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재미주의입니다. 한때 한국은 전 국민의 80% 이상이 ‘이것’에 점령당하면서 전 세계 감염률 1위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불명예스러운 1위였는데요. ‘이것’의 정체가 기생충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생충 감염률 1위 대한민국” 안타깝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현대화가 늦게 되면서 지금처럼 청결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빨리 서구 문화를 받아들였던 일본에서는 한국인은 더럽다는 안타까운 인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한국의 위생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기생충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죠.
그런데 이런 환경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민들의 인식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이렇게 감염률이 심각한데, 기생충의 심각성에 대해 크게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민간에서는 이런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회충이 좀 있어야 애들이 밥도 잘 먹고 잘 자란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은 한 어린 소녀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어린이들의 기생충 감염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는데요. 1960년대 한국의 어린이들은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때는 키즈 카페 같은 놀이 시설이나 변변찮은 놀이터도 없었지만, 학교를 마치면 학원이 아니라 들이고, 밭이고 친구들과 모여 신나게 뛰어놀았습니다. 행복도가 최고치였죠.
하지만 아이들이 뛰어놀던 환경은 불안감이 최고치였습니다. 인분 비료가 가득 사용된 밭, 그곳에는 기생충이 바글바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는 이것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죠.
그렇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1963년 전북 전주의 한 병원으로 심각한 복통을 호소하는 9살 소녀가 실려 왔습니다. 손쓸 틈도 없이 소녀는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요.
소녀의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간 것은 소녀의 장 속에서 발견된 엄청난 양의 기생충 때문에 발생한 장폐색이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사망한 소녀의 몸무게가 20kg이었는데, 소녀의 장 속에서 발견된 회충의 무게가 5kg, 약 10,063마리였습니다.
전 세계가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요. 이런 비극이 터지고 난 후 한국 정부는 기생충의 심각성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파악해 보니 한국의 상황은 정말 심각했는데요. 한 해에 기생충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고, 해외로 파견된 우리나라 광부들도 기생충 감염으로 인해 격리 수용을 당하는 등 한국 정부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기생충학 박사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1964년 ‘기생충박멸협회’가 출범합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기생충과의 전쟁은 금방 끝나겠다고 생각했는데, 면허를 땄다고 해서 베스트 드라이버인 것은 아니죠? 당시 한국의 전문가들은 대부분이 장롱면허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가난과 싸우는 것도 바빴던 우리 한국이 기생충을 박멸하기에는 경험도, 인력도, 시설도… 무엇 하나 충분한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도무지 진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전문가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데요. 그들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생각지도 못했던 ‘그’가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세계적인 기생충 전문가이자 일본 기생충 예방 회의 사무국장 ‘구니이 조지로’ 씨가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 기생충박멸협회는 무작정 그를 찾아갔습니다. 약속부터 잡는 절차 같은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오로지 기생충을 박멸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몸부터 움직인 것이죠.
기생충박멸협회 사람들은 국제 행사에 가고 있던 구니이 조지로 사무국장을 붙잡고 “우리나라에는 당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구니이 조지로 씨는 기생충박멸협회의 열정적이고 간절한 요청에 감복해 직접 한국의 기생충학 교실을 방문하고, 일본 기생충예방 회의 정보까지 한국에 공유해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건 일정에도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구니이 씨의 일행들은 그가 실종된 줄 알고 찾아 헤매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구니이 조지로 사무국장의 소중한 도움으로 우리나라는 일본과 비슷한 방식으로 전국적인 기생충 박멸 운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 2회, 26년 동안 기생충 검사를 시행했다고 합니다. 학생 다음으로는 지역 주민, 그리고 군인까지 집단검사의 영역을 점차 확대해서 실시했습니다. 말 그대로 기생충과의 전쟁이었습니다.
1960~1990년대까지 학교에 다니신 분들이라면 ‘이것’에 대한 추억이 반드시 있으실 텐데요. ‘채변봉투’입니다.
믿고 빌린 친구 ‘변’에서 기생충이 발견되었던 추억, 개똥을 주워 갔다가 기생충 폭탄, 꾸지람 폭탄까지 맞았던 기억, 검사 결과가 나오면 친구들 앞에서 강제로 ‘기밍아웃’ 당했던 수치심은 덤… 어른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고만 생각했던 채변봉투가 한국 기생충 감염률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일등공신이었죠.
한국인의 몸속에 숨어 있는 기생충을 지옥까지 따라가서 잡겠다는 광기로 기생충 0% 운동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검변에서 기생충이 발견되면 다음은 투약, 구충제로 기생충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약도 기생충박멸협회가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 선정했다고 하는데요. 기생충은 정말 잘 퇴치하되, 부작용은 적고 먹기는 편해야 하며, 가격은 저렴한…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조건을 가지고 약들을 이 잡듯이 뒤져 최선의 약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생충을 찾고 약으로 잡는 것만으로는 기생충 박멸의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여전히 당시 한국인들은 기생충 감염이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국가는 이런 환경부터 싹 뜯어고쳤습니다. 비료를 분뇨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공중화장실과 공동 우물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법을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요. “해충이 좀 있어야 애들이 밥도 잘 먹고 잘 자란다!”라는 말이 더 이상 장난으로라도 나오지 않도록 기생충의 위험성을 알렸고, 저렴한 기생충 약을 시중에 풀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기생충 박멸 노력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광기, 그 자체였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 K-광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84.3%였던 기생충 감염률이 1997년 2%대로 낮아진 것이죠. 기생충박멸협회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이제는 ‘한국 건강협회’로 이름을 바꾸어 국민들의 건강에 힘쓰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한국은 기생충 청정국이 됐다고 하며 이야기가 끝날 줄 알았지만, 의외로 한국은 아직까지도 기생충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환경이 너무나 더러워서 기생충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너무 잘 먹고 잘살다 보니 기생충에 노출되고 말았다고 하는데요.
1990년대 말 1%까지 떨어졌던 감염률이 오히려 2000년대에 들어서 4~5%까지 증가했습니다. 주요 감염 원인들은 한국인들의 소득 수준 향상으로 즐겨 먹게 된 생선회, 육회였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죠? 기생충 감염률이 80%여도 꿈쩍도 하지 않던 나라가 이제는 5%도 높다며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기생충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이제는 예전처럼 나라에서 때가 되면 검사해 주고, 기생충 약을 지급해 주는 게 아니죠. 지금은 국민들 스스로가 기생충 약을 먹으면서 관리해야 하는데, 은근 까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요즘은 워낙 위생적인 환경이다 보니 까먹었다고 해서 바로 기생충에 감염되는 것은 아닌데요. 그래도 어린이가 있는 집, 반려동물이 함께하는 집, 그리고 회를 즐겨 먹는 습관이 있는 분은 기생충 약을 챙겨 먹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은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기생충 감염 1위국이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만든 영화 ‘기생충’이 탄생한 나라입니다. 지금까지 재미주의였습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