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제1 왕녀 화억옹주]
화억옹주(1717년~1718년)는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장녀로 효장세자의 친누나입니다. 그녀는 1717년(숙종 43년) 영조가 아직 왕자인 연잉군이었을 때, 그의 첫사랑 정빈 이씨와 낳은 첫째 딸로 이름은 향기롭고 고운 꽃이라는 뜻의 향염(香艶)입니다. 화억옹주가 태어났을 당시 영조는 24살이었기에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첫 자식을 상당히 늦게 본 셈인데, 그래서 더욱더 애틋하고 귀한 딸이었을 것입니다.
1718년(숙종 44년) 3월 9일,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영조(당시 연잉군)의 거처인 창의궁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한 달 뒤인 4월 8일에 겨우 한 돌이 다가온 화억옹주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영조는 비통한 심정으로 어린 딸을 보내주게 됩니다. 아직 어머니 숙빈 최씨의 상중이었기에 영조는 바로 다음 날 외할아버지의 산소 옆에 서둘러 딸을 묻었다가 8월에 가서야 어머니의 묘 옆에 겨우 자리를 잡아 옮겼습니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되었지만 옛날에는 열악한 의료 수준으로 인해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 죽은 자식들은 성인처럼 장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이가 8살이 되지 못한 경우에는 갖추어야 하는 의례조차 없었는데 이는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태종도 두 살짜리 왕자가 죽자 따로 장례를 치르지 않은 바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영조가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었던 일은 꽃과 새 문양의 고운 비단첩에 글을 남겨서 기리는 일뿐이었습니다.
“내가 뒤늦게 이 딸을 얻으니 매우 기쁘고 사랑하였다. 뜻하지 않게 무술년(1718년) 4월 초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겨우 한 돌이 지났다.”
<유녀향염광지>
세월이 흘러 1773년(영조 49년) 10월 7일, 80세의 영조는 자신의 첫째 딸 향염을 화억옹주로 추증하고 무덤의 비문을 직접 써서 세웠습니다. 자식들 가운데 딸이 많았던 영조는 모두 12명의 딸(옹주)을 두었습니다. 그중 7명만이 관례를 치르고 혼인할 수 있었고 나머지 5명은 모두 요절했습니다. 요절하지 않고 혼인까지 치른 딸들은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였는데 요절한 딸 중에 유일하게 향염만을 추증했으니 이는 첫째 딸을 향한 영조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영조의 제2 왕녀 화순옹주]
화순옹주(1720년~1758년)는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의 딸로 어머니는 좌찬성(추증) 이준철의 딸인 정빈 이씨였으며 그녀의 친 오라버니가 추존왕인 진종(효장세자)이고 친언니가 화억옹주입니다. 영조의 첫사랑이라고 알려진 정빈 이씨는 영조가 연잉군이었을 때에 그의 첩이 되는데 당시 경종의 동궁전 나인이었던 정빈 이씨가 어떻게 궁을 나와 영조의 승은을 입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721년,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의 후계자로 결정되어 왕세제로 책봉되면서 정빈 이씨는 세제궁에 속한 후궁인 종 5품 소훈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정빈은 그 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는 1720년(숙종 46) 화순옹주가 태어난 바로 다음 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2살 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녀는 실질적인 장녀로서 영조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됩니다.
