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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만 6번 입은 조선 비운의 왕비” 예송논쟁의 중심 인물 ‘장렬왕후’

  • 지식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1624년~1688년) 조씨는 양주 조씨이자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인조의 정비였던 인열왕후 한씨가 1635년(인조 13년)에 세상을 떠나자 3년 후인 1638년 (인조 16년) 15세의 나이에 당시 44세 인조의 계비로 책봉됩니다. 그녀는 인조와 무려 29살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명목상 아들이 되는 소현세자, 봉림대군보다도 어렸으며 손자인 현종과도 겨우 17살 차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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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가 왕비에 오른 1638년은 1년 전 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극심한 혼란기였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왕비의 자리임에도 대부분의 명문가에서 간택을 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렵게 간택된 장렬왕후였지만 인조는 가례를 올린 첫날을 제외하고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조와 장렬왕후 조씨의 나이 차이가 상당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고, 당시에 인조는 후궁인 소용 조씨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렬왕후는 왕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또한 소용 조씨는 투기와 모략을 일삼으며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장렬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였지만 그녀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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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인지 장렬왕후는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남기지 못했으며, 20세의 나이에 풍까지 오는 등 마음고생을 심하게 합니다. 심지어 1645년(인조 23년)에는 중궁전을 소용 조씨에게 내주고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쓸쓸히 세월을 보내던 장렬왕후가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인조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1649년 55세의 나이로 인조가 세상을 떠난 뒤 장렬왕후는 26세의 나이로 왕대비에 오르게 되고 ‘자의’라는 존호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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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나이에 대비가 되어서인지 장렬왕후보다는 자의대비로 더 알려지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효종은 자식이 없었던 왕대비 장렬왕후에게 예법상 어머니로서 극진한 예우와 정성을 다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5살이나 많은 아들인 효종을 믿고 의지하며 생애 가장 행복한 10년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힘없는 왕비로서 자식을 낳지 못했고 특별한 세력도 만들지 못했기에 여전히 권력과는 먼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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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장렬왕후는 효종과 현종, 숙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극심한 붕당정치와 정권 다툼을 지켜보게 됩니다. 또한 의붓아들인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 최고의 철학적, 정치적 논쟁인 예송논쟁의 중심에 휘말리게 되고, 마음고생을 심하게 합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제18대 왕인 현종이 즉위하게 되고 장렬왕후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6세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효종의 의붓어머니였던 장렬왕후에 대한 상복이 1년으로 정해지자 이것이 문제가 되면서 예송논쟁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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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예법을 기록한 국조오례에는 둘째인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죽었을 때 어머니의 복제에 관한 규정이 없기에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은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상복을 성리학의 예법인 주자가례에 의해 1년 복으로 대수롭지 않게 결정하게 되는데요.

이때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남인이 이의를 제기하며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당시 남인은 ‘효종이 장남은 아니지만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3년복이 맞다’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장렬왕후의 복제 문제는 단순한 예법의 문제가 아닌 왕권과 정통성과 관련된 정치 문제가 되면서 승리하는 쪽이 정권을 차지할 정도로 큰 사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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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조의 세자는 장남인 소현세자였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의문의 독살로 죽게 되고, 세자의 아들들도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 되면서 둘째인 봉림대군(효종)이 새롭게 세자에 책봉이 되고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소현세자 사후 그의 아들이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인조의 뜻으로 둘째가 세자가 되고 왕이 되었기에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인들은 왕 또한 성리학의 법인 주자가례에 따라 둘째이니 1년 복이라는 속내가 있었지만, 경국대전(조선의 법전)과 대명률(명나라 법전)에서 장남이든 차남이든 1년 복을 입게 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장렬왕후의 상복을 교묘히 1년상인 기년설로 밀어붙이게 됩니다. 결국 서인이 승리하며 대왕대비 장렬왕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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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부인인 왕대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역시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살아 있었기에 인선왕후의 시어머니인 장렬왕후의 복제를 놓고 2차 예송논쟁이 불붙게 됩니다.

성리학의 예법인 주자가례에서는 맏며느리가 죽었을 때 시어머니는 1년 상복, 그 외 며느리는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서안은 이러한 논리로 장렬왕후의 상복을 9개월인 대공복으로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조선의 법인 경국대전에 며느리는 1년이라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기년복을 주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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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현종은 “전에는 지금의 법(아들에 1년 복 경국대전)을 썼는데 이제는 옛날 법(맏며느리 9개월 복 주자가례)을 쓰자는 것이니 논리에 일관성이 없다”라며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렇게 제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의 여파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이 바뀌게 되지만, 2개월 만에 현종이 갑자기 승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이 모든 걸 지켜본 숙종이 즉위하며 피바람을 예고하게 됩니다. 장렬왕후는 두 번의 예송논쟁을 비롯해 총 6번으로 역대 가장 많은 상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해 자식도 없었으며 어린 나이에 왕실의 어른이 되어 상복 문제로 당쟁의 명분이 된 참으로 기구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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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주였던 숙종이 즉위한 후 장렬왕후는 한 궁녀를 아끼게 되어 처소로 들이게 되는데, 이는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였습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잠시, 시할머니가 총애하던 궁녀 장씨를 사가로 쫓아버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숙종의 어머니인 왕대비 명성왕후 김씨였습니다.

명성왕후는 또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의 구심점이 될 정도로 권력이 강한 손주며느리였습니다. 기가 세고 성격이 괄괄해 오죽하면 남편 현종이 그녀로 인해 후궁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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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화려한 배경과 강한 성격을 지녔던 명성황후는 궁녀 장씨가 아들 숙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자 트집을 잡으며 그녀를 내쫓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대왕대비 장렬왕후는 손주며느리 명성왕후보다 오래 살았으며 그녀의 3년상이 끝나자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으로 화려하게 복귀를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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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1688년(숙종 14년) 대왕대비 장렬왕후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상주였던 숙종은 마땅히 국상을 치르고 상례복을 입으려 했지만 친손이 아니었고 선례에도 증손까지는 기록이 없기에 고민 끝에 사가(주자가례)의 예를 따라 종친의 예로서 1년간 상복을 입게 됩니다. 자신이 죽어서까지도 복제 문제가 따라다닌 걸 보면 장렬왕후도 진저리 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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