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안대군 방의는 조선 제1대 왕 태조 이성계의 3남으로, 제2대 왕 정종의 동생이자 제3대 왕 태종의 형이었습니다.
태조의 향처였던 신의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의는 왕자 가운데 가장 야심이 적었던 인물로, 성품이 온화하고 사리가 밝은 인덕의 귀공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생 이방간과 이방원의 왕위 계승 싸움인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립을 지킬 정도로 평소에 논란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 처세를 보입니다.
고려 말 혼란한 시기에 아버지 이성계가 정권을 잡고 정국을 안정시킬 무렵, 그는 모든 일에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능력을 발휘하며 조선을 개국하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결국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자 이방의는 익안군에 봉해집니다. 하지만 개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다섯째 이방원이 세자가 되지 못하고, 태조의 경처였던 신덕왕후 강 씨의 어린 아들 이방석이 세자가 되면서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조선을 신권의 나라로 만들고자 한 정도전이 왕자와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을 혁파하려고 압박하자,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이 위기를 느끼고 다른 종친들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동생 이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시키면서 정사공신 1등에 봉해지고,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오르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방원은 난을 일으킨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장자 승계의 법칙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살아있는 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둘째 이방과를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조선 제2대 왕 정종이었습니다.
이후 이방의는 이방원, 이방간과 함께 정도전 일파가 장악했던 중앙군의 병사들을 회수하였고, 세 왕자가 병권을 나누게 되면서 그는 중군 절제사가 됩니다. 이때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이방원은 강원도와 동북면을, 이방간은 황해도와 서북면의 병권을 각각 관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1400년, 넷째 이방간이 야심을 가지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은 또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었던 이방의는 넷째의 모반 소식에 탄식하며 중립을 지켰고, 자신이 맡은 절제사직을 사임하며 다섯째 이방원을 간접적으로 돕습니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이 진압되고 1400년 11월, 이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오르자 그는 익안대군에 봉해지지만, 안타깝게도 병으로 인해 1404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대군이 병중에 있을 때 동생 태종은 친히 문병을 왔고 안타까움에 서로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곧이어 주연을 베풀고 즐기다가 태종을 말하기를 “형님이 병환 중에 오래 앉아 대화하기가 수고로울 것이 심히 염려됩니다.”라고 하니, 대군이 화답하기를 “신이 지금 병이 깊은데, 어느 날에 나가 뵈올는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조금 더 머무르시어 신이 취하여 자리에 눕는 모양을 보소서.”
이에 태종은 대군과 같이 즐기다가 밤늦게 환궁할 정도로 형제의 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였습니다.
익안대군은 성질이 온후하고 사치를 즐기지 않았다고 하며, 손님이 오면 정성스레 술자리를 베풀고 취해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가 결국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형의 죽음에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정지했으며, 직접 장례식에 문상을 와 후한 부조금과 지원을 하게 됩니다.
익안대군은 삼한국대부인 철원 최 씨와 혼인하여 익평부원군 석근과 2녀를 두었고, 부부인 이 씨와의 사이에 영가정 승을 낳아 모두 2남 2녀를 두게 됩니다.
대군의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사곡리 백암동 해좌 언덕에 예장되었고, 후일 풍덕군 동면 백암리 해좌로 이장되었으며, 정종 사후 정종의 묘정에 배향됩니다.
시호는 화목하여 다투지 않고 전쟁에 공이 있음의 뜻을 지닌 ‘안양’이 내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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