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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악녀라고 불린 소용 조씨, ‘그녀는 어떻게 왕의 총애를 받았나’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소용 조씨( ?~1651년)는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의 후궁으로 일반적으로 소용 조씨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녀의 최종 품계는 종1품 귀인이기에 공식적으로는 귀인 조씨로 불립니다.

소용 조씨의 본관은 순창이었으며 아버지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조기, 어머니는 조기의 첩인 한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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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의 입궁은 처음부터 조정에서 문제가 됩니다. 그녀는 1630년(인조 8년) 여시(女侍)로 궁에 들어가게 되는데, 정식으로 사람을 뽑아서 궁에 들어간 것이 아닌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왔다 하여 행 부호군 이명준의 탄핵을 받게 됩니다.

이명준의 당시 탄핵안을 보면, 조씨가 정백창이라는 자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왔고, 이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이명준과 사간원에서의 상소를 인조가 물리치면서 해결되지만 이때부터 조씨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됩니다. 당시 그녀를 궁으로 들인 정백창은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의 형부였기에 조씨의 입궁은 인열왕후의 뜻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왕실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인열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서 6남 1녀를 낳을 정도로 남편과의 금슬도 좋았습니다. 남편 인조에게 항상 “살생을 하지 말고, 긴장의 경계를 풀지 말라”라고 조언할 정도로 현명했던 인열왕후가 후일 조선 최악의 후궁이라 불린 그녀를 들이게 된 계기가 된 사실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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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 조씨는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승은을 받게 되지만 그녀가 불운을 몰고 왔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1635년 음력 12월 9일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가 4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다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게 되자 다음 해인 1636년 2월 왕비의 조문을 위해 후금(청)의 사절단이 조선으로 오게 됩니다. 이때 후금은 청나라 건국(1636년 4월)을 앞두고 군신관계의 예를 요구하게 되는데 조선은 펄쩍 뛰며 이를 거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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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전해 들은 청 태종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1636년 12월 조선을 침략하는데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빠른 침입에 순식간에 고립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항전하게 되지만 끝내 패배하게 되면서 삼전도의 굴욕(1637년 음력 1월 30일)을 겪게 됩니다. 조선이 최악으로 몰린 이 시기에 소용 조씨는 최고의 기회를 잡게 됩니다. 그녀는 왕으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친 인조를 위로하며,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고 1637년 12월 종4품 숙원, 이듬해인 1638년 12월 정4품 소원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인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소용 조씨로 인해 새롭게 들어온 왕비인 장렬왕후와 다른 후궁들은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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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 조씨는 성품이 매우 엉큼하고 간사하였으며,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왕 앞에서 자주 모함하여 궁궐 안에 모든 사람이 그녀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 1643년에는 인조의 승은 상궁이었던 이정민이 궁녀 애향을 통해 소용 조씨를 저주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사실 소용 조씨가 이정민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저주물을 묻어놓고 그녀를 모함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소용 조씨는 인조의 장자였던 소현세자의 부인인 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1645년 청나라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소현세자가 돌아온 뒤에는 밤낮으로 인조의 앞에서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고, 세자 내외에게 누명을 씌우는 등 항상 둘을 모함하기 일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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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장 악독한 모습을 보여준 이 시기의 그녀의 품계가 정3품 소용(1640년 승품)이어서 그런지 후일 소용 조씨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돌연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당시 세자의 주치의로 침술을 행했던 의관 이형익소용 조씨의 어머니인 한옥의 집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의심스러운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청나라에서 서양문물을 접해 조선을 개혁시키기를 바랐던 소현세자를 친청파라 박대하고 견제했던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살의 흔적이 뚜렷했던 시신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를 서둘러 마쳤으며 의관 이형익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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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서는 소용 조씨와 독살이 의심되는 소현세자의 죽음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부검 결과와 함께 그녀가 평소 소현세자 내외를 모함하던 모습을 함께 적고 있습니다.

1645년(인조 23년)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소용 조씨의 세자빈 강씨에 대한 참소와 이간질이 더욱더 심해집니다.

결국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년)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소용 조씨는 세자빈 강씨가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게 합니다. 이 일로 인해 별당에 갇힌 강씨는 2개월 후 끝내 폐서인되면서 사약을 받았고, 소현세자의 왕손 3형제가 모두 제주도로 유배가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건의 전모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고, 단지 추측으로만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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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자빈 강씨가 죽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인 소위 전복 독살 미수 사건도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러한 큰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소용 조씨는 1645년(인조 23년) 정2품 소의가 되었으며 1646년 12월, 그녀의 소생인 왕자 이징이 숭선군으로 봉해집니다. 1647년(인조 25년)에는 소용 조씨의 장녀가 효명옹주에 봉해져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서파의 영수이자 당시의 권세가였던 김자점의 손자인 낙성위 김세룡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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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옹주는 소용 조씨의 장녀이자 그녀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1637년(인조 15년) 당시 궁인 신분이었던 소용 조씨는 승은을 받고 효명옹주를 낳게 됩니다. 병자호란 직후의 음울하고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늦둥이, 그것도 고명딸의 탄생은 인조의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인조와 소용 조씨는 효명옹주의 무병장수를 바라며 온갖 비방을 동원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부족함 없이 자란 옹주는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하는 당돌한 성격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옹주는 궐 안에 잔치가 벌어졌을 때, 이복 오빠 인평대군의 아내인 복천부부인 오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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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의 품계는 무계이고, 부부인은 정1품이기에 옹주가 상석이 맞지만 오씨의 남편 인평대군이 효명옹주보다 15살이나 많은 이복 오빠인데다 왕비 소생의 적통 대군이고, 오씨는 효명옹주에게 손위 올케라는 특수성이 있었습니다.

