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러시아 국영 매체 러시아투데이는 푸틴 대통령이 한 학교를 찾아 학생들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대통령이 학교를 방문하는 것도 좀 특이한 일이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푸틴의 등 뒤에 보이는 칠판이었습니다. 칠판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태극기 세 글자가 적혀 있었고, 벽에는 한국 전통의상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의 포스터가 부착되어 있었죠.
푸틴 옆에 선 선생님도, 푸틴의 말에 귀 기울이는 학생들도 금발인 것으로 유추해 볼 때 한국인이 다니는 학교는 아닙니다.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고등학교였죠. 보통 러시아는 9월 1일은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로 ‘지식의 날’이라 부릅니다.
아마도 고등학교에서 진행 중이던 한국 문화 교육 시간에 푸틴이 교실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주 단편적인 사진이지만 이를 통해 러시아의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적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비단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2016년이면 아직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이었고, 이후 7년간 한국의 위상은 급격하게 상승했습니다. 인도의 경우 네루대학교에서는 한국어 학과 정원 30명 모집에 총 10만 명이 지원해 3,300:1이라는 경이로운 경쟁률을 기록했고, 현재 전 세계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기 중인 대기자가 무려 11,000명을 넘어섰다고 하죠. 이는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미국의 ‘현대어 언어 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58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어 학습자 수는 53,500%라는 경이로운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1958년 26명에 불과했던 한국어 학습자 수는 2016년 13,936명으로 증가했는데 절대적인 수치에서 스페인어 등에 비해 부족하지만, 그 증가율만큼은 경이로운 수준입니다.
게다가 이를 2006년부터 10년으로 한정시키면 전 세계 주요 언어 중에서 유독 한국어만 학습자 수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지금으로 치자면 시진핑에 해당하는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한글 도입을 최초로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지난 200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세계지식재산기구총회에서 183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한국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습니다. 국제기구로는 최초로 한국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한 것인데 이는 국제특허로 출원된 특허 내용을 알리기 위해 이제 모든 국제특허는 한국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공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영어를 비롯해 일본어, 중국어, 아랍어 등 8개 언어가 사용됐지만 한국어가 추가되면서 전 세계에서 높아진 한국어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약 3,000개라고 합니다. 다만 소리, 즉 언어는 존재하지만, 이를 표기할 도구, 즉 문자가 없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알려졌는데 이에 UN은 언어 표기를 위해 한글을 보급하기로 했습니다.
한글 보급의 첫 번째 사례는 잘 알고 계시다시피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찌아찌아족’입니다. 원래 찌아찌아족은 아랍 문자를 변형시킨 ‘자위 문자’와 라틴 문자를 사용해 글자를 표기했었으나 라틴 문자는 모든 소리를 기록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가령 ‘파’나 ‘ㅍ’ 발음을 표기할 수 없죠.
그래서 전 세계 모든 문자 중 확장성이 가장 넓은 한글을 찌아찌아족에게 보급해 자신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역사와 신화, 문화, 지식 등을 기록할 수 있도록 했죠. 한국어가 아니라 한글을 보급했다는 점에 주목하시면 됩니다. 2009년 처음 보급을 시작했는데 그보다 앞서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려던 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의아하게도 그 국가는 중국입니다.
그간 역사 속에서 한국의 역대 왕조는 중국의 신하국 또는 아우국을 자처하며 조공을 바쳐왔는데 중국에서는 오히려 한글의 도입을 시도했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서 말이죠. 전 세계 최초로 한글의 우수성을 간파하고 한글 도입을 추진했던 인물은 19세기 후반 위안스카이라는 인물입니다.
위안스카이는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23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으로 파견되었고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2년간 조선에 머무르며 3명의 조선 여인을 첩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간 조선에 머문 그는 완전한 지한파가 됐는데 중국으로 돌아간 후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을 지냈습니다.
중화민국은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에 건국된 현존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1948년까지 중국 대륙 전체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니까 1912년 위안스카이라는 인물은 현재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통치하는 방대한 영토를 통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1949년 선거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에 패배하면서 그 세력과 지지자들로 구성된 150만 명이 중국 대륙에서 도망쳐 중화민국을 이어가 대만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중국 대륙에 남아 ‘중화인민공화국’을 설립해 중국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어쨌든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부임하면서 12년 만에 목격한 중국인들의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거리에 나가보면 눈에 밟히는 것이 사람인데 그들 중 대부분은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문맹이었죠. 아무래도 쓰기도 어렵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한자로 인해 거의 대부분 국민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이는 사회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답으로 한글 도입을 주장했죠. 그는 한글이야말로 문맹률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쉬운 글자였고, 중국인들이 한자보다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세종대왕이 어리석은 이도 한나절이면 익힐 수 있다던 자신감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조선에서도 그와 안면을 튼 한글 학자 호머 헐버트도 그가 실권자로 있는 청나라 정부에 한글 도입을 촉구하면서 이는 현실이 될 뻔도 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서 글자를 깨치게 하자며 한글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신하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망한 나라의 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죠. 중화의 자존심에 더해 당시 조선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망한 국가였기 때문에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것인데 만약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13억 중국인이 한글을 사용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뻔도 했습니다.
어쨌든 일단 반대에 부딪힌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좌도 불완전했기 때문에 한글 도입안을 잠시 보류해 두었는데 이런저런 사건이 터지고 1916년 요독증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이 계획은 묻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한글 도입안은 그로부터 40년 뒤 다시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당시 중국의 실권자였던 류사오치에 의해 되살아났습니다. 우리에게는 유소기라고도 잘 알려진 그는 마오쩌둥 이후 1959년~1968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올랐던 대단한 권력자였는데 그는 제2인자 시절 위안스카이와 마찬가지로 문자 개혁운동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범으로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한글을 도입해 중국인들의 문맹률을 낮추고자 실제로 한국에 학자들을 보내기도 했죠.
하지만 그가 이 운동을 열심히 추진하던 와중에 김일성이 남침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이 참전하는 소용돌이에 빠지면서 이 한글 도입안은 또다시 사라졌죠. 그가 죽은 후 미공개 편지 사본이 공개되었는데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2월에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아직까지 중국 문자 개혁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몽골, 조선, 베트남은 이미 문자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관점에 따라서 그들의 어문 개혁은 우리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들은 우리의 한자를 들여가 사용했으나 그중 조선의 한글은 이미 오랫동안 쓰여오기도 했습니다. 조선대사 이국원은 한자 대신 한글만 사용해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유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어문 연구자들이 조선의 문자 개혁 경험을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학생들이나 학자들을 이들 나라에 보내 배우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자 개혁을 위한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중국 대표단은 실제로 북한과 베트남을 방문했는데 그 결과 파견된 사람들은 두 나라의 문맹률이 낮다는 점에 크게 감동받아 중국도 문자 개혁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습니다. 다만 4개월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계획 역시 유야무야 됐죠.
만약 중국 주석을 지낸 류사오치가 강력하게 추진했었다면 실제 중국 13억 인구가 한글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 그러니까 당시 청나라에 한글을 도입하도록 권유했던 인물이 바로 호머 헐버트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어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조선에 살게 됐는데 그의 한글 사랑은 정말 대단했죠.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배우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일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고 기록했는데 조선인들이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자신이 오히려 선구자로 나서기로 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 끝에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민필지’라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교과서입니다.
그는 사민필지 서문에서 ‘생각건대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며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숨김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거대한 중국 인구가 한글을 쓰는 모습을 꿈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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