6살이 된 1725년(영조 1년)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화순옹주로 봉해집니다. 1732년(영조 8년) 옹주의 결혼 적령기가 다가오자 영조는 혼례를 위해 가례청을 설치하였고 한 달 후 화순옹주는 13세의 나이로 이조 판서 김흥경(후일 영의정)의 아들 김한신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이후 부마 김한신은 월성위로 봉해지고 동갑내기였던 화순옹주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오위도총부도총관, 제용감제조를 지낸 부마 김한신은 키가 크고 인물이 잘생겼으며 총명하기까지 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글씨를 잘 써서 왕이나 왕비의 시호를 정할 때 생전의 업적과 덕행을 칭송한 글인 시책문을 많이 썼으며 도장을 제작하는 기술인 전각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귀한 신분임에도 평소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생활할 정도로 인격적으로도 성숙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1758년(영조 34년) 부마 김한신이 39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영조는 부마의 죽음에 슬퍼하며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의 부마 해창위 오태주의 예에 따라 김한신의 장례를 거행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화순옹주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7일 동안 음식을 끊으며 부마를 따라가려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된 영조는 궁궐에서 나와 옹주에 집에 직접 행차하여 그녀를 달래고 설득했으며 이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습니다. 제발 살아달라는 아버지 영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화순옹주는 음식과 약을 먹어보려 했지만 마음에 병이 깊어 곧 토하고 맙니다.
이후에도 화순옹주는 계속해서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그렇게 10일째 되던 날 영조는 화순옹주가 결국 병이 나서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후 부마 김한신이 세상을 떠난 지 14일 만에 화순옹주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영조가 화순옹주의 상을 방문해 실의에 빠져있자 이를 본 예조 판서 이익정이 화순옹주를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정려를 할 것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고 굶어 죽었으니 효에 모자람이 있고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하는 것은 자손에게 법을 주는 도리가 아니며 이는 폐단이 될 수 있는 일이기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현대에서는 화순옹주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죽음으로서 남편을 따라갔다는 열녀 이데올로기보다는 그녀의 외로웠던 인생사를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화순옹주는 어린 시절에 친형제들(화억옹주, 효장세자)과 어머니(정빈 이씨)를 잃어서인지 혈육에 큰 애착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영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궁궐에서 홀로 외롭게 자라게 됩니다.
혼인하여 출가한 이후 남편 김한신을 만나 행복이라는 보상을 받게 되지만 자식이 없는 상태에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어진 그녀는 여생을 외롭게 보내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화순옹주의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부마 김한신과 합장되어 있으며 1984년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훗날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고모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그녀를 열녀로 봉하고 열녀정문을 세우면서 화순옹주는 조선 왕녀들 중 유일하게 열녀가 됩니다. 한편 화순옹주의 묘소가 있는 충남 예산의 용궁리에는 그녀에 대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화순옹주는 자수를 아주 잘 놓았는데, 하루는 아버지 영조를 위해 곤룡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곤룡포를 완성한 뒤에 어떤지 품을 보려고 남편 김한신에게 입어보게 했는데 이때 지나가던 사도세자가 왕만이 입을 수 있는 곤룡포를 김한신이 입은 모습을 보고 오해해 격분하여 옆에 있던 벼루를 들어 그를 향해 내리쳤습니다. 이로 인해 김한신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고 화순옹주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에 사도세자를 원망하며 굶어 죽게 됩니다.
영조는 크게 슬퍼하며 딸과 사위를 위로하고자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기로 합니다. 이후 명당이라고 해서 장지로 정한 용산 앵무봉 아래에서 옹주 부부의 장사 지내려고 땅을 파니 엄청난 물이 쏟아졌습니다. 당연히 묫자리로 쓸 수 없었는데 김한신의 집안에서 이 자리가 3대에 걸쳐 판서가 나올 자리라고 고집했기에 200자 떨어진 곳의 땅을 다시 파게 됩니다.
다행히 이곳은 물이 다 빠져나가 화순옹주의 묘를 쓸 수 있었기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 물이 모여 연못이 생긴 자리가 바로 왕자지(王子池)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지는데 현재는 이 연못에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볼 수 없다고 합니다.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은 ‘화순옹주홍문’이며 1976년 충남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화순옹주와 부마 김한신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집안을 잇기 위해 부마 김한신의 형인 김한정의 3남 김이주가 옹주의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후 김이주는 해평 윤씨 윤득화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4남 김노경의 아들이 바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로 화순옹주에게는 증손자가 됩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