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반도는 세계 3대 금강을 소유했을 정도로 금부자 국가였습니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세수 확보를 위해 외국인에게 금광을 운영할 수 있도록 광업권을 내준 적이 있는데 그때 개발된 금광이 평안북도 운산에 ‘운산금광’입니다. 운산금광은 개발 후 바로 40년간 80톤의 금이 쏟아지면서 세계 3대 금광의 지위를 누리기도 했는데 이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가져간 이가 바로 호러스 알렌입니다.
구한말 선교사로 방한해 조선 왕실 고문과 미국 공사, 그리고 사업가로 활동한 인물로 고종이 가장 아끼던 미국인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직후인 1896년 4월, 고종은 그에게 왕비 조카를 살려준 은혜를 갚는다며 운산금광 채굴권을 선물해 미국에 운산금광 개발권이 넘어가게 되는데요.
그해 11월 금광개발을 위해 미국 광산 기술자 13명이 제물포항에 도착했는데 그 일행에는 아버지를 따라 함께 방한한 앨버트 테일러라는 20대 젊은 청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앨버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23년 뒤 1919년, 그해 조선에서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공교롭게도 하루 전날 앨버트와 영국의 연극배우였던 아내 메리는 아들 브루스를 얻었습니다.
메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앨버트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병실로 간호사들이 뛰어 들어와 그녀의 침대 밑에 종이 뭉치를 숨기고는 황급히 사라졌는데 뒤이어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이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에 대해서는 함구했습니다. 바로 3.1독립선언서였죠.
이 사실을 알게 된 앨버트는 즉시 동생 빌을 불러 신발 뒤축에 종이 뭉치를 숨겨 한국을 빠져나가게 했고, 이로써 전 세계 모든 신문에 한국의 3.1독립선언서가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실릴 수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의 불행한 국가에서 일어난 일에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그가 바로 앨버트 테일러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46년 뒤 천문학적인 돈을 모았다가 강제추방 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임무를 자세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옛날부터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는 엄청난 크기의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 지배로 수탈당하던 1923년 이 은행나무 옆에는 빨간 벽돌로 지은 서양식 주택이 지어졌는데 이 주택의 주인은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입니다.
한때 이 건물은 ‘붉은 벽돌집’이나 ‘서양 사람 집’ 또는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불렸는데 2017년 8월 8일 대한민국 정부는 이 주택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기 시작했죠. 바로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입니다. 흔히 ‘딜쿠샤’라고도 불리는 이 건물에 살았던 부부에게는 아주 길고 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1896년 11월 아버지를 따라 제물포항에 도착한 앨버트 역시 광산 기술자였습니다.
알렌이 고종에게 선물 받은 운산금광은 미국기업에 전부 매각하면서 본격적으로 채굴이 시작됐는데 현금 100만 원을 담은 상자를 2개씩 등에 실은 소 40마리가 부지런히 광산과 항구를 오가며 돈을 쓸어 담았죠. 1939년 미국기업이 철수할 때까지 걷은 순이익이 150억 원이라고 하니 얼마나 수익성이 좋은 광산이었는지 감이 오시죠?
당연히 아버지와 함께 운산금광을 채굴한 앨버트도 큰돈을 벌었는데 3년 뒤 아버지 제임스 테일러가 사망한 후에도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 뿌리를 내렸는데요. 그러다 직접 금광을 개발한다며 충남 천안으로 떠나 사금광산을 개발했는데, 바로 직산금광입니다.
원래 직산금광은 일본인이 인수해 채굴하고 있었는데 채굴량이 예상보다 적자 1911년 미국 자본에 채굴권을 팔아넘겼고 그 채굴권을 구매한 이가 바로 앨버트 테일러였죠. 그와 그의 아내 메리는 일본에서 만났습니다.
영국 출신의 연극배우였던 메리 테일러는 인도를 주 무대로 활동하다 1916년 잠시 일본 요코하마에 공연차 들렀는데 바다에서 수영하다 익사 위기에 놓였었습니다. 그때 그를 구해준 이가 바로 앨버트 테일러였고, 메리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호박목걸이를 선물로 주고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앨버트는 인도로 건너가 메리에게 청혼했는데 그들이 함께 살기로 한 장소는 다름 아닌 서울입니다.
사실 앨버트는 한국에서 벌써 20년 가까이 생활하며 한국의 정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러한 스토리가 메리 테일러가 쓴 ‘호박목걸이’라는 자서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가 앨버트로부터 받은 청혼 목걸이를 책 제목으로 한 호박목걸이는 1917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살이를 한 기록을 담은 책인데 여기에는 재밌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서울에서 살던 어느 날 키우던 셰퍼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던 메리는 개가 갑자기 지나가는 한국인의 소매를 물어뜯어 당황했습니다. 개에 물린 노인도 그녀도 모두 당황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한국인들이 그녀에게 모여들더니 ‘개털 주시오! 개털 주시오!’를 외쳐댔습니다.