각자 왕실의 법도와 집안의 예법에 따라 자신이 위라 주장한 것이므로 일이 수습되지 않고 커지면서 인조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이때 인조는 딸 효명옹주의 편을 들면서 딸이 며느리보다 윗자리에 앉도록 하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효명옹주와 인평대군 부부의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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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인조 26년) 소용 조씨의 소생인 막내 왕자 이숙이 낙선군이 되면서 조씨 슬하의 세 자녀가 모두 작호를 받을 정도로 그녀와 그녀 일가는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심지어 소용 조씨는 인조와 두 번째 왕비인 장렬왕후를 이간질하여 장렬왕후를 경덕궁으로 내보내는 등 인조 재위 기간 내내 위세를 떨쳤습니다.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소용 조씨의 기세는, 인조가 사망하면서 꺾이기 시작합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이 즉위를 하게 됩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소용 조씨와 간신 김자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도 막상 왕위에 오른 효종이 자신들과의 관계에 거리를 두자 소용 조씨와 김자점은 매우 서운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들의 입지마저도 줄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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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던 김상헌·송준길 등 청서파가 집권하면서 소용 조씨는 김자점과 함께 그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됩니다.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정책에 반대하다가 거듭 양사의 탄핵을 당하게 되면서 결국 1650년 초 탄핵을 당해 영의정에서 파직당하며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에 앙심을 품었던 김자점은 유배지인 홍천에서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청에 밀고하였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전라남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게 됩니다. 당시 김자점은 자신의 아들 김련, 김식, 손자 김세룡, 김세창 등과 역모를 꾀하였는데 그의 목표는 아마도 청이 침공하여 혼란한 틈을 타서 효종과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뒤에 새로운 왕을 내세워 다시 권력을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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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소용 조씨의 장자인 숭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틀어지자 효명옹주의 부마이자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1651년(효종 2년) 11월 소용 조씨가 왕대비 장렬왕후와 자신의 며느리인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궁중 저주 사건”이 발각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건은 평소 며느리 숭선군부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소용 조씨가 효명옹주의 여종인 영이를 숭선군의 첩으로 삼으려 하면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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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불만을 품은 숭선군의 부인이 자신의 이모인 왕대비 장렬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장렬왕후가 영이를 불러 이를 꾸짖자, 당황한 영이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다가 소용 조씨가 장렬왕후를 원망하며 무당 등과 수상한 일을 하고 있다고 실토하게 됩니다. 이 사실에 놀란 장렬왕후가 이것을 효종에게 알렸고, 효종은 영이와 영이가 언급한 무당 등을 국문을 하게 되는데 이때 김자점의 반역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해 12월 이영(李暎)과 신호(申壕)가 자신들의 장인이자 소용 조씨의 사촌인 조인필이 김자점과 서로 내통하였으며, 반역의 기미가 있다는 사실을 조정에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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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궁중 저주 사건과 관련하여 소용 조씨의 사촌인 조인필에 대한 국문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이에 겁을 먹은 이영과 신호가 이들의 음모를 먼저 밝힌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궁중 저주 사건과 반역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건의 중요성은 커졌고, 모든 대신들이 국청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효명옹주의 몸종인 업이는 효명옹주가 옷소매 속에다 사람의 뼛가루를 담아서 궁궐 및 인평대군의 집에 뿌렸고, 그 외에 다른 더럽고 흉한 물건도 많이 묻었다고 실토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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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이에 그치지 않고, 효명옹주가 임금을 없애고 낙성위 김세룡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는 진술까지 하면서 더욱 파장이 커지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대신들은 소용 조씨와 효명옹주의 작호 삭탈과 엄한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효종은 번번이 거절 하였고, 결국 소용 조씨의 딸인 효명옹주에게는 별다른 죄를 묻지 않고 소용 조씨에게는 자결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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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아버지 인조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임을 감안하여 폐서인하지 않고 장례를 종1품 귀인으로서의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합니다.

이렇게 조선 최고의 악녀 중 하나로 불린 소용 조씨는 그녀를 총애한 인조의 죽음과 함께 급격하게 몰락하였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편 살아남은 효명옹주는 남편 김세룡, 시조부 김자점이 사형당하자 작위를 박탈당하고 김세룡의 처라 불리게 되었고 연좌되어 유배를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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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1655년에 효종의 배려로 유배지를 교동으로 옮겨 그곳에서 유배 중이던 동생들인 숭선군, 낙선군과 함께 살게 되었고, 1658년에 유배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이후 숭선군과 낙선군은 효종은 물론 생질 현종과 종손 숙종의 보호하에 왕실 어른으로 상당히 우대를 받게 되지만 효명옹주는 어머니 소용 조씨의 저주사건에 연루된 당사자였기에 평생을 감시 속에서 살다가 1700년(숙종 26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었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자식도 두지 못한 채 평생을 외롭게 지냈으며, 구차하게 살던 와중 그녀에 대한 업보였는지 생존한 인조의 5남 1녀 중에 가장 장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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