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으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종교적인 상징물이 전혀 의외의 국가에 건설됐다는 점입니다. 오늘 잠시 살펴볼 바미얀 석불이 딱 그렇습니다. 2001년 3월 8일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탈레반은 최고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의 주도로 바미얀 석불을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우상 숭배를 금지한다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아프간 내 모든 불상이 같은 운명을 맞았는데요.
사실 코란에도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 세워진 타 종교 건축물을 파괴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적혀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파키스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 국가들마저도 이를 강력하게 규탄했고 소문이 돌기 시작한 2,000년부터 국제 사회가 어르고 달래기도 했으나 일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 결정에 크게 반대하며 바미얀 석불을 구매해서 일본으로 가져가겠다는 제안까지 남겼으나 끝내 설득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세계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죠. 인구의 99%가 무슬림인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주 힌두쿠시산맥에는 절벽을 파서 만든 각각 높이 56m, 38m의 부처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를 숭배하는 국가에 아파트 20층 높이에 해당하는 세계 최대 크기의 불상이라니 무언가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아프가니스탄이 불교 문화권이던 6세기 쿠샨 왕조 때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크고 오래된 유산을 아예 없애 버리는 발상은 인류사에서도 전례가 없었고 가장 악명 높은 사례로 꼽히고 있죠.
결국 2003년 유네스코는 석불 주변 100개가 넘는 동굴, 크고 작은 불상들, 요새 유적들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 보호하기로 했는데요. 석불이 파괴되기 전 전 세계 수많은 불교도들에게 바미얀은 죽기 전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불상의 제작 방법은 여전히 미스터리인데요.
절벽을 파내 만든 불상은 모두 머리 부근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발 주변에서부터 통로가 있는데 총 일곱 개의 굴이 있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가 수 있도록 계단이 있고 계단 중간에서 또 좌우의 다른 석굴로 갈 수 있는 실내 통로도 있습니다. 이 통로를 따라 머리까지 올라가면 머리 양쪽에 만들어진 발코니에 올라설 수 있죠.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어떻게 이렇게 큰 불상을 조성할 수 있었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고 아무리 파내기 쉬운 사암 절벽이라고 하더라도 56m짜리 초대형 불상을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 만약 남아 있었다면 백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을 불상이 하나 있습니다. 어쩌면 바미얀 석불보다도 더 큰 가치를 지녔을 것으로 평가되는 천 년 역사에 빛나는 신라의 삼보, 즉 세계 보물 중 하나로 꼽혔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상인데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을 자랑하는 신라의 최대 미스터리, 이 불상의 비밀을 풀어봐야겠습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경주에는 어마어마한 랜드마크가 하나 세워졌었습니다. 553년경 신라 진흥왕이 궁궐을 세우려던 터에 누런 용이 나타나자 이곳은 궁궐터가 아니라 절터라며 세운 황룡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거의 허허벌판 수준이 됐지만 현 경주시 구황동에 그 터가 남아 있죠.
신라 시대 왕과 귀족은 자신들의 권세를 뽐낼 요량으로 흔히 절을 세웠는데 진흥왕 역시 황룡사를 건설해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는데 경주 한복판에 세워진 거대한 절터였던 만큼 이후로도 왕과 귀족 들은 앞다퉈 황룡사 보물을 들였습니다. 천 년 역사를 지닌 신라에는 신라삼보라 불리는 세 개의 보물이 있었는데 황룡사장육존상, 황룡사구층탑, 천사옥대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삼보 중 두 개가 전부 황룡사에 있었습니다.
라이벌이었던 백제에서 탑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비지를 초대해 건설한 황룡사구층목탑 그리고 구리 7.6톤과 금 100냥을 사용해 만든 황룡사장육존상인데요. 그중 황룡사장육존상 또는 황룡사장육상이라고도 불리는 불상은 어마어마한 미스터리를 품고 있습니다.
여러 불교 경전에 따르면 석가 생존 당시 일반인들의 신장이 8척인 데 반해 석가모니의 신장은 그 배에 달하는 16척이라고 전해집니다. 이를 근거로 불상의 높이를 1장 6척에 맞추고 이러한 의궤에 맞게 조성된 불상을 장육존상이라고 부르는데 황룡사 장육 존상이 완성되던 당시에 도량형으로 환산할 경우 불상의 높이는 대략 6m에 육박하는 초대형 금동불입상이었습니다.
진흥왕이 황룡사를 세우고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불상이었는데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이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를 세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해로부터 거대한 배가 떠와서 그 안을 살펴보니 편지가 함께 실려 왔습니다.
편지에는 서인도의 아소카왕이 황철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서가 삼존상을 주저하려다가 실패하자 인연 있는 나라에 도착해 장육존상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며 황철과 황금을 함께 실어 보냈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거쳐 결국 신라에 이르렀는데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이를 주조해 완성했다는 것이 일연스님의 주장인데요.