그녀는 한국인들이 여름철에는 개를 보신용으로 먹기 때문에 개가죽을 벗기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도망쳤죠. 사람들은 집까지 쫓아오며 계속해서 ‘개털 주시오! 개털 주시오!’를 외쳐댔고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반려견이 이 포악한 무리에게 죽을까 봐 엄청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 브루스가 사람들에게 개털을 잘라주자 그제야 사람들은 절을 했고, 브루스 역시 그들에게 맞절한 후에야 물러났습니다. 나중에야 조선에는 개에게 물린 상처에는 그 개의 털을 태워 상처에 발라야 낫는다는 미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런데 한국에 살며 그녀는 일제의 만행을 전부 목격했고 그에 대한 기록이 전부 책에 남아있습니다. ‘일본이 이 장례식을 통해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면 큰 착각이다. 자기 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저세상으로 가는 모습을 침통하게 지켜보는 한국인들의 가슴속에는 증오와 절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만세운동이 실패하고 수천 명이 살해당했을 뿐 아니라, 자유의 마지막 상징이던 황제마저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산 후 병실에서 3.1운동을 목격했고, 고종의 장례 행렬을 지켜봤습니다. 호박목걸이에서 그녀는 그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간간이 비명소리와 총성이 들렸다. 만세! 만세! 하고 외치는 커다란 함성이 계속됐다. 만세! 그 소리는 거의 포효와 같았다.’
그녀의 남편 앨버트 테일러는 메리가 출산하기 전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할 기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UPI통신원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해외언론의 조선 통신원들은 자신의 사업을 하며 부업으로 기자 일을 했는데 브루스가 태어나던 날, 그러니까 3.1운동 하루 전 2월 28일에 이미 앨버트는 UPI통신원이었습니다.
그는 막 아이를 출산한 메리를 만나러 세브란스 병원으로 왔다가 침대 아래에서 독립선언문을 발견했는데 그녀는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 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는 즉각 동생 윌리엄을 불러들여 독립선언문을 신발 뒤축에 숨기고 한국을 빠져나가도록 했고, 윌리엄은 이를 도쿄에서 전 세계로 타전시켰습니다.
한국의 3.1독립선언서가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입니다. 그러니까 외국에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최초로 보도한 이가 바로 앨버트인 겁니다. 어쨌든 외신들은 이를 토대로 ‘한국이 독립을 선포하다. 한국 전체가 움직인다. 한국인이 평화적으로 저항한다.’ 등으로 3.1운동을 보도하게 된 것이죠.
독립선언문을 성공적으로 전한 후 앨버트는 다른 통신사의 제안을 받아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하게 되는데 바로 AP통신입니다. 이 사건 역시 그를 통해 해외에 알려지게 된 것이죠. 벽안의 외국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이들은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추방당했습니다.
1941년 말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진 일본은 조선 땅의 외국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는데요. 앨버트 역시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가 서대문형무소 근방 감리교신학대학에 감금되고, 메리는 행촌동 딜쿠샤에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이 기간 그녀는 일본 경찰의 조롱과 감시를 받으면서 먹을 것이 없어 개 사료로 죽을 쒀 먹으면서 이 상황을 견뎌냈다고 하죠.
앨버트가 감금되자 메리는 UPI통신원 경력이 문제 될까 염려해 그의 기사가 담긴 책을 전부 불태워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도산 안창호 등의 한국인 독립투사들이 3.1운동을 보도한 외신을 모아둬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결국 일제는 1942년 5월 앨버트 부부를 미국 송환선에 실어 한국에서 영구추방 시켜버렸습니다. 미국으로 추방된 후에도 앨버트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메리는 이 내용을 책에 쓰고 있습니다.
‘우린 추방당한 다음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았어. 매일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 앨버트는 태평양 너머에 자기 나라가 있고, 자기 집이 있다고 늘 얘기했단다. 그러면서 만약 자기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죽거든 자기의 재를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지. 힘들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잡았는데, 앨버트는 그날을 얼마 앞두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단다. 난 앨버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어렵게 한국으로 떠나는 미국 군함을 얻어 탔어. 그리고 저 아래 한강이 보이는 양화진 묘지에 앨버트를 묻었지.’
2016년 2월 28일. 딜쿠샤에서 태어난 브루스의 손녀 제니퍼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브루스의 재를 딜쿠샤 은행나무 밑동에 뿌렸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이 깃든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의 ‘딜쿠샤’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앨버트 가족의 아름다운 시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딜쿠샤는 종로구 행촌동에서 원형을 보존한 채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꼭 종로에 갈 기회가 되시거든 딜쿠샤에 한 번쯤 들러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앨버트 가족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