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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의 ‘칭기즈 칸’, 한국의 전무후무한 예술 개척자 ‘백남준’

  • 지식

한때 스포츠 신문 및 연예 매체에 쉴 새 없이 등장하던 용어가 있었습니다. ‘하의 실종’이라는 단어였죠. 조금 짧은 옷을 입은 여자 연예인들 사진에는 죄다 ‘하의 실종’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연예인을 시작으로 스포츠 선수, 치어리더까지 여성들이 조금만 짧게 옷을 입으면 여지없이 ‘하의 실종’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런 제목이 붙은 기사에는 기본적인 클릭 수가 보장됐기 때문에 너도나도 사용했었죠.

그런데 연예인들이 어차피 외적으로 비춰지는 모습이 중요한 직업이고, 치어리더들도 어느 정도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노출을 감행해야 했지만, 여기 미국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하의 실종을 선보였던 한국인이 있습니다, 남자고요.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무늬뿐인 하의 실종이 아니라 팬티까지 모두 벗어 던진 남자였습니다. 그랬지만 미국 대통령도, 한국 대통령도, 전 세계 그 어느 누구도 그 남자를 비난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를 예술 또는 재치 있는 위트로 받아들였죠. 이 남자의 위상이 그랬습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외환 위기와 함께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후 곧장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합니다. 1998년 6월 9일, 백악관에서 진행된 정상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클린턴과 긴밀한 협의를 이어 갔고, 그날 저녁에는 귀한 귀빈들을 초청해 만찬이 열렸죠. 그리고 이 자리에 한 한국인이 초청됐습니다. 그 남자는 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치열한 투병 생활 끝에 가까스로 회복해 다시금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중이었는데, 백악관 만찬에 당당히 초청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한 후, 몇 마디 나누던 중 멜빵바지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그는 진짜로 하의 실종이 됐습니다. 팬티도 입지 않은 그의 중요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클린턴 대통령의 당황한 모습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김대중 대통령의 애써 점잔을 빼는 모습, 그 옆에서 귀빈을 맞이하던 힐러리 클린턴의 모습이 전부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그러나 경호원들도 정말 당황한 것인지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한국인이 바지를 입혀 주고 나서야 상황이 일단락됐습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뇌졸중에서 완벽히 회복하지 못해 몸이 불편해서 발생한 실수라고 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클린턴 대통령의 추문을 비꼬기 위해 과감하게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라는 점을 말이죠. 그다음 날 쏟아지는 전화에 그는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아내에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백악관 국빈 만찬이라는 게 평생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기회인데 이왕 갔으면 뭔가 해봐야지”라고 말이죠.

전 세계 최고 권력자 앞에서 당당히 권력자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을 가진 남자, 그는 ‘문화계의 칭기즈 칸’이라 불리는 한국인 백남준입니다. 1932년 7월 20일,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현재로 말하면 소위 금수저도 아닌 다이아몬드 수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백낙승’은 일제시대 가네보의 후신으로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였던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홍콩을 무대로 하는 무역상이었으므로 어마어마한 부를 손에 쥐었죠.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백윤수’는 조선시대 국상을 당했을 때 만조백관이 있는 상복과 제복을 도맡아 제조하던 섬유 업자로 종로 5가와 동대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 이상이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백남준은 섬유업계의 대부격인 집안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소위 재벌 중의 재벌가였습니다. 당시 조선 반도를 통틀어 딱 2대에 불과한 캐딜락 중 1대가 백남준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매일 그걸 타고 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가정의 특성상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 때문에 그 역시도 장차 훌륭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결정적으로 아버지와 인연을 끊게 된 것은 그가 도쿄대 미학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됩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사업보다도 누나의 피아노 레슨 시간에 어깨너머로 배우는 피아노가 좋았고 경기중학교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웁니다.

그의 음악 선생님은 전 동아일보 사장, ‘오재경’의 부인인 피아니스트 ‘신재덕’ 선생이었고 그녀는 그에게 피아노뿐 아니라 작곡, 성악까지 광범위하게 음악을 가르쳤죠. 그렇게 그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현재 성악가에 해당하는 상학과에 진학할 줄 알았던 그가 미학과에 입학하면서 아버지는 그를 남의 아들 보듯 했고 결국 그는 고단하고 외로운 예술가의 길로 접어듭니다. 하지만 유복했던 그의 가족의 파탄 나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1950년 전쟁도 잘 버텨냈던 그의 가족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육군을 이끌고 일으킨 쿠데타에 무너져버렸죠. 할아버지부터 쌓아온 재물은 부정 축재라는 명목으로 지목되어 모조리 몰수되어 버립니다.

