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5월 29일 일본 해상 자위대 호위함 ‘하마기리 함’이 부산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했습니다. 일본이 자위대 호위함을 보낸 것은 한국이 주최하는 다국적 해양 차단훈련 ‘이스턴 엔데버23’에 참가하기 위함으로 이 훈련은 한국, 미국, 일본, 호주 등이 참가합니다.
2010년, 2012년에 이어 한국이 주관하는 세 번째 다국적 훈련인데요. 일본은 13년 만에 해상 자위대 함선을 파견했는데요. 오랜만의 방문이라 반가울 법도 하지만 오히려 굉장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욱일기를 달고 입항했기 때문이죠.
물론 일본 측에서는 이는 욱일기가 아닌 자위함기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1954년 자위대 발족 이후 사용하기 시작한 해상 자위대 자위 함기는 중앙의 붉은색 원을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 그리기 때문인데 한국인들에게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이런 논란이 지속될 때 한 전문가가 나와 일침을 날렸습니다.
‘욱일기는 일본의 모든 전쟁터에서 사용됐다. 대일본제국의 일본군이 전시 때 사용한 깃발이라는 것은 현지에서도 기본적인 인식으로 정의된다’며 ‘1870년 일본 육군이 정식 군기로 사용했고, 해군이 그것을 그대로 본떠 수용해 자위함기가 욱일기가 아니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말했는데요. 이러한 비판을 날린 인물은 바로 ‘호사카 유지’입니다.
그의 이름만 들으면 당연히 일본 사람이겠거니 하겠지만 사실 그의 국적은 한국인입니다. 대한민국 정치학자이자 세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죠.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환멸을 느껴 2003년 귀화했는데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지 않은 것은 자신이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 더욱 신뢰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죠.
실제로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 또는 일본에 환멸을 느껴 귀화한 한국인의 입장이 아닌 객관적인 논평을 하기로 정평이 났습니다. 욱일기에 대한 비판 외에도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 등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기도 하죠.
그런 그의 이력 때문에 일본 극우 세력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부르며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도 있었고, 지금도 무조건 일본의 편에 서서 무지성한 비판을 쏟아내는 한국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호사카 유지보다 더했던 일본인이 수천 명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국 일본에 칼을 겨눈 일본인들을 알아봐야겠습니다. ‘항왜’ 이를 한자로 풀면 말 그대로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말합니다. 영화 ‘명량’에는 오타니 료헤이가 연기한 항왜 ‘준사’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는 실존 인물입니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도 정확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항왜라는 말은 투항한 일본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단순히 투항에 그친 게 아니라 조선군과 함께 조국 일본에 칼을 겨눈 왜군들도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명량이라는 영화 덕분에 많은 이들이 항왜를 알게 됐지만 사실 항왜는 임진왜란 때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조선 건국 이래로 왜구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늘 노략질을 일삼았고, 많은 백성이 그 피해를 입었죠.
이들을 물리치는 것이 조정에는 큰 숙제였는데 이들을 회유하는 ‘대왜정책’도 있었습니다. 조선에 몰래 건너와 사는 왜인들이 큰 피해를 야기하지 않는다면 묵인하였고, 심지어는 귀화를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왜정책은 왜인들에게 꽤나 호감을 불러왔고 상당수의 왜인이 조선으로 귀화했는데요.
조정에 이런 정책은 딱 임진년까지 계속됐습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은 대략 1만여 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야가’라는 왜장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제2 일본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던 그는 부산포에 도착하자마자 부하 3천 명을 이끌고 즉각 항복했습니다.
그는 직접 투항의 서를 써 ‘임진년 4월 일본군 우선봉장 사야선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라며 아주 오래전부터 조선을 마음 깊이 사모해 왔다는 것이 이유였죠. 바로 ‘김충선’입니다.
그가 남긴 ‘모하당문집’에는 그가 단순히 항복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요.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서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귀화한다’라고 밝힌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이유로 조선의 편에 서서 싸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지혜가 모자라지도 용기가 없어서도 무기가 무디지도 않았습니다.
22살에 귀화한 그의 지략은 대단했죠.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다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김충선이 있었다고 부를 만큼 대단한 활약을 펼쳤는데 그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는 전승의 장군이기도 합니다.
이에 감복한 선조가 그의 활약에 기뻐하며 종 2품의 가선대부 벼슬과 조선식 이름을 하사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김충선입니다. 그의 활약상은 뒤에서 조금 더 다루는 것으로 하고, 임진왜란 당시 항왜의 숫자는 기록으로도 남았습니다. 선조실록에는 수많은 일본 이름이 등장하는데 사고소우, 요시지로, 세이소와 같은 일본 이름은 물론,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처럼 조선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죠.
