겨 물이 스며들고 있으니 자칫 소중한 백제 유산이 훼손될 위기 처했으니까요.
또 여름만 되면 시원한 내부와 뜨거운 외부의 온도 차 때문에 이슬이 생겨 벽화까지 훼손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즉각 6호분 옆 3m 바깥으로 배수로를 파기 시작했는데 공사 일주일 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공사에 투입된 인부 한 명이 집중 호우에 대비해 봉분 둘레로 물길을 조성하고 있었는데 그의 삽날이 갑자기 ‘깡’ 하면서 튕겼던 겁니다.
돌이겠거니 생각한 그가 다시 삽을 밀어 넣었는데 또다시 삽날이 튀며 무언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죠. 심상치 않은 벽돌이었습니다. 백제 고분인 만큼 함부로 파 내려갈 수 없었던 인부는 이 사실을 즉각 김영배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에게 보고했고,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합동조사단을 꾸려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찬찬히 파 내려가기 시작했죠. 1시간쯤 파 내려가자 마침내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아침 모양의 단면이 나타났습니다. 이 당시 발굴단원으로 참가했던 이들은 전부 몸 전체에서 소름이 돋는 걸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간 함부로 도굴되고 훼손됐던 백제 고분들 사이에서 아직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싱싱한 무덤 입구가 드러났기 때문이죠.
그 즉시 벽돌을 한 장 한 장 빼내기 시작했는데 너무도 탄탄하게 틀어막은 탓에 작업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오후부터 시작된 비는 어느새 호우로 변해있었고 무덤 입구에 만들어 둔 구덩이는 역류해 무덤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오후부터 시작된 작업은 다음 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위령제를 지낸 후 막아놓은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내자, 무덤에서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런 경우 발굴자들은 움찔하게 됩니다. 무덤 내부에 차 있던 독가스가 뿜어져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다행히 이 수증기는 1,400년 이상 밀폐 상태로 갇혀있던 무덤의 찬 공기가 한여름 뜨거운 공기와 만나면서 일어나는 결로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벽돌 틈으로 뿔 하나가 달린 돌짐승의 눈과 마주쳤고 그 짐승 앞에는 무덤 주인의 지위와 이름을 새긴 지석 2개가 놓여 있었는데요.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를 마주한 학자들은 낯선 이름의 ‘사마왕’이 누구일까 의아했지만 ‘삼국사기’ 기록과 대조해 보는 순간 곧 누구인지 알게 됐습니다. 그는 바로 백제 25대 왕이자 웅진 시기 백제의 중흥을 이끈 무령왕이었습니다. 드디어 1,400년 동안 비밀에 감춰졌던 무령왕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사실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든 무령왕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한국 문화재 역사에서 큰 축복이기도 했지만, 이 발굴은 ‘역사상 최악의 발굴 재앙’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당시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관리국 직원들이 공주로 급파됐다는 사실을 안 한 신문기자는 다음 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백제시대 새로운 왕릉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특종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은 문화재의 소중함 따위는 뒷전이기 때문에 전국 모든 신문사 기자가 전부 공주로 몰려왔습니다. 어떤 기자는 왜 자신에게 먼저 알리지 않았느냐며 문화재관리국 직원의 뺨까지 때리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어쨌든, 입구가 열리며 무조건 특종이라는 사심 가득한 기자들이 발굴단원들을 주시하고 있었고 입구가 열리자마자 카메라 세례가 터졌습니다. 당시 김원룡 관장과 김영배 관장은 말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가득했습니다.
‘네 귀 달린 청자 항아리’와 청동잔, 엽전 꾸러미에 지석에는 무령왕의 무덤이라고 쓰여있으니 고고학자 입장에서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절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습니다. 자칫 흥분해서 감정을 표출했다가는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의 무덤 침입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결국 절대 무덤 내부로 진입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아내고는 사진 촬영을 허락했는데 한 기자가 몰래 무덤 내부로 들어가서는 근접촬영을 하다 청동 숟가락 하나를 밟아 부러뜨렸습니다. 물론 실수였겠지만 즉각 발굴단은 사진 촬영을 막고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평생의 실수로 기억될 결정이 내려지죠.
