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승우 씨와 지성 씨가 주연을 맡았던 2018년 영화 <명당>을 기억하시나요? 땅의 기운을 점쳐 인간의 운명을 바꾸려는 지관 박재상과 세상을 뒤집고 싶은 몰락한 왕족 흥선은 2명의 왕이 나올 천하명당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 명당을 얻기 위한 치열한 암투가 큰 줄거리를 형성하는데요.
“땅의 기운이 대대손손 영향을 미친다”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이 풍수지리 영화는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저는 꽤나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 세대 또는 그 윗세대 어른들에게는 조상의 묏자리는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묏자리 하나에 후대가 길이 번성할 수도, 풍비박산 날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묏자리를 구할 때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여겼죠.
초중등 학교 시절 배웠던 ‘지리’라는 과목을 통해 여러분들도 ‘배산임수’라는 용어가 익숙하실 텐데,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강, 시냇물, 연못 따위의 물을 내려다보거나 물에 닿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지형이 옛날부터 명당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수도인 개경과 한양은 전부 배산임수에 근거해 채택된 도시이죠.
사실 철 지난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배치에도 이 풍수지리적인 습관이 묻어 있습니다. 풍수지리에서 3대 명당으로 꼽는 것이 뒤로는 산을, 앞으로는 물을 두는 ‘배산임수’, 주인이 되는 건물이 높고, 부속 건물이 주인 건물보다 낮아야 하는 ‘전저후고’,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게 배치하는 ‘전착후관’입니다.
이 중 ‘전착후관’이 아파트에 스며 있는데, 현관문을 열고 좁은 현관을 지나 넓은 거실이 나오는 배치입니다. 문을 열면 반드시 좁은 현관을 두고 있죠.
어쨌든 이러한 ‘풍수지리’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이 풍수지리에 근거한 믿음 때문에 민족의 정기가 끊길 뻔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경술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한일합병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고 한반도 지역 전부를 일제에 귀속시킴으로써 35년간의 치욕적인 식민 지배를 시작합니다. 경술년에 발생한 국가적인 치욕을 우리는 ‘경술국치’라 부르죠.
그런데 일각에선 이를 두고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이 해석에 공감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 들어본 독특한 해석이라 공유합니다.
지진과 태풍에 시달리는 섬나라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일본의 몇몇 지도자들은 한반도를 통해 대륙 진출의 꿈을 펼치려던 것이 아니라, 아예 일본 본토를 한반도로 옮기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선 한반도를 일본 제국에 편입시킨 후 수도를 포함한 모든 정치, 경제 기반을 한반도로 옮겨 가고, 종래는 자연재해가 연속되는 일본을 버리고 한반도로 이사하려 했다는 것이죠.
그런 이유로 현재의 서울을 ‘경성’이라 이름 지었는데, 여기에서 ‘경’이란 수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수도 도쿄는 ‘동경’이라 부르는데, ‘동쪽의 수도’라는 의미입니다. 진짜 수도를 한반도 서울로 만들고, 현재 도쿄는 지방 정부로 격이 낮아지는 것이죠. 한 국가의 수도가 2개일 수는 없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에는 ‘관폐대사’ 등급인 신궁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도쿄의 1급 신궁과 같은 격이며, 메이지 신궁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입니다. 관폐대사를 건설한다는 것은 일왕이 직접 찾아와 참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1939년 7월 31일에는 일왕이 직접 방송에서 충남 부여에 신궁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죠.
어쨌든 여러 이유를 들어 일제가 본토를 버리고 한반도로 이주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일제 시대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일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말이죠.
춘향과 이몽룡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춘향전’의 배경이 된 전북 남원에는 ‘노치 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치 마을은 등산가들 사이에서는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국내에서 유일한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두고 보통 ‘우리 민족의 혼이 흐르는 정기의 상징’이라고 부릅니다.
무려 1,400km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이기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 치자면 척추와 같은 곳이죠.
