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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리면 무당 찾던 처참한 ‘한국 의료계’에 기적 일으킨 ‘미국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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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재미주의입니다. 미국의 한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한 노인이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의사와 간호사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중얼거림은 대표적인 치매 증상이라 의사와 간호사라면 전혀 놀랄 만한 행동이 아닌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이 영어가 아닌 한국말이었고, 대부분이 한국을 그리워하는 듯한 말들이었는데… 정작 그 말을 하고 있는 치매 노인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치매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모든 기억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한국만큼은 잊지 못했던 이 기묘한 미국 노인의 정체가 밝혀지자, 한국인들은 눈물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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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시스템이나 기술이 너무나 잘 갖춰져 있어 놀라는 인프라가 있습니다. 심지어 외국에서 한국에 ‘이것’만 이용하기 위해 관광을 오기도 하는데요. 바로 의료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 인프라는 세계 최고라고 불리고 있을 만큼 잘 되어 있기로 유명한데요. 한국은 미국과 독일에 이어 의료 관광 선호국 3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암에 대한 치료 기술은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 외국인들도 한국에서 치료받기 위해 많이 찾고 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병이 나을 수 있다거나 자국에서보다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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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한국인들은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되지…’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겠지만, 한국 의료가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한국 의료의 이미지는 큰 병에 걸리면 그냥 죽음밖에 없다는 이미지였습니다. 

약 70년 전,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은 세계 최악이라고 불릴 만큼 열악했습니다. 6·25 이후 쑥대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먹을 것도, 기술도 없는 나라에 의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을 리가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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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한국에서 암에 걸린 환자들은 치료받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도무지 답이 없자,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무당까지 찾을 정도로 한국의 의료는 열악했습니다. 

그런데 1954년 암울했던 한국 의료계에 한 줄기 빛이 내려왔습니다. ‘데이비드 존 실’ 박사가 한국의 의료 선교사로 온 것인데요. 아내와 함께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던 박사님은 전주 예수병원에 들어가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설대위 선교사 설대위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 감동적인 이야기 감동적인 영상 감동적인 동영상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한국의 의료 인프라는 생각보다 더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치료가 시급한 암 환자들의 치료 진행이 잘 안되고, 민간요법이나 무당에 의지하다 보니 그들의 상태는 더 심각해지고 있었는데요. 제대로 된 의료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박사님은 밤이 지새며 환자들을 돌보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많은 환자가 병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전국에 이런 입소문이 났기 때문인데요. “외국인 의사가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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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의료 기술로 치료할 수 없었던 환자들을 척척 살려내다 보니 입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은 그냥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외과 수술로 유명한 튜레인 의과대학에서 수석 졸업을 할 정도로 미래를 촉망받는 의사였으니 우리나라의 한 줄기 빛 그 자체였습니다. 

정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환자가 몰려들었는데요. 이런 상황이 되자 박사님은 한국의 부족한 의료 인프라로 인한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님은 그 한계를 자신이 허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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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암 환자 등록 사업을 시작했고, 두경부학회를 설립하여 암 환자 치료와 연구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박사님은 한국 최초로 코만도 수술을 도입한 사람이었는데요. 코만도 수술은 입안에 생긴 구강암을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두경부 영역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외과 수술이죠. 

박사님의 제자와 의료진들의 말에 따르면 박사님께 치료받고 싶어 하는 환자들은 넘쳤고, 박사님은 한 명이라도 환자를 더 치료하기 위해 점심은 빵으로, 저녁에는 우유에 날계란을 섞어 마시며 수술대에 오르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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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16시간 40분이나 걸렸던 코만도 수술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겨우 2시간 반만 눈을 붙인 후 직접 환자 상태를 살펴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하는데요. 

넘치는 환자와 부족한 인력 탓에 박사님은 과로로 인해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저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온 것일 뿐인데, 한국에서 하고 있는 그의 행동은 한 명의 외국인 선교사를 넘어서 한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의인처럼 보였습니다.설대위 선교사 설대위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 감동적인 이야기 감동적인 영상 감동적인 동영상

도대체 왜 한국인들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지 주변에서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어 적당히 쉬어가면서 하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묵묵히 한국인들을 살릴 의료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1969년에는 박사님의 업적이 인정받아 예수병원장으로 임명되셨는데요. 그리고 박사님은 ‘데이비드 존 실’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 ‘설대위’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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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대위 원장님은 여전히 부족한 한국 병원 인프라를 신속히 구축하기 위해 미국과 독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예수병원을 호남 최대의 현대식 통합병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한국 의료계의 엄청난 발전이었지만, 설대위 원장님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는데요. 

의료 혜택으로부터 낙후된 농어촌을 대상으로 의료 보건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역 사회 보건 의사, 간호사, 건강 요원 등 의료 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요. 한국에 수많은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던 것이죠.설대위 선교사 설대위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 감동적인 이야기 감동적인 영상 감동적인 동영상

그런데 제자 중 일부는 설대위 원장님의 뜻과 달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해외로 나가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설대위 원장님은 슬픔에 잠겨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떠나면 한국의 환자는 누가 보나요?” 

설대위 원장님은 뛰어난 실력뿐만 아니라 인품도 갖추고 있어 제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설대위 원장님은 의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최선의 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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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대위 원장님은 1954년부터 1990년대까지 무려 36년 동안 한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1990년 정년 퇴임을 하고, 다시 조국인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요. 촉망받던 젊은 의사가 노신사가 되어 조국에 돌아가게 된 것이죠.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그의 미국 집 문패에 설대위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 의료계에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돌아가셨지만, 미국에서 그는 응급실 당직 의사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합니다.설대위 선교사 설대위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 감동적인 이야기 감동적인 영상 감동적인 동영상

그래도 그의 한국 의료 발전을 위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미국에 돌아가서도 기부금을 모아 20억 상당의 최신형 암 치료기를 한국으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생을 낯선 나라 한국을 위해 헌신한 설대위 박사님은 안타깝게도 말년에 치매를 앓으며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기억을 병에 의해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으로 인해 설대위 박사님이 낯선 나라 한국을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는데요.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치매 환자가 된 그는 끊임없이 한국말을 하며 한국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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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사님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한국을 그리워하다가 2004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한국에도 그의 소식이 전해지며 많은 이들이 슬픔에 잠겼는데요. 

하지만 세월이 오래 지난 만큼 여전히 우리 한국인들은 그가 남겨준 훌륭한 의료 인프라 속에 건강하게 살고 있음에도 그의 존재를 잊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한국의 영웅입니다. 이번 이야기로 여러분의 가슴속에 한국의 영웅, 설대위 박사님의 존재가 새겨졌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재미주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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