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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일생의 말년을 ‘이것’으로 달랬던 고려 마지막 왕비 ‘정비 안 씨’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고려시대 가장 비극적인 왕비 정비 안 씨는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의 제4 비로, 비극적인 일생을 살아온 왕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정비 아니면 왕대비 안 씨로 불리며, 본관은 죽주, 준호는 공양왕 때 받은 정숙 선명 경신 익성 유혜왕대비였습니다.

정비 안 씨의 출생 연도는 미상이지만, 죽성군 안극인의 딸로 태어나 1366년에 공민왕의 왕비로 간택됩니다. 그녀는 여말선초를 다룬 자료라면 잠깐이라도 꼭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대부분 조선 건국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기에 그녀가 태종 이방원보다 더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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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비 안 씨의 아버지인 동지밀직사사 안극인은 충직한 인물로, 공민왕이 가장 사랑했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기리는 영정 공사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자, 그는 공사의 중지를 왕에게 간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에 분노한 공민왕은 안극인을 파직하고 그의 딸 정비 안 씨를 국에서 내쫓게 됩니다.

이후 얼마 뒤 다시 입궁하게 되지만, 어떻게 보면 이때 재입궁한 것이 그녀의 비극의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재입궁 뒤에 공민왕은 정비 안 씨에게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뽑아 설치한 자제위 소속의 청년들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기를 강요하는 등의 비행을 일삼았으나 그녀는 단호히 거부하였고, 결국 머리를 풀고 자결까지 시도하자 그제서야 공민왕은 물러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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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년에 망가진 공민왕이 1374년에 시해된 후 살아있는 공민왕의 왕비 중에 4비 정비 안 씨에 관한 기록이 가장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2비인 혜비 이 씨와 5비인 신비 염 씨는 비구니가 되었기에 기록이 적었고, 비교적 더 알려진 3비인 익비 한 씨는 공민왕의 강요를 못 이겨 자제위 홍륜과 동침해서 딸을 하나 낳았다고 전해지는데요. 이후 공민왕을 홍륜이 시해하였기에 우왕 때 역적의 아이라는 이유로 그 딸이 사형에 처해졌다는 기록과 공양왕 때 익비 한 씨가 공양왕과 왕비 순비 노 씨의 셋째 딸인 경화궁주를 그녀의 친정에서 양육한 공으로 토지를 받았다는 정도의 기록만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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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고려 때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국왕이 여러 왕비를 두게 되는데, 공민왕의 경우 노국대장공주 이외의 비들은 후궁으로 들인 것에 가까웠지만, 당시에는 정실부인과 후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기에 정비 안 씨는 계속 왕실의 어른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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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공민왕의 왕비 중 정비 안 씨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은 어머니뻘인 정비 안 씨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 씨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고 그녀를 희롱하였다고 합니다. 우왕은 이후에도 자주 정비 안 씨의 처소에 들렀으며, 하루에 두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들렸다가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있게 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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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녀는 우왕이 처소에 들러도 병이 들어서 머리를 빗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고, 대신 남동생인 판서 안숙로의 딸, 즉 자신의 조카를 우왕에게 소개해 현비로 삼게 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만 천애 고아나 다름없던 우왕이 정비 안 씨에게 모성애를 갈구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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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키자, 정비 안 씨는 왕실 최고의 어른이자 대비로서 우왕을 폐위하는 교서와 조민수와 이색의 주청을 받아들여 창황을 즉위시키는 교서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창왕이 즉위한지 1년 만인 1389년에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킬 것을 강요하자, 이번에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내용의 교서를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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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정식으로 왕대비가 되어 존호도 받았지만, 1392년 배극렴 등 이성계 일파가 공양왕의 폐위와 새 왕조의 창업을 윤허하는 교서를 강요하며 정비 안 씨를 압박하자, 힘이 없었던 그녀는 할 수 없이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즉위 교서를 선포하고, 옥새를 이성계에게 넘겨줍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475년 만에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성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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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행히도 조선 왕실은 에먹이지 않고 옥새를 순탄하게 건네준 그녀를 극진하게 예우하게 됩니다. 비록 국가 정통성 문제로 인해 예전처럼 대비로 대우하지는 못하지만, 지내는 데 일체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게 됩니다.

정확한 그녀의 심경을 알 수는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술을 가까이 지내며 평탄한 말년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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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신하들의 추대와 함께 정비 안 씨로부터 옥새를 전달받아 왕이 된 것은 1392년 7월 17일이었으며, 공식적으로 1392년 8월 7일에 그녀의 신분이 의화궁주로 낮춰지게 됩니다.

1392년 11월 4일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태조 이성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해지는데, 왕을 위한 잔치를 열 정도였으니 재정적으로도 풍요롭게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왕실의 어른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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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2월 19일에 태조가 왕후인 신덕왕후 강 씨와 함께 의화궁주의 사저를 찾아가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한동안 실록에 등장하지 않게 되는데, 그녀가 다시 등장한 것은 23년이 지난 1415년 술에 관한 실록의 기록과 함께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날마다 그녀에게 술 한 병을 내려주어 부왕 때로부터 이어진 우호를 지속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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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주의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기에 정확한 당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1366년 왕비로 입궁했을 때 15~18세로 추정되기에 그녀의 나이는 환갑이 가깝거나 조금 지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은 이제 노인이 된 여인에게 매일 술을 주다 보니 그녀의 건강 걱정을 했으며, 3년 후에는 “의화궁주가 늙고 병이 있어서 약주를 떠나지 않기에 이제부터 묵은 술을 쓰지 말고 새 술을 바치도록 하라.”라며 앞으로는 더욱 좋은 술을 주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태종은 20살 가까이 연상인 이 여인이 자신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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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즉위하고 2년째가 된 1420년 5월 16일, 상왕이 된 태종의 생일을 맞아 의화궁주는 체수박을 바쳐 그간의 호의에 답례하게 됩니다. 이후 1428년 1월 23일, 세종은 의화궁주에게 박포의 집을 내려줍니다.

박포는 제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의 형제인 이방간을 부추겨 난을 일으킨 죄로 처형당한 인물로, 죄인이 되기 전 개국공신으로서 부유했기에 상당히 규모가 큰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의화궁주에게 주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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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해 5월 14일, 고려의 마지막 대비였던 의화궁주는 80세에 가까운 삶을 산 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사연 많은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에 세종은 부의로 쌀과 콩 각각 100석을 보냈으며, 6일 후에는 예조에서 “지금 의화궁주의 장사는 옛 제도에 따라 왕비의 예를 쓰고, 그녀의 거복과 예의는 전조의 제도에 좇게 하소서.”라고 보고하니, 왕은 이에 따랐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세종에 의해 36년 만에 왕비의 지위를 찾고 고려 왕비로서 장사를 지내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어디에 묻혀있는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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