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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을 코앞에서 놓친 왕자… ‘이것’으로 조선 왕을 협박했다고?

  • 지식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조선시대 왕이 될 수 있었던 왕자, 제안대군 이현은 제8대 왕 예종의 아들로, 1466년, 당시 세자이던 아버지 예종과 세자의 종5품 후궁인 소훈 한 씨 사이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당시 예종의 세자빈이던 장순왕후 한 씨가 인성대군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제안대군의 어머니 소훈 한 씨는 세자의 후궁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세자빈의 예우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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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68년, 세조가 중병을 이유로 왕세자에게 양위하여 예종이 즉위하게 되고, 당시 적장자이자 이복형인 인성대군이 1463년, 3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제안대군 이현은 원자로 책봉되어 왕위 계승 1순위가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 소훈 한 씨도 태상왕 세조의 지명으로 왕비에 오르게 되지만, 아버지 예종이 즉위한 지 15개월 만에 승하하면서 모든 것이 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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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원자 제안대군 이현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할머니인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그의 나이가 4세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세상을 떠난 백부 의경세자(덕종)의 차남인 자을산군 이혈(성종)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왕위 승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결국 성종이 조선 제9대 왕에 오르게 되고. 이듬해인 1470년, 이현은 제안대군에 봉해집니다. 당시 제안대군은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를 대접한다는 방계의 명분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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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안대군은 성종 5년, 증조부 세종의 적7남이자, 요절한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게 되면서 왕위 제1계승자에서 대군의 봉사손으로 추락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한명회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신권 강화에 맞서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제안대군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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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안대군의 첫 번째 부인은 사도시정 김수말의 딸로, 부부 사이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실록에 따르면 “김 씨는 언제 죽을 것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군은 부인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잔병치레가 심했던 부인 김 씨는 풍병을 얻어 거동이 불편했는데, 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자 제안대군은 성종에게 김 씨와의 이혼을 청하게 됩니다. 이에 고민하던 성종은 후사를 일찍 보고자 하는 제안대군의 친모이자 왕대비 안순왕후의 뜻을 감안하여 이를 허락하는데, 이때가 1479년, 대군의 나이 14세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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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첫 부인 김 씨와 이혼하고 박중선의 딸과 재혼한 지 3년 후인 1482년, 사간원 정언 정광세가 제안대군이 전 부인 김 씨와 은밀히 사통한다는 사실을 성종에게 보고해 논란이 일어나자 그 사실 확인과 처벌에 대해 논해지지만, 왕은 대군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를 들며 번번이 감싸는 바람에 무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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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같은 해에 대군부인 박 씨가 여종들과 동침한 사건이 알려지며 왕실이 발칵 뒤집어집니다. 형방 승지 강자평은 당사자인 여종 내은금, 금음덕, 둔가미를 추궁하였으며, 이들은 박 씨의 유혹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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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시어머니인 왕대비 안순왕후에게 보고되었고, 이에 대비전에서는 내관 안준경과 서경생을 보내 대군부인 박 씨를 직접 추궁하게 됩니다. 이때 부인 박 씨는 본인의 뜻이 아니라 여종들이 자신을 겁간하려 했으며, 그녀들이 자신을 어떻게 욕보이고 누명을 씌우려고 했는지 세세하게 진술하게 됩니다.

이에 우의정 홍응과 우부승지 강자평이 직접 의금부에서 여성들을 국문하여 결국 박 씨에 대한 모함이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성종은 이들에게 장형 100대와 유배형의 처분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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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결국 대군의 유모였던 금음물이 여종들을 동원한 자작극으로 밝혀졌으며, 제안대군이 전처 김 씨와 재결합을 원했기에 그녀가 벌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안대군의 개입 여부였지만, 유모 금음물은 그 부분을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기에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결론내리고 그녀를 변방의 관비로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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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의 추문이 불거진 같은 해,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안순왕후는 제안대군의 이혼 의사를 성종에게 전달합니다.

