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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더~욱 한국을 사랑한 미국 장군이 강제퇴역 당한 이유는?

  • 사회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의 사명이고, 이것이 계급사회의 질서입니다. 흔히 군대는 ‘상명하복의 세계’라고 불립니다. 사전상 ‘위에서 명령하면 아래에서 복종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복종의무 위반은 단순한 징계 사유가 아니라 처벌 사유가 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만큼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죠.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 하니까요.

여기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2성 장군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중 그 누가 중요하지 않겠냐마는 이 남자는 한국 전쟁 후, “끝까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며 미국 대통령에게 소신을 내세워 맞섰다가 강제 퇴역당하는 불명예를 안고 말았습니다.

미 육군 2성 장군 중 가장 뛰어난 덕분에 앞길이 구만리 같았던 그는 “한국인 수백만 명의 목숨과 내 별 몇 개를 바꿨다 생각하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이 더 있겠느냐?”며 평소 소신을 지킨 것을 뿌듯해했습니다. 이 남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스멘터리입니다. 1953년 ‘아이젠 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보낸 특사 미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버트슨’은 한국에 와 있는 것 자체로 가시방석 같았습니다.

한국이 그토록 원하는 ‘한미 동맹’이 자신의 손에 달렸는데 미국도 손해보지 말아야 하고, 한국도 어르고 달래야 하니 죽을 맛이었죠. 무엇보다 싫었던 것은 당시 한미 동맹을 요청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승만은 늘 호랑이 선생님 같았습니다. 자신을 앞에 세워두고 역사 강의부터 시작해 꾸짖는 것으로 시작했으니까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아느냐.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리 민족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한반도를 일본에 내주었다. 이것이 첫째 배신이요.”

“38선을 그을 때도 일언반구 없이 멋대로 소련과 합의한 것이 두 번째 배신이오.”, “이번에 우리가 결사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데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니 당신네는 세 번째 배신을 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이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느냐?”

한 가지 문구가 합의되면, 또다시 새로운 요구를 들이대는 통에 로버트슨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었죠.

그나마 합의된 항목도 “당신 말은 못 믿으니 백악관 대통령 결재받은 문서로 가져오라.”며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버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습니다.

그는 어쩌다 미 국무부 차관보라는 직책을 가지고도 세계에서 제일 불쌍한 나라 대통령에게 끌려다녔던 것일까요? 보통 ‘친미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단 이승만이지만, 사실 그의 집권기 대부분은 미국과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특히, 휴전 협정을 코앞에 둔 1953년 6월 18일,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 회의에서는 아이젠 하워가 “미국은 이승만이라는 또 다른 적을 만난 것 같다.”면서 격노하기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으로 ‘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 계획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유엔 명의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감금한 뒤, 미군정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죠. 이승만이 미국에 요구한 것은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북진에서 통일할 계획이었는데, 미국 마음대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니 앞으로 한국의 안전을 미국이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물적 인적, 소모가 너무 큰 전쟁을 끝내는 휴전 협정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휴전 협정 체결하기 전에 계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부담스러운 ‘한미상호방위조약’ 대신에 “만약 북한이 또다시 남침하면 유엔참전국들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대제재선언’을 발표하자.”고 맞섰지만, 이승만은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안전을 보장하라!”고 주장했고, 결국 미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이 한국에 특사로 파견된 겁니다.

1953년 6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무려 17일간 줄다리기 협상 끝에 양측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개 사단 규모 미군의 한국 주둔’, ‘한국군 30개 사단 규모로 증원하는 전력의 현대화 지원’을 합의했습니다.

그렇게 1954년 11월 17일부터 정식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비준됐고, 양국이 원하는 한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해졌습니다. 주한미군이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잠시 장소를 2022년 8월 19일, 미국 워싱턴 DC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이날 미국 역사상 가장 소신 있는 군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존 싱글러브가 영면에 들어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이는 한국 언론을 통해 긴급히 타전됐는데, 그의 영면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이유는 싱글러브 장군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하극상을 저지르고, 강제 퇴역당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날 거행된 안장식에는 그의 아내 래퍼티 여사가 참석했는데, 기자들과 만나 “그는 한국을 정말 사랑했다.”며, “그를 기억해줘서 감사하다.”라고 전했습니다.

