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옹주(1727년~1748년)는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의 딸로 어머니는 찬성에 증직된 이유번의 딸 영빈 이씨입니다.
1727년(영조 3년) 영조와 영빈 이씨의 사이에서 1남 6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난 화평옹주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준다며, 영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남동생은 사도세자이며, 여동생은 화협옹주와 화완옹주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3명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1731년(영조 7년) 화평옹주가 5살이 되던 해에 천연두(마마)를 앓게 되자, 영조는 딸의 쾌유를 위해 모든 형벌의 집행을 정지시킵니다.
당대에 천연두는 ‘마마’ 또는 ‘손님’이라고 불렀는데, 천연두에 걸린 환자가 있을 때는 부정탈 만한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딸의 병이 낫게 되자 영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치료한 사람들의 품계를 올리고 상을 내립니다.
그리고 옹주는 그해 7월 20일 정식으로 화평옹주에 봉작됩니다.
화평옹주는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동생 사도세자는 물론 다른 여동생들과의 사이도 좋았다고 합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화평옹주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슬기롭게 중재하여 그녀 생전에는 부자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735년(영조 11년) 영조는 화평옹주에게 집을 주기 위해 인조의 친동생인 능원대군의 옛집이자,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살던 이현궁을 수리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곧바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게 되는데 심지어 옛 궁궐(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어 쓰도록 하면서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신하들은 인조, 효종이 즉위전에 살던 어의궁보다 이현궁이 더 크다면서 옹주에게는 너무 과하다고 간언하지만 영조는 이를 듣지 않고 강행을 하게 됩니다. 후일 이러한 논란을 알게 된 화평옹주는 이현궁이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며 받지 않겠다고 하였고 이에 영조는 다른 궁을 내려주게 됩니다.
혼기가 찬 화평옹주는 1738년(영조 14년) 12세의 나이에 예조 참판 박사정의 아들인 박명원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부마가 된 박명원은 금성위에 봉해졌으며, 영조는 화평옹주를 사랑한 만큼 사위인 박명원 또한 총애하게 됩니다. 참고로 박명원은 노론 북학파 실학자로 알려진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온 후 접한 새로운 사실을 그에게 전해 줍니다. 이로 인해 박지원은 외부의 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변변한 벼슬이 없었지만 청나라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쓸 수 있던 것도 친척 형인 박명원 덕분이었습니다.
이는 방명원이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박지원을 함께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옹주가 혼인을 하면 궁 밖으로 나가는 게 원칙이었지만 영조가 화평옹주를 너무나 아꼈기에 예외를 적용해 궁 안에서 살게 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사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았으므로 4년이 지난 후 화평옹주는 영조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궁을 떠나 하가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가란 지체가 낮은 곳으로 시집간다는 뜻으로, 공주나 옹주가 귀족이나 신하(사대부)에게로 시집감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영조는 자녀 중 첫 번째로 시집을 간 화순옹주(정빈 이씨의 딸)가 하가할 때 보통 옹주들이 받는 예물에 10배가 넘는 양을 내려 논란이 일어났는데 화평옹주 때에는 그보다도 훨씬 많은 예물을 보내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1743년(영조 19년) 12월 3일 영조는 어머니 숙빈묘에 갔다가 환궁하지 않고 갑자기 딸이 보고 싶다며, 예정에 없던 화평옹주의 사가로 향하게 됩니다.
정해진 거동이 아니었기에 신하들은 영조를 말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는 크게 노하게 됩니다.
결국 원하는 대로 딸을 만나게 되지만 화가 난 영조는 궁궐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를 기다리던 신하들은 옹주의 집 마루에서 추위에 떨게 됩니다. 결국 병조 판서 서종옥이 나서서 뵙기를 청하였으나 영조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늦은 시간인 2경(21~23시)에 비로소 환궁을 하게 됩니다.
영조가 이렇게나 아꼈던 화평옹주였지만 안타깝게도 출산을 하다 잘못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됩니다. 1748년(영조 24년) 6월 24일 위독해진 화평옹주는 집안사람을 시켜 영조에게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영조는 매우 놀라 옹주의 집으로 향하지만 화평옹주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빈소에 찾아가 밤을 새우며 통곡했는데 무더운 날씨에 탓에 임금의 건강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한 신하들이 환궁을 권유해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장례일이 가까워지면서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옹주의 집에 찾아가 머물렀고, 부마 박명원의 애원에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는 재위 내내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을 오갔는데, 이때 화평옹주 사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창덕궁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화평옹주의 장례를 준비할 때, 영조가 내린 여러 가지 물건의 성대함은 국장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장례를 호화스럽게 치르려 하자 신하들이 너무 지나치다는 간언을 올렸는데 영조는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간언을 한 신하들을 파직시킵니다.