이에 성종은 박 씨의 누명이 벗겨진 탓에 별다른 허물이 없음을 들어 반대했고 신하들의 의견도 같음을 확인하지만, 왕대비 안순왕후가 며느리 박 씨의 불순함을 명분으로 내세우자, 어쩔 수 없이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혼을 허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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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485년, 성종은 아직 자식이 없는 제안대군의 새 혼인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대군이 성종에게 첫 번째 부인 김 씨와 재결합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되면서 왕실은 또다시 시끄러워지게 됩니다. 심지어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이 들어있는 내용이었는데요.

성종은 어이없어하며 거부 의사를 보이지만, 숙부인 선왕의 원자였던 제안대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상황에서 후사마저 끊기게 할 수 없다는 마음에 빚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들이 고집이 세고, 어리석고, 병도 있다는 숙모이자 왕대비인 안순왕후의 당부에 마음이 약해져 이를 공론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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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신하들은 첫 번째 부인 김 씨는 허물이 아닌 질병이 이혼 사유였고, 둘째 부인 박 씨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기에 문제가 되지 않으며, 김 씨의 질병이 완치됐음을 들어 찬성하자 성종은 혀를 차며 마침내 제안대군의 재결합을 수락합니다.

참고로 소박맞은 둘째 부인 박 씨는 안타깝게도 그 충격으로 얼마 안 가서 죽고 마는데, 그녀가 바로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의 누이이자, 월산대군의 부인 박 씨의 여동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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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안대군은 사촌형 성종에게 상소할 때 항상 언문(한글)으로 올린 탓에 승정원에서 수고스럽게도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여야 했는데, 이런 일련의 행동을 두고 멍청이인 척하여 목숨을 보전하려 한 계책이었다는 설이 많습니다. 제안대군의 혈통은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나, 효종 때 이석철(경선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종의 정통성에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언제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위치에 있었기에 적절한 바보짓으로 의심을 피하고 아이도 낳지 않아 혹시나 있을지 모를 역모에 엮이는 일을 피하기 위한 연극이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제안대군은 평소에는 멍청해 보였지만, 유교적 예법을 따라야 할 때는 그 복잡한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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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제안대군이 진짜 바보였는지, 연극이었는지는 수백 년간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중종실록>의 제안대군 졸기에서 사관도 당시 이런 소문을 실어가며 연극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고, 100여 년 뒤 <어우야담>에서 유몽인은 “제안대군은 역모에 휘말리는 걸 두려워해 바보짓을 하고 자손도 두지 않았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종 대에 만들어진 <패관잡기>에는 제안대군이 남녀 간의 일을 평생 알지 못해서 자손을 낳지 못했을 정도의 어리석은 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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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야 어찌 됐든 제안대군은 재혼 스캔들을 제외하면 딱히 망나니짓은 하지 않았고, 조선 최악의 피바람이 불었던 연산군, 중종 대에도 ‘아둔해서 왕위를 위협하지 않는 왕실 어른’으로 여겨지며 후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참고로 연산군을 홀린 여인으로 이름이 높은 후궁 장녹수도 그의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해서 그 집 종으로 살고 있었는데, 대군의 집을 방문한 연산군이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해 입궐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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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안대군은 연산군과 유일무이하게 친밀했던 왕실 어른으로, 연산군이 그에게 여자를 하사하기도 했지만, 대군 저의 있는 미모의 노비들을 자꾸 데려가는 바람에 조카인 연산군에게 삐친 일화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심지어는 1505년,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던 제안대군의 집에 뇌영원이라는 이름의 가흥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흥청은 연산군의 유흥을 위해 전국에서 소집된 예비 기생이었으며, 뇌영원은 궁궐에 들어가기 전 그들을 머물게 하는 임시 처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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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며 피바람이 불지만, 제안대군은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고, 이후에도 왕실 종친으로 존대받으며 평안하게 살다가 1525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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