발굴단 내부에서 ‘기자들에게 훼손당하느니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발굴을 끝내는 게 좋겠다’라는 결론이 내려진 겁니다. 사실 아무리 기자들이 아우성치더라도 신중하게 발굴했어야 했지만, 발굴단은 빨리 발굴을 끝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고분 내부에 쌓인 유물들을 사진도 찍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자루에 쓸어 담았습니다. 그것도 공사용 삽으로 퍼 포대 가마니에 담았죠.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려서라도 사진 찍고, 실측하고, 연구하면서 조심스레 진행됐어야 할 역사상 최고의 왕릉을 하룻밤 사이에 해치웠으니 얼마나 황당한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되시죠? 물론 당시 발굴단도 이렇게 엄청난 발견과 발굴을 감당할 경험이 부족했고, 기자들 역시 발굴 취재 경험이 없다 보니 총체적 난국이 펼쳐진 것인데 결과적으로 어떤 유물이 어떤 자리에, 어떤 이유로 존재했는지도 밝혀내지 못하게 된 겁니다.
어쨌든 이러한 재앙은 경험이 됐고 경주 천마총 발굴의 밑거름이 되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문화재 역사상 최고의 발견이자 최악의 발굴로 불리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무령왕릉에서는 어떤 유물이 출토됐을까요? 우선 2015년 유네스코는 무령왕릉을 포함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는데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3개 지역에 분포된 8개의 고고학 유적지가 전부 세계유산입니다. 그중 무령왕릉은 가장 특별한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수많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왕릉이기 때문입니다.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무령왕이었던 만큼 그 유물들이 대단했는데 발굴된 전체 유물은 지석을 비롯하여 금제관식, 귀걸이, 목걸이, 팔찌, 고리장식 칼, 청동거울, 석수, 도자기, 오수전, 유리구슬, 다리미 등 무려 124건 5,232점으로 그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처음 조사했을 때 4,600여 점으로 집계됐으나 재조사 과정에서 5,232점으로 확인됐습니다. 우선 왕릉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물입니다. 연꽃무늬 수만 장의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인부가 발견한 것이 이 벽돌입니다. 벽돌무덤은 백제에서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양식의 무덤으로, 이는 백제가 중국 남조 양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그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2021년 공주시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무령왕릉 발굴 조사 과정에서 무덤 입구를 막았던 벽돌을 전량 수습해 조사했는데 그 결과 벽돌에는 ‘조차시건업인야’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당시 벽돌 제작자의 출신지가 기록된 것인데 이는 당시 백제가 중국 등 다양한 외국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인데요. 조사에 참여한 공주대학교 서정석 교수는 ‘중국 양나라 수도인 건업의 기술자가 참여했다는 것은 무령왕릉이 당대 최고의 기술로 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며 ‘방형 형태의 묘실을 갖춘 석실 무덤이 탄생하는 등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백제문화를 완성해 나가는 토대를 마련했음을 입증하는 의미가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령왕릉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석수와 도자기를 비롯해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 태국 및 인도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장신구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백제가 활발하게 국제교류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5,232점의 유물 중 단연 으뜸은 국보 제154호, 제155호로 지정된 ‘금제 관 꾸미개’인데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령왕 금제 관 꾸미개’의 경우 높이 각각 30.7cm, 29.2cm에 너비 14.3cm, 13.6cm인데 보는 이로 하여금 그 화려함에 넋을 놓게 만듭니다. 아주 얇은 금판에 화려한 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기본으로 전체에 구슬 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아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 화려한 모양새를 하고 있죠.
국보 제155호는 무령왕비가 썼던 금제 관 꾸미개로 왕 꾸미개와 마찬가지로 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기본으로 연꽃으로 장식한 꽃병 위에 활짝 핀 꽃 한 송이를 장식했습니다.
드라마나 역사 영화에서 백제 왕족이 등장할 때 머리 위에 있는 그 관 꾸미개가 실물로 드러난 것이죠. 또한, 왕릉 입구에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길 한가운데 놓여있던 석수는 높이 30.8cm, 길이 49cm, 너비 22cm로 입이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습니다. 입구 쪽을 향해 노려보는 자세로 놓여 있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무덤을 지킬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백제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 왕의 무덤을 수호하고 왕과 왕비의 영혼을 인도하기를 바라는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고 가장 오래됐죠. 아마 무령왕을 사랑했던 백제인들의 마음이 담겼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무령왕릉을 좀 더 섬세하게 발굴했다면, 당시 백제사의 기록을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때의 발굴 경험을 토대로 한국 고고학 기술과 고고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도 지속해서 무령왕릉 주변이 조사되고 있는 만큼 추후 우리 한국사에 기록될 놀라운 정보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제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출신의 왕임에도 가장 정확한 정보를 남긴 무령왕릉, 이제는 교훈이 되어 앞으로도 다양한 유물로 우리 선조가 남긴 기록에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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