그리고 분묘를 만드는 과정이 수개월이나 걸려 주위 백성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영조는 장례 이후에도 화평옹주의 삼년상 기간 동안 어딘가에 갔다 환궁할 때면, 화평옹주를 잊지 못하여 사가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748년(영조 24년) 6월 26일, 임금이 또 화평옹주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대신이 간쟁하였어도 되지 않았다.
1748년(영조 24년) 윤7월 29일, 임금이 화평 옹주의 집으로 행행하였다. 옹주의 장사를 지내는 일이 다가오기에 슬피 울며 통곡한 것이 모두 다섯 번이었다.
1748년(영조 24년) 8월 4일, 임금이 화평 옹주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밤이 되어서야 환궁하였다.
1748년(영조 24년) 8월 10일, 임금이 명릉에 행행하였는데, 오는 길에 화평옹주의 집에 임어하였다가 환궁하였다.
1749년(영조 25년) 2월 11일, 제례를 마친 뒤 마산을 거쳐 가니 이곳은 화평옹주의 묘였다.
1749년(영조 25년) 5월 5일, 임금이 단오제 행하기를 의식대로 거행하고, 돌아올 때 화평옹주의 제택을 지나며 들렸다.
1749년(영조 25년) 5월 13일, 지난날 화평 옹주의 제택에 거둥하시어 밤늦게 환궁하였다.
1749년(영조 25년) 6월 23일, 임금이 금성위 박명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이 화평옹주의 소상이었다.
1750년(영조 26년) 1월 3일, 임금이 종묘에 참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평옹주의 집에 들렀다.
1750년(영조 26년) 6월 24일, 임금이 옹주의 사제에 거둥하였는데, 이는 금성위 박명원의 집이었다.
이렇게 수없이 예정에 없는 임금의 방문이 이어져 곤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화평옹주의 이른 죽음은 아버지 영조뿐만 아니라 남동생 사도세자에게도 큰 불행이었습니다.
화평옹주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그나마 중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화평옹주가 요절하게 되면서 왕실 내에서 부자간의 갈등을 중재해 줄 사람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대왕대비 인원왕후, 왕비 정성왕후가 영조의 핍박 속에서 사도세자를 보호해 줬지만, 이들마저 차례대로 세상을 떠나고 만 뒤에는 부자간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비극인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중록에는 이에 대해
“화평옹주 계실 제는 동생 역성을 들었고, 일에 따라 부왕께 말씀을 올려 맺힌 것을 푼 일이 많았는데, 화평옹주 돌아가신 후에는 위에서 과한 행동을 하시거나 자애가 부족하셔도 ‘참으시어 그리 마소서’ 할 이가 없으니, 점점 영조의 자애는 부족하고 경모궁(사도세자)께서는 두렵기가 날로 심하시니 자식 된 도리를 점점 못 차리시니라. 화평옹주 계셨으면 부자간에 자애와 효도를 갖추게 하였을 것이니, 착하신 옹주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어찌 국운(國運)과 관계치 않으리오. 지금 생각하여도 애석하도다.”라 적혀있었습니다.
한편 영조는 화평옹주의 3년 상이 끝나는 달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첫 자녀이자, 자신에게는 첫 친손자가 되는 의소세손이 태어나는 경사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아는 체도 하지 않을 정도로 싫어했다고 전해지는데 사도세자가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고명 아들이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에 남자 후손이 귀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손자의 탄생에 이러한 행동은 납득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평소 영조에게 사랑받던 며느리였던 혜경궁조차도 이때는 시아버지가 두려웠다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영빈 이씨가 초산을 겪은 혜경궁을 간호하자, 영조는 화를 내며, 죽은 딸은 잊고 손자가 태어난 것만 좋아한다며 일갈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영조는 어느 순간부터 세손을 예뻐하기 시작하는 변덕을 부리는데, 이 상황이 너무 극적이었는지 이와 관련한 야사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영조가 의소세손의 어깨에 있는 점을 보고 놀라며 화평옹주도 여기에 점이 있었다며, 이 아이는 화평옹주의 환생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모의 환생이라던 의소세손은 요절한 한을 풀기는커녕 안타깝게도 아기일 때 죽게 됩니다.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파주1리 산 57-1에 위치한 화평옹주의 묘소는 부마 박명원과 합장되어 있으며, 묘소에는 영조의 친필로 비문을 쓴 묘비가 세워져있습니다. 화평옹주와 금성위 박명원은 자식이 없었기에 부마의 맏형인 박흥원의 3남 박상철을 후사로 삼게 됩니다.
1755년(영조 31년) 9월 25일,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정시를 친림하여 심이지 등 15인을 뽑았다. 합격자 중 박상철의 이름에 이르러 영조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손자가 급제하였구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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