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수정주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기존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재해석하려는 관점이나 사상을 뜻하는데, 이 분야에서 일본은 특히 능합니다. 그것도 아주 특출나죠.
일본에서는 20세기 초 발생한 식민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형태로 역사수정주의가 행해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이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 ‘조센징’이라 부르는 재일교포입니다. 식민주의와 전쟁, 차별의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고통에 사과는커녕 오히려 일본인이 역차별받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까지 제기하고 있습니다.
재일교포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일본이라는 지리적인 특성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한 범죄가 하나 있습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역사상 손에 꼽히는 대재앙이 발생합니다. 일본 관동 지역에서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해 도쿄를 포함한 관동 지역 전체를 흔든 이 지진은 일본 열도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우리가 관동 대지진이라 부르는 바로 그 재난입니다.
최대 10분간 지속된 이 지진은 약 10만 명의 사망자를 불러왔고, 실종자 수도 그에 못지않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1995년 발생한 7.2 규모의 고베 대지진으로 현대식 내진 설계를 적용한 건물과 도로가 무너져내렸다는 점에서 볼 때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감이 오시겠죠?
그런데 열도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자 일본 내무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계엄령을 선포해 버립니다. 계엄령은 국가비상시 국가의 안녕과 공공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모두 군사령관이 행사하는 제도인데요. 이로 인해 전국에서 64,000명의 육군 병력과 전국에서 소집된 경찰력이 결집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찰 비상 연락망을 통해 유언비어가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와 같은 괴소문이 퍼진 겁니다.
이런 괴소문에 현혹된 자경단과 경찰관들은 조선인 그리고 조선인으로 의심받는 중국인과 일본인까지 학살을 시작합니다. 단 4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희생된 조선인이 최대 6,6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죠.
그런데 이는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계략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지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인이라는 공동의 악을 만든 겁니다.
당시 가장 많은 조선인이 희생된 곳은 아라카와 강변으로 약 120여 명의 조선인이 무참히 희생당한 후 버려진 곳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끔찍한 만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듯했습니다. 2022년 3월 25일, 드라마 한 편이 공개되기 전까지 말이죠.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2022년 3월 25일, 애플TV에서 공개한 <파친코>라는 드라마는 그 여파가 대단했습니다. 해외 언론은 연일 명작, 수작, 걸작 등의 극찬을 쏟아냈고, 시청자들 반응도 대단했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이민진’ 작가의 원작 소설 <파친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7살이던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합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간단합니다. 일본계 남편을 만나 결혼한 그녀는 남편이 도쿄로 발령받으면서 4년간 도쿄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재일교포라 불리는 수십 명의 일본인을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1989년부터 창작했던 조선계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초안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쓴 작품이 바로 원작 소설입니다.
사실 한국인이기는 하지만, 7살에 이민을 떠난 그녀가 재일교포에 대한 소설을 쓴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기는 한데요. 그녀가 2017년부터 만난 재일교포는 그녀에게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동포’, ‘교민’, ‘교포’ 등등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부르는 다양한 용어가 있는데, 그중 ‘교포’라는 단어는 슬픈 단어입니다. 이미 그 자체로 ‘더부살이’ 또는 ‘얹혀산다’라는 서러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그중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엄청난 숫자의 조선인들을 공장으로, 탄광으로, 해외로 강제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한 1945년 이후 다양한 이유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일본에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죠. 그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을 ‘재일교포’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 피를 가졌지만 일본에 살기 때문에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인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차별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민진 작가는 <파친코>라는 소설의 배경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선택해 관동 대학살, 강제징용 등의 슬픈 역사와 재일교포라는 존재의 굴곡진 삶을 조명했습니다.
덕분에 소설은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BBC 등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고, 오바마 전 대통령이 직접 추천하기도 했죠.
그리고 애플TV가 이를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는데요. 드라마로 제작된 <파친코>는 여러 면에서 관심을 끌었습니다.
우선 그간 만들어졌던 많은 일제강점기 드라마와는 달리 미국에서 출간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미국의 자본이 미국 제작사를 통해 미국인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미국 콘텐츠’입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의 대부분은 주로 한국어이고, 다음이 일본어, 그다음이 영어입니다. 영어의 비중이 상당히 낮은 이 콘텐츠를 애플이 직접 제작한 겁니다.