당시 실록에 등장하는 항왜의 수를 집계하면 모두 42건에 600명에 달하는데요. 1597년 5월 선조실록에는 도원수 권율의 간첩보고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왜인들의 시름이 큽니다. 항왜의 수가 이미 1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놓았을 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군거립니다.’라고 했던 기록도 실려있습니다.
항왜는 왜군의 용병술 약점을 조선군에 알리고, 스파이 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부분에서 공적을 세웠으며 조선 조정에서는 항복하는 왜군들을 의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선조는 ‘자네들은 투항한 왜병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과하게 대접해 준다고 불평해 왔다. 원래 과인이 항왜를 많이 유치하려 했지만, 자네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항왜들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죽을힘을 다해 적병을 죽이고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운다. 이들에게 모두 당상관의 직책을 내리고, 그다음은 은을 상금으로 하사하라.’라며 ‘항왜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자가 있으면 나와보라!’라며 불호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을 위해 싸운 항왜는 스스로를 조선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일선에서 싸우기를 원했다고 하죠.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살 땅이니 누구보다 자신들의 조선을 지키고 싶어 했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김충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세운 가장 큰 공은 아무래도 조총을 보급시킨 점을 꼽을 수 있을 텐데요. 그는 서양으로부터 일찍이 조총을 도입한 지방 출신인 데다 집안 대대로 각종 무기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무기 제조에 대한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의 가문에서는 조총 부대 지휘관도 배출했죠. 그러니까 김충선은 일본의 조총 개발 역사와 인연이 깊기 때문에 조총에 대한 구조 및 제조 기술에도 밝았던 겁니다.
조총에서 그치지 않고 화약의 제조에도 관여했는데요.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에서 조총은 신기한 무기였을 겁니다. 그간 활을 이용해 상대방을 무찌르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화약이 터져 나가 상대방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죠. 더구나 활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뻗어 나갈 수 있으니 여간 공포스러운 무기가 아니었는데요.
그래서 조선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조총을 구해 똑같이 만들어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김충선이 큰 역할을 했죠. 이순신과 나눈 서신에서 김충선은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고 나와 있는 점을 본다면 조선에서 조총 보급과 교련은 김충선이 전담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김충선이 조선으로 귀화한 후 세운 공은 대단합니다. 원래 김충선은 일본군 조총부대의 대장이었는데 부산진을 함락시킨 후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조선인이 되어 조선군 조총부대를 이끌었는데요. 그때까지 본 적 없는 조선인의 공세에 왜군은 상당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왜적이 점령한 18개 지역의 성을 탈환했습니다.
김충선의 공이었죠. 이후 그는 울산성 전투, 경주 이견대 전투 등 78번의 전투를 치러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는 항복한 왜장들과 함께 의령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는데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육지에서는 김충선이 연달아 승전보를 전해오자, 조선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또한 자신의 지휘관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섬멸하는 공을 세워 정 2품 자헌대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임진왜란 후에는 급속히 성장하는 여진족 세력이 국경을 침범하게 되자 자청에서 1603년부터 10년간 북방 국경 수비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맞아 이들을 진압하는 관군에 참여해 이괄의 부장 서아지를 잡아 죽이는 공을 세우기도 했죠.
또 병자호란 때는 왕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군사를 모아 후금의 군대에 맞서 적군 500여 명을 사살하기도 했습니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후금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우의 대의도 끝났구나’라며 대성통곡했다고 하죠.
하지만 청나라의 항의로 강제 해직되어 대구 우록동으로 낙향해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귀화한 후 진주목사 딸과 결혼해 슬하에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병조참판, 이조참판, 상호군, 부호군 등의 벼슬을 했고 이후 수많은 자녀가 조정에 진출해 명문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워낙에 전설 같은 스토리를 쓴 덕분에 일제강점기에는 그의 이야기를 조선이 조작한 이야기로 취급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실존했던 인물이고 그의 후손이 여전히 대구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일본이라는 국가, 일본인이라는 사람을 한 이미지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미워하는 일본인 중에는 김충선은 물론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해 조국에 칼을 겨눈 수많은 항왜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일왕의 암살을 모의하다 체포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선생이 있고, 그런 가네코 후미코뿐 아니라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을 변호했던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있고, 임시정부의 자금 마련을 위해 권총을 전달했던 나카지마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본인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일부 우익 일본인들이 나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 성숙해졌고,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이기에 한국을 위해 싸워준 이들을 기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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