사실 아소카왕이 재위한 BC 273년은 인도는 아직 불상을 만드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허구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장육상의 제작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실물로 만들어졌었으니까요. 우선 장육이란 1장 6척의 준말로 1장이 10척이니 총 16척의 불상입니다. 지금은 1척이 30cm이므로 16척이면 4.8미터에 이르지만 과거에는 한 척의 길이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짧게는 22cm부터 길게는 35cm까지 다양했죠.
학자들은 황룡사가 건립될 당시 건물터에서 35cm를 사용하는 고구려척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해 장육상 역시 35cm를 기준으로 세워졌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니 장육상은 최대 5.6m에 이르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으로부터 천 오백 년 전에 5.6m짜리 거대한 불상을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점입니다. 지금이야 타워크레인이든 사다리차든 이용해 공중에서 작업이 가능하지만 신라 시대에 타워크레인이 있을 리는 만무하죠.
현재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 높이가 6.5m인데 워낙에 높은 데다 개방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어 그 크기가 실감 나지 않지만, 동상 옆에 사람이 서 있는 사진을 보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던 1960년대에도 구리를 확보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군대에서 사용하고 남은 탄피를 모아 녹여서 만들 계획도 세웠지만 어마어마한 소요량에 지쳐 실패했고 이후 구리가 구해지는 대로 조금씩 모아 부분적으로 주조했다고 하죠. 그러니 신라시대에 최소 7,600kg의 구리를 한 번에 조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그래서 학자들은 일연스님이 어느 국가에서인가 수입한 것을 미화하기 위해 서인도 아소카왕이 배에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만들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구리는 어찌어찌 구했다고 하더라도 구리를 녹여 어떻게 불상을 만들었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큰 불상을 머리, 팔, 다리, 몸통, 여러 개로 나누어 만든 후 이를 붙이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용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용접기가 필요한데 신라 시대에는 용접 기술도 없었고 고작 납땜 기술이었는데 5.6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을 납땜으로 만드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이 방법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거대한 불상이라도 처음부터 하나로 만드는 방법뿐인데 여기에는 또 다른 조건이 붙습니다. 이 불상이 세워질 그 자리에서 주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5.6m짜리 거대한 불상을 다른 구역에서 만든 후에 이동시키는 크레인 등의 기술력이 신라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드시 불상이 놓여질 그 자리에서 제작해야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장육상은 황룡사가 세워진 이후에 조성됐습니다.
황룡사가 553년에 넉넉히 잡아도 569년의 모든 건물이 완성됐는데 장육상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574년에 완성됐죠. 이 방법을 쓰려면 우선 불상을 먼저 한 후에 그 불상이 안치될 법당이 지어져야 하는데 시기적으로 맞지 않죠. 장육상 주조를 위해 우선 지어진 법당을 허물고 불상을 세운 후 다시 짓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결론적으로 완성된 장육상이 법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완성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불상을 위해 건물을 허물었다는 것이 왕이 직접 창건한 황룡사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모험이었습니다. 결국 일연스님이 기록한 것처럼 문잉림에서 제작한 후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것인데 한자로 보면 숲일 테고 그것은 분명 황룡사는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장육상은 문잉림이라는 곳에서 한덩어리로 만들어졌고 이곳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황룡사장육존상은 지금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많습니다. 5.6m짜리 거대한 불상을 짓기 위해서는 이 모양대로 만든 틀이 있어야 하고 그 틀에 구리를 붓기 위해서 인간은 최소 5.6m 높이까지 주물을 들고 날라야 하며 완성된 장육상을 나르기 위해 최소 7,600kg의 무게를 견뎌 낼 수 있는 거대한 크레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무사히 황룡사로 옮긴 후 법당이 훼손되지 않도록 법당 내부에 세웠을 겁니다.
과연 지금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신라인 들은 어떻게 해냈을까요? 1231년을 시작으로 30년간 8번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몽골 군은 1238년에는 경주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서 고려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절을 발견하게 되죠. 700년 전에 세워진 황룡사였는데 2만 평이 넘는 드넓은 터도 놀라운데 그 한복판에는 높이 80m가 넘는 목탑이 세워져 있고 거대한 크기의 종에 법당에는 샛노란 금으로 도금한 거 불상까지 보완해 두었으니 이를 불태워 고려인들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싶었을 겁니다.
결국 몽골 군은 황룡사를 무자비하게 불태워버렸죠.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몽골 군의 방화에 속수무책으로 불태워졌습니다. 다만 황룡사에 모아 뒀던 수많은 보물 중 구층목탑은 불타 전소됐을 것이고 황룡 대종은 몽골군이 몽골로 가져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육존상만큼은 아직까지도 그 행방이 알려지지 않아 마지막 미스터리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 거대한 장육상이 세상에 드러나야 이 모든 미스터리가 풀리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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