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는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도시입니다. BC 57년에 건국된 후 약 1,000년의 시간 동안 56명의 왕이 다스렸던 신라의 수도였으니까요.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수도였던 만큼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과 같죠.
그런데 신라의 역사는 527년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 해에 신라의 23대 임금인 법흥왕이 불법을 공인해 본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경주에는 현재도 석굴암 등의 수없이 많은 불교 문화재가 남아 있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절은 아마 중국의 소림사일 텐데,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단연 경주 불국사입니다. 10원짜리 동전에 그려진 다보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최소 50대 이상의 분들이 기억하는 1만 원권 지폐 도안도 원래는 석굴암과 불국사였습니다. 대통령의 서명까지 받아 공고까지 나왔지만, 불교를 두둔한다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발행이 취소되며 세종대왕 도안이 정식으로 채택됐죠.
그런데 불교 문화재의 보고라 불리는 경주에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불국사보다 더 유명한 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현재 경주시 구황동에 ‘절터’라고 안내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전설 속의 절, ‘황룡사’입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신라시대 경주의 ‘명동’이라 불리던 황룡사는 경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진흥왕은 20살이 되던 553년에 새로이 궁궐을 지으려 궁궐터를 알아보던 중 현재 구황동을 낙점했는데, 그 터에서 누런 용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신라의 왕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불교를 이용했는데, 절을 세우거나 궁궐을 세우는 것 모두 왕권을 높이는 훌륭한 수단이 됐죠. 이에 황룡이 나타난 이 자리를 귀하게 여겨 절을 짓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17년 만에 ‘황룡사’라는 이름의 절이 완성됐습니다.
현재 경주시 ‘구황동’이라는 지명도 ‘황’ 자가 들어가는 사찰이 9개 있다고 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완공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 왕이 철 57,000근, 금 30,000분으로 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냈는데, 이 배가 신라 땅에 닿았습니다. 이것을 재료로 불상을 만들게 되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금당을 지었죠.
그로부터 약 100년 뒤 선덕여왕 12년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각 층에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는 9층 목탑을 만들어야 한다.”라며 선덕여왕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80m 높이의 목탑을 세울 기술자가 없어 적국인 백제에서 스카우트했는데, 그가 바로 탑 건축가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비지’입니다.
바닥 면적만 150평, 기단 한 변의 길이가 22m, 현재 아파트 30층에 해당하는 황룡사 9층 목탑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553년 진흥왕에서 시작해 645년 선덕여왕까지 93년에 걸친 대역사를 끝내고 천 년 역사를 간직한 신라의 국가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자장법사의 말은 현실이 됐습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백제),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거란), 8층은 여적(여진), 9층은 예맥을 상징했던 9층 석탑을 완공하고, 23년 만에 삼국통일을 이뤄냈으니까요.
사실 이 신라의 상징과도 같았던 황룡사, 그리고 황룡사의 상징이었던 9층 목탑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1979년 1월 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황룡사 발굴 현장을 찾았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황당한 지시를 하나 내렸습니다. 사라진 9층 목탑을 콘크리트로 복원하라는 지시였죠.
신라시대 목탑을 복원하는데 콘크리트라니… 조금 어이가 없는 짓이었으나, 당시까지 콘크리트는 만능 재료이자 근대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콘크리트로 지으면 1,000년을 버틴다느니, 3년 걸릴 복원이 9개월로 줄어든다느니 하는 논리가 통하던 시절이라 1968년에는 광화문도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습니다. 당시 그 어이없는 지시로 발굴단 사이에서는 싸한 분위기가 흘렀는데, 대통령의 뜻을 거역할 담대한 심장을 가진 이가 없어, 일단 설계검토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로부터 10개월 뒤 벌어진 10.26 사태로 없던 일이 됐죠.
어쨌든 신라의 상징과도 같았던 황룡사와 9층 목탑을 왜 지금은 볼 수 없을까요?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그 답이 있습니다. 1231년 첫 침공을 시작으로 약 30년간 8번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은 1238년 경주까지 진격했는데, 경주에서 고려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는 절을 발견합니다.
바로 황룡사였는데, 25,000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터의 중심에는 80m가 넘는 목탑까지 세워져 있으니, 이를 불태우면 고려인들이 무력감에 빠질 것으로 봤죠. 그리고는 황룡사를 무자비하게 불태워 버렸습니다. 대부분 목조건물인 데다 9층 목탑 역시 목재였기 때문에 방화에 속수무책으로 태워져 황량한 벌판이 되어버리죠.
황량해진 황룡사 터에 민가와 논밭이 들어차면서 700년이라는 무상한 세월이 흐릅니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고, 일제 식민지를 겪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졌던 이 황룡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64년입니다.
1964년 12월 17일 밤, 도굴범들이 황룡사 목탑이 세워진 자리에 모여듭니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물을 꺼내 돈벌이에 나섰던 그들은 목탑 터에 놓인 거대한 심초석의 덮개돌을 지렛대로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사실 황룡사 터는 1976년 발굴이 시작됐는데, 그 이전에 한 차례 조사가 시도된 바가 있습니다. 문화재 위원회가 1964년 황룡사 터 내부의 민가를 사들여 철거했는데, 이 민가가 목탑의 중심을 바치던 심초석 위에 세워져 있었죠. 이 민가를 치우고 나니 비로소 집채에 묻혀 있던 심초석이 드러났고, 이 사실을 확인한 도굴꾼이 몰려든 겁니다.