그런데 지난 2013년 8월 2일, 뜨거운 여름날 노치 마을 앞에는 돌연 이제껏 본 적 없는 특이한 반원형 돌덩이 5개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반원형의 돌들은 운봉읍의 한 가정집에서 정원석으로 사용되던 돌인데, 어쩌다 중장비를 동원해 1.5km 떨어진 노치 마을까지 옮기게 된 것일까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노치 마을 주민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중반입니다. 의사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죠.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일본군이 잔뜩 몰려와서는 마을 앞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4m의 방죽을 파고, 그 안에 ‘너트’ 모양의 돌덩이 6개를 묻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나중이 되어서야 드러났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노치 마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마을로, 노치 마을 앞은 덕음산에서 지리산 고리봉으로 연결되는 곳입니다. 그 부분만 인간의 신체로 비유하자면 목에 해당하는 위치입니다. 만약 우리 신체에서 호흡을 담당하는 목에 너트를 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호흡 길은 좁아질 것이고, 종래는 숨이 막혀 제대로 된 생활이 불가능할 겁니다.
일제가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이 점을 노린 것인데요. 즉, 자신들이 식민 지배하려는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백두대간에서 목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에 ‘목조임석’을 설치해 정기를 단절시키려 했다는 것이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돌을 설치하고 나서 지리산에서 3일간 천둥·번개가 치고 하늘이 울었다고 합니다. 광복을 맞이하고, 한국 전쟁을 겪고, 먹고 사느라 바빠 뇌리에서 잊혔던 이 돌이 발견된 것은 약 1995년으로, 당시 노치 마을 야산을 경지 정리하던 중 발견됐습니다.
원래 6개가 있었으나 이 석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밭주인이 5개를 자신의 집 정원으로 옮겨 정원석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1개는 그 자리에 두었으나 현재는 사라진 상황입니다. 1910년 중반에 방죽에 파묻었던 돌이 어쩌다 노치마을까지 옮겨지게 된 것일까요?
여기에는 ‘백두대간 환경 대탐사팀’의 역할이 컸습니다. 2004년경 녹색연합이 주관한 백두대간 환경 대탐사 팀은 노치 마을에서 그간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1910년대 일제가 이 마을에서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백두대간과 지리산의 맥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노치 마을을 둘러싼 덕음산은 남쪽으로는 지리산의 고리봉으로 연결되는데, 노치 마을에서 고리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에 일제가 너트형 잠금장치를 매장했다는 겁니다. 이 부근은 마을 주민들이 울대라고도 부르는데, 그 지점이 사람의 목울대와 비슷한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지리산이 머리이고, 이 부근이 목에 해당하는 것이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둘러 이 석물을 끌어내 숨통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결국 남원문화원은 제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집주인을 설득해 석물 5개를 전부 노치 마을로 옮겨 오도록 했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너트를 절반으로 자른 형태의 석물은 가로 120cm, 세로 95cm, 두께 40cm가량인데, 반원 형태여서 이를 서로 연결하며 원을 이루기 때문에 그 지름이 100cm에 이르는데요. 물론 이를 원위치로 옮겨두더라도 돌들의 배치 방법을 달리 해, 애초 일제가 의도했던 목조임석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이 풍수지리라는 것은 ‘장풍득수’의 준말로, 풀이하면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라는 뜻인데요. 이러한 사상은 동아시아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어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다면 바람을 열고 물을 막아 이를 악용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땅의 기운이 강한 우리 한반도에는 국토 곳곳에 혈침이 박혔는데요.
조선시대도 혈침이 박혔으나, 그 수량으로 보자면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았습니다. 영원한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또는 독립을 이끌 만한 인재가 태어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쇠말뚝을 박고, 시멘트 기둥을 세우고, 혈자리에 불을 태우고 재를 채우거나 맥을 자르는 등 그 방식도 다양했죠.
그 장소들은 하나같이 지맥이 있다고 알려진 산속 바위나 흙, 바닷가의 정기가 빠져나오는 곳 등 다양한데요. 일제강점기에 그들이 몇 개의 쇠말뚝을 박았는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 남방군 총사령관 ‘야마시다 도모유키’가 처형 직전, “정기가 강한 한국 땅 365 혈구에 혈침을 박았다.”라고 양심선언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에 1960년대부터 민간인 또는 민간단체로부터 쇠말뚝 뽑기가 시작됐고,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 당시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전국 명산에 박힌 쇠말뚝 118개를 뽑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인지 여부를 떠나 하나하나 뽑혀 나갈 때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켜켜이 쌓인 가슴속 응어리도 함께 뽑혀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때로는 과학적인 근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니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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