지난 1997년 9월 18일, 백남준은 자신에게 베토벤보다 더 강렬한 명성을 가졌다고 평가한 독일에서 독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괴테상을 수상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를 ‘존 케이지’처럼 새로운 음악의 개척자라고 평가했죠. 20대 시절, 독일에서 유학을 시작한 그가 오히려 베토벤보다 더 존경받는 예술가로 유명해진 겁니다. 독일 유학 시절 그는 그의 삶을 바꾼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입니다. 그의 음악을 만나 백남준의 예술 인생은 혁명적으로 달라지죠.

1952년, 존 케이지는 ‘4분 33초’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이 곡은 좀 특이합니다. 4분 33초 동안 존 케이지는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고 공허함, 관객들의 웅성거림, 기침, 바람 소리를 하나의 음악으로 생각해 그 자체를 하나의 곡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악이란 음표와 옥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음악이 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죠. 그래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절대로 같은 곡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자리, 그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곡이 달라지니까요. 어쨌든 그의 곡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가 드디어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존 케이지의 연주를 직접 듣고는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마치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죠. 존 케이지의 전위적인 연주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은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선불교 등 동양적인 문화 배경을 재발견하게 되고, 이러한 미적 깨달음을 최신 기술과 결합시키는 혁명적인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된 겁니다. 참고로 백남준이 유명하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을 테지만 그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잠시만 알아보겠습니다. 1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치열한 투병 생활 이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 그의 두뇌는 여전했습니다. 오히려 투병 이후 더욱 빛났죠. 1997년 9월, 베토벤보다 더 존경받는 독일에서 독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괴테상을 수상합니다. 독일에서는 그를 존 케이지에 버금가는 새로운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하고 있었죠.

그리고 1998년에는 일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교토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0년, 구글 첫 페이지에는 TV를 색다르게 배치해 구글이라는 글자를 써 첫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이는 백남준의 78주년을 축하하는 특별한 생일 선물이었죠. 그동안 구글은 반 고흐, 미켈란젤로, 뭉크, 샤갈 등 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아티스트들 작품으로 로고를 만든 적은 있었지만, 한국인 아티스트를 대표작으로 로고를 만든 것은 처음입니다. 이는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만큼 그가 창시한 ‘비디오 아트’라는 분야가 예술계에서는 대단한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그는 원래 행위 예술가였습니다. 우리가 가끔 보는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히고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은 백남준이 창시한 행위 예술입니다. 그는 머리카락과 손, 넥타이에 먹물을 묻힌 후에 이를 붓처럼 사용해 바닥에 깔린 종이 위를 기어 다니면서 선을 그려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죠.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1964년, 뉴욕에서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행위 예술가였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 예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기도 했고, 1967년에는 누드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 경찰이 샬롯을 체포한 사건은 여전히 유명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백남준은 뉴욕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이 아닌 기획만 일삼는 B급 예술가로 치부됐죠. 그러나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행위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도 인지도가 쌓여나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백남준의 행위 예술이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별것 아닌 것으로 느껴질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미술계의 흐름을 본다면 그가 얼마나 앞서 나간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7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예술이란 그림이나 조각 등 정적인 것에 머물렀죠. 그런데 80년대 이후 독특한 무대 연출이 빛을 발하는 패션쇼나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 제대로 된 무대 연출이 사랑받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의 퍼포먼스 예술로 보기 때문에 현대 예술에서 퍼포먼스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죠. 그러니까 백남준은 행위예술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시기에 이미 그것을 세상에 등장시킨 겁니다. 어쨌든 그의 퍼포먼스에 TV가 등장한 것이 그즈음인데요. TV가 일상에 등장한 1960년대, 백남준은 TV가 대중 예술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시합니다. 화면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뿐 아니라 그 자체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입체 조형물로도 활용함으로써 당시에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이죠.

그가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 TV는 그저 시청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영상을 전달하는 단순한 역할을 했는데 백남준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에 텔레비전과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리고 그는 현재 화상 회의 시스템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컬러 비디오 전화를 통해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라면서 그의 예술 작품에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리고 꿈을 담았습니다. 어쨌든 그의 행위 예술에 TV가 등장하면서 그의 설치 예술이 지상파 TV에 방영되는 등 점점 유명해졌죠.

결국 뇌졸중을 극복한 후에 더 획기적인 작품들을 수없이 내놓으면서 “오히려 뇌졸중이 그의 예술가적 기질을 더 활성화시킨 것이 아니냐”라는 감탄 어린 탄성이 나왔습니다. 한때 한 기자가 백남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만 활동하느냐고 말이죠. 그는 “문화는 무역 같은 것이라 수입보다는 수출이 더 필요합니다. 저는 한국의 문화를 외국에 수출하는 문화 상인입니다”라는 명답을 내놨습니다. 전 세계 예술 분야의 큰 족적을 남긴 백남준이라는 인물은 현재 시대에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카메라, 화상 회의 등을 이미 앞서서 예견한 인물로 유명한데요. 기회가 되면 그 예술 작품이 어떻게 미래에 구현됐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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