또 하나는 인류사에 스마트폰을 최초로 등장시킨 초대형 하이테크 기업인 애플이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것 역시 특이했습니다.
2007년 아이폰을 발표한 날, ‘애플TV’라는 셋톱박스를 출시하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완전히 장악하기로 했죠. 그러나 넷플릭스에 밀려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고전하다가 직접 드라마 제작에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선택된 것이 <파친코>입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파친코>의 제작비는 1,000억 원입니다. 회당 금액으로 환산하면 1회당 125억 원인데, HBO의 대작 <왕좌의 게임>의 시즌당 평균 제작비가 1억 달러입니다. 이를 한 편으로 환산하면 <파친코>와 크게 차이 나지 않을 만큼 애플TV가 잔뜩 힘을 준 것이죠.
애플이 현금 부자 기업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1,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시리즈에 무턱대고 투입한 이유는 그 작품성에 매료됐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작년 중반까지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관심을 받았음에도 <파친코>는 일본 내에서 거의 소외당하다시피 했습니다. 일본이 배경인 미국 드라마인 데다 일본에서 지명도가 꽤 높은 이민호, 윤여정 등의 한류 배우가 주연급으로 출연했고, 자국 상품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만 아이폰만큼은 예외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내 아이폰 점유율은 50%를 넘습니다.
일본이 사랑하는 애플이 1,000억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했다면 분명 화제가 됐을 것이고, 대단한 인기를 끌었어야 맞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선입니다.
하지만 애플은 일본에서 홍보 활동을 포기했습니다. 아마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일본의 반발을 우려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애플의 일본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는 <파친코>의 노출을 최소화한 대신 한국, 태국, 싱가폴, 호주 등의 국가에 집중했죠.
그랬음에도 이를 본 일본 네티즌들은 SNS에 “완전 허구”, “사기”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했고, 몇몇 네티즌들은 “한일합병이 한국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을 줬다…”, “한국은 일본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후진국이었을 것”과 같은 황당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드라마 때문에 서서히 잊혀져가던 슬픈 역사 그리고 일본이 그렇게나 감추고 싶었던 ‘관동 대학살’과 같은 사건이 드라마를 통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현재 시즌2가 제작 중인 상황에서 얼마 전 다시금 <파친코>가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게 됐는데요.
지난 1월 15일, LA에서 열린 ‘제28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에서 <파친코>는 최우수 외국어 드라마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를 두고 외신은 “눈부신 한국 서사시”, “파친코를 영원히 보고 싶다”, “한 여성의 회복력을 그린 보석 같은 작품”, “여성의 생존력과 가족의 끈끈함을 담은 가슴 벅찬 이야기와 비참한 시대상을 모두 보여 준다…” 등의 호평을 쏟아냈습니다.
2023년 올해는 관동 대학살 100주기가 됩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일본의 진상 규명과 사죄 요구는커녕 최소한의 추념식조차 없이 사실상 관심을 꺼버렸습니다. 1월 30일 외교부와 주일본대사관에 따르면 올해 관동 대학살 100주기와 관련한 정부 차원의 추념 행사 계획은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됐는데요.
외교부는 “우리 정부는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포함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일본 내 동향을 주시하며 수시로 파악하고, 일본 측에 과거를 직시할 것을 촉구해 오고 있다.”라면서도 “특정 사업 내역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밝혔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 그 사건에 대한 개입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생각 있는 일본 변호사 연합회가 2003년 자체 조사를 통해 당시 일본군과 자경단에 의해 자행된 범죄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과 진상 조사를 권고했죠.
관동 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 김종수 집행위원장은 “90주기 때부터 정부가 나서 달라고 꾸준히 요청해 왔지만, 보수나 진보 정권을 떠나 단 한 번의 추도식도 하지 않은 것은 국가로서 매우 부끄럽고 해외 국민에게 무책임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던 아라카와 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추도비가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우리 국민도, 자이니치도 아닌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비석으로, 반대 세력에 훼손당할까 봐 사유지에 모금을 통해 건립한 것입니다.
비석을 세운 단체는 ‘봉선화’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일본의 시민단체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창가였던, 심지어 1940년 일제에 의해 가창 금지령에 내려진 노래 ‘봉선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일본인들에게 희생당했으나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버려 일본인들에게 위로받아야 하는 슬픈 역사를 우리도 버려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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