그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은 ‘사리장엄구’와 ‘사리공’이었는데요. 인도에서 불교를 처음 정립한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나온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탑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 보관된 사리가 그 탑의 존재 의미가 됩니다.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아름답게 장식한 그릇을 ‘사리장엄구’라고 하죠.
불교에서 ‘적멸보궁’이라는 장소가 있는데, 이곳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건물을 뜻합니다. 석가모니를 화장한 후 나온 실제 구슬을 보관하고 있다는 의미로 적멸보궁에는 일반 사찰과 같이 불상이 없습니다. 부처의 실제 흔적이 남아 있으니 굳이 불상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고, 한국에는 5개의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인제의 ‘봉정암’, 평창의 ‘상원사’, 정선의 ‘정암사’, 영월의 ‘법흥사’, 그리고 양산의 ‘통도사’가 있는데, 황룡사 9층 목탑에도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굴꾼들이 이를 도굴하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습니다. 사리와 사리장엄구를 꺼내고는 덮개돌을 내려놓아 완전범죄가 되어버렸죠.
그런데 그들의 범행은 2년 뒤 엉뚱한 사건을 계기로 드러났습니다. 2년 후 그들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쳤는데,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엄구도 도굴했다.”라는 뜻밖의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때 회수된 도굴품 중에는 보물로 지정된 ‘황룡사 9층 목탑 금동 찰주본기’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황룡사 목탑 창건 및 보수, 수리와 관련된 기록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리는 끝내 회수하지 못했죠. 이 과정에서 ‘이병각’ 당시 삼강유지 사장이 도굴한 유물을 사들인 혐의로 구속됐는데, 그가 바로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의 친형입니다.
어쨌든 그로부터 14년 뒤인 1978년 황룡사 터에서는 재미있는 이벤트가 개최됐습니다. 14년 전 도굴범들이 도굴했던 10톤짜리 돌 밑에 묻힌 30톤짜리 대형 심초석을 들어 옮기는 이벤트였는데, 이를 위해 포항제철에서 사용 중이던 100톤 크레인까지 동원됐습니다.
그런데 30톤짜리 심초석을 들어 올리니 그 아래에서 중국 백자 항아리, 금동 귀걸이, 거울, 구슬, 수정 장식, 청동 그릇 등 약 3,000여 점의 유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남긴 황룡사 터 발굴은 박정희 정권의 경주 관광종합개발계획 때 시작됐습니다. 이미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을 마무리했고, 이제 천 년 동안 버려졌던 웅덩이 안압지와 더불어 황룡사 터도 발굴이 시작됐죠. 마을을 이룬 민가 100여 호를 철거하고 순차적으로 56,700여 평의 주변 토지를 매입해 3차년 계획으로 발굴을 시작했는데, 발굴을 해도 끝이 없어 계획을 수정해 1983년까지 8차년 사업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발굴 현장 인부 78,000여 명으로 약 2,000일 동안 25,000평에 이르는 거대한 터를 발굴했습니다. 덕분에 금당, 목탑을 비롯해 중문, 강당, 회랑, 종루, 경루 등 사찰 내 중요 건물터를 찾아냈고, 알려진 유물만 45,000점을 찾아냈죠.
사실 황룡사를 처음 발굴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 규모도 몰랐습니다. 막상 발굴을 시작하면 발굴 장소가 엿가락처럼 늘어나기 시작했고, 외곽 담장 기준 25,000평으로 동양 최대 크기의 사찰이라는 것도 1983년 조사를 완료한 후에야 드러났습니다.
1238년 몽골군이 경주에서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과정에서 황룡사는 불태워졌습니다. 무자비한 화마 속에서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장육존상과 9층 목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기에 불상을 모신 금당 벽에는 천재 화가로 알려진 ‘솔거’가 그린 노송도도 있었지만, 함께 불태워졌습니다.
<삼국사기>는 이를 두고 “솔거는 신라 사람으로 보잘것없는 집안에 태어나 그 내력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타고난 재질로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나무둥치가 거칠게 주름지고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 서리었으므로,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들이 그 나무에 날아들다가 부딪혀 미끄러져 떨어지곤 하였다. 여러 해가 지나 빛깔이 바래 한 스님이 다시 칠을 하였더니 그 뒤로 새들이 다시는 날아들지 않았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덕분에 그의 그림을 보고 새들이 벽에 날아들었다가 부딪히기 일쑤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1238년 당시 몽골군이 가져갔다고 알려진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에밀레종의 4배에 달하는 약 80톤짜리 초대형 종으로, 만약 현존하고 있었다면 세계 최대 크기의 종이며, 기네스북에 올랐을 것이 확실시됩니다. 다음 콘텐츠에서는 이 ‘황룡사 종’의 행방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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