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정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궁”
숙의 문 씨는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의 후궁으로 서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의 생모였습니다. 궁녀 출신이었던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부인인 현빈 조 씨가 1751년 음력 11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며느리에게 조문하기 위해 빈전을 찾던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었다고 합니다.
당시 왕이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것은 왕실의 안녕을 위해 당연한 일이었지만, 시기상 상중이었으며 심지어 영조가 맏며느리인 현빈을 무척 아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예법에 맞는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문 씨는 1752년, 첫딸 화령옹주를 낳게 되고, 다음 해인 1753년, 정4품 소원에 책봉됩니다. 당시 영조는 승지 윤광의에게 그녀의 후궁 책봉 교지에 어보를 찍으라 명했는데, 이때 그가 “후궁의 봉작을 정해진 절차에 따르지 않고 승지를 시켜 갑자기 어보를 찍게 하면 반드시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라며 명을 받들지 않습니다.
이에 영조는 고집을 꺾지 않고 다른 승지를 시켜 어보를 찍게 되는데, 이는 절차를 무시하고 문 씨를 곧바로 후궁에 올릴 정도로 그녀에 대한 영조의 총애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명을 어긴 승지 윤광의를 기특하게 여긴 영조는 그 정직함이 가상하다 여겨 이조참의에 제소합니다.
문 씨는 이후에도 한결같이 영조의 총애를 받아 1771년 종2품 숙의로 진봉됩니다. 두 딸을 낳은 숙의 문 씨는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견제하며 자주 모함했다고 전해지며, 사도세자 역시 처음부터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형수의 장례식 중에 젊은 궁녀를 후궁으로 들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형수 현빈 조 씨는 사도세자를 아꼈던 왕실 여인 중 한 사람이었고, 그에게 있어서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존재였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 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문 씨가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면 세자가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만큼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관계가 최악이었고, 영조가 문 씨를 그만큼 총애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문 씨가 간악한 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영조만 모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도 문 씨의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숙의 문 씨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 씨에게 대들었다가 대왕대비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행동은 왕실 예법상 세자의 어머니에게 해서는 안 될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었고, 심지어 품계도 영빈이 높았기에 대왕대비는 이를 알고 노발대발하여 세자와 영빈 앞에서 숙의 문 씨의 종아리를 때리게 됩니다.
그리고 숙의 문 씨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점점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고,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세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숙의 문 씨가 그녀의 오빠인 문성국과 재상 김상로 등과 결탁하여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하였다는 혐의로 숙의 문 씨의 작위를 삭탈하여 폐서인으로 만들고 사저로 내쫓게 됩니다.
또한 그녀와 함께 일을 모의한 문 씨의 오빠 문성국은 노비로 만든 후 부인과 함께 처형시키고, 문 씨의 어머니는 노비가 된 후 제주도로 보내집니다. 이후 숙의 문 씨는 ‘문녀’로 불리게 됩니다.
그녀와 그녀의 오라비인 문성국에 대한 정조의 분노는 <정조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 문성국의 하늘에 맞닿고 땅에 극하는 죄악은 내가 마음을 썩히고 뼈에 새기며 분을 품고 애통을 씹게 되는 것이다. 무릇 저 문성국은 천한 종으로서 살모사 같은 성질을 가지고 안으로는 요망한 누이를 끼고, 밖으로는 반역한 재상과 결탁하여 무릇 낮이나 밤이나 준비하는 것은 찬탈하려는 흉계가 아니면 곧 시역하려는 음모였다.“
“문침도 제때 하지 않고, 친선도 제때 하지 않고, 심하게는 인명을 살해하고 여색을 낚아채기까지 한다는 말들을 하며 생판으로 꾸며대어 하늘을 현혹하는 흉계를 부리려고 했었으니, 이는 다만 날조한 짓의 한 가지 단서이고 근거 없이 수군거리는 짓의 첫 단계일 뿐이었다.“
“문성국의 죄는 비록 천만 번 주륙한다 하더라도 어찌 천지에 가득 찬 죄악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고 신명과 인간의 분개를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겠는가? 매양 생각이 한번 미칠 적마다 거듭거듭 마음이 써늘해지고 뼈가 떨리게 된다.”
이렇게 음력 5월 13일 정조는 장문의 교지를 내려 문 씨의 죄를 포고하고 다음 날 그녀를 도성 밖으로 쫓아냈으며, 음력 8월 10일, 영조의 국상이 끝나자 정조는 문 씨를 사사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한편 문 씨의 혈육 중 유일하게 정조 때까지 살아남은 화령옹주는 어머니 문 씨의 죄로 인해 대신들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되었으나 정조는 혈육의 정을 이유로 들며 화령옹주의 작위를 삭탈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781년 문 씨의 사위이자 화령옹주의 남편인 심능건이 죽은 문 씨의 생전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했다가 탄핵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게 됩니다. 또한 문 씨의 작은 딸 화길옹주는 혼인한 지 7년 만에 사망했는데, 그녀의 장례에 무려 10만 냥이 지출되었던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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