사실 싱글러브 장군은 한국의 근대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을 수 있는데요. 그가 20대 초반이던 1940년대 중반, 돌연 그는 UCLA를 중퇴하고, 미 육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그리고 5년 뒤,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는데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평가되는 ‘철의 삼각지대’ 김화지구 전투에서 대대장으로 부대를 이끌고 중공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후 베트남 전쟁까지 참전한 그는 유엔사 및 주한미군 참모장으로 진급했는데, 1977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인 발표에 충격을 받습니다.

1977년 카터 전 대통령은 “32,000명 규모의 주한미군을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항명합니다.

미국 연방 헌법 제2조 2절 1항에 따르면 “대통령은 육군과 해군 그리고 소집 명령을 받은 각 주 민병대의 최고 통수권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바, 모든 군인은 대통령을 최고 상관으로 모시게 되어 있지만 싱글러브 장관은 대통령에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을 내놨죠.

당시 그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카터가 제안한 감축은 1950년 이전 미군을 감축했던 것처럼 전쟁으로 이어지는 잘못된 판단”이라며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내놨습니다.

이 인터뷰는 당시 ‘필립 하비브’ 국무부 정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미 합참의장이 특사 자격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예방하기 직전에 이뤄졌는데, 이 인터뷰를 전해 들은 카터 대통령은 엄청난 분노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즉각 싱글러브 장군을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발언 경위를 추궁당했는데요. 30분간 이어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그는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2~3년 전의 낡은 정보에 근거해 취해진 것이다, 현재 북한군은 그때보다 훨씬 강하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년 뒤 강제 퇴역하는 불명예를 안게 됩니다.

2성 장군,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까지 혁혁한 공을 세운 덕분에 미래가 창창하던 싱글러브 장군은 그렇게 커리어를 마감하게 됩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한 한국인 기자가 “그때 가만히 있었거나 ‘발언이 잘못 전달됐다’고 밝혔다면 별 몇 개를 더 달 수 있었을 텐데…”라고 위로하자,

그는 “내 별 몇 개를 수백만 명의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 이상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고 하죠.

후에 쓰여진 카터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한국은 경제력으로나 기술력으로나 충분히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지만, 싱글러브 장군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만약 당시 미군을 철수했다면 분명히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한반도로 쳐들어왔을 것.”이라며, 자신의 소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했죠. 그런데 늘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가장 큰 효과는 전쟁 억제의 효과가 아닐까 합니다.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한 것은 크게 두 번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그러니까 남한을 미군이 점령할 당시 77,000에 달하던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500명만 남기고 모조리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과 중공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기습적으로 남침해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본격적으로 주둔하게 된 미군은 1971년 ‘닉슨 독트린’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7사단(26,000명)을 철수시켰습니다.

이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발표했을 때, 북한 내에서는 철수 이후의 상황을 가정해 다양한 시나리오가 논의됐다고 하죠. 또 한 번의 기습남침이 그중 하나였고, 싱글러브 장군이 우려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한국에 머물게 됐는데 덕분에 북한의 남침을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을 비롯 미군의 오만방자함으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군의 주둔 효과는 사실 작지 않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자동 개입 조항이 없어 북한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해도 미군이 한반도 상황에 개입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이상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미국은 반드시 개입해야 한다.”라고 입 모아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북한이 함부로 미군이 주둔한 남한을 침략할 수 없는 것이죠. 또한 중국의 핍박도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필리핀의 사례에서 알 수 있죠. 현재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분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1992년 필리핀은 자국 내에서 확산에는 ‘반미감정’에 휩쓸리면서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미군을 철수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떠나자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필리핀의 스카버러섬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렸죠. 필리핀은 “법에 호소하겠다.”면서 국제상설재판소에 중국을 제소해 승소까지 했지만, 중국은 오히려 비행장까지 갖춘 해양 요새를 건설해버렸죠.

땅을 치고 후회해봐도 이미 늦었습니다. 미국도 어려운 마당에 다시 필리핀에 미군이 주둔할 리는 만무하니까요. 그런데 현재 미군이 주둔하고 있음에도 ‘한한령’을 때리는 등 함부로 하는 마당에 만약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중국은 어떻게 나올까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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