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연산군의 첫째 딸 휘신공주는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과 폐비 신씨의 장녀로, 어렸을 때는 휘순공주였으나 출가 후에는 휘신공주로 봉호를 바꾸게 됩니다.
1501년, 구수영의 아들 구문경은 휘신공주의 부마로 간택되면서 능양위가 되었고, 다음 해인 1502년, 막 11세가 되었던 공주와 혼인하게 됩니다. 이후 부마 간택이 결정되면서부터 짓기 시작한 휘신공주의 집이 완성되었고, 1503년, 휘신공주는 본격적인 혼인 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연산군은 사랑하는 휘신공주의 집을 넓히기 위해 주변 수십 채의 가옥을 값을 치루고 헐게 하였고, 이듬해인 1504년에는 관청인 평시서의 위치가 휘신공주의 집을 압박한다는 이유로 그 터를 공주에게 주고 평시서를 옮기게 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갑자사화 때 처형된 임희재의 부인이자 부마 구문경의 누이인 구순복이 남편의 죄로 인해 연좌되어 노비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되지만, 공주의 뜻을 고려해 연좌시키지 않고 놓아주게 됩니다.
휘신공주에 대한 연산군의 특혜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성종 대에 관노비를 사사로이 점유하여 금고형에 처해진 강학손은 휘신공주에게 뇌물을 주는 방법을 통해 연산군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며, 휘신공주 유모의 남편인 이팽동 등은 공주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휘신공주의 노비는 잡역에 동원되지 않았고, 토지에도 세금이 붙지 않는 각종 혜택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1506년, 조선시대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인 연산군은 폐위되었고, 이복 삼촌이었던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휘신공주 또한 폐서인이 됩니다.
이에 시아버지 구수영은 자신의 아들이 죄인의 사위가 되었다면서 휘신공주와 구문경의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고, 곧 이를 허락받게 됩니다.
참고로 휘신공주의 시아버지였던 구수영은 세종의 아들이었던 영응대군의 사위였으며, 연산군 재위 시절 장악원 제조가 되어 흥청, 운평, 광희 등 2,000명이 넘는 기녀를 양성하여 연산군의 방탕을 도왔으며, 그 공로로 한성부판윤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연산군의 딸인 휘신공주와 자신이 아들인 구문경이 혼인을 함으로써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하지만 중종반정의 거사가 계획되자 이에 가담하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 되는 기회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반정 수습과정에서 휘신공주의 집은 공신 중 대표적인 인물인 박원종에게 주어졌으며, 그녀의 많은 재산 또한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에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휘신공주는 왕실 여인이 당할 수 있는 온갖 비참한 꼴을 다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2년 후인 1508년, 사헌부 대사헌이었던 정광필은 부부는 역모를 꾀한 이의 자식이라도 국가에서 이혼시킬 수 없는 것이라며 휘신공주 부부의 재결합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중종은 부원군 이상의 신하들이 참여해 이 안건을 논의하도록 하였고, 결국 출가한 딸은 친부 쪽의 죄에 연좌시키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휘신공주 부부는 재결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정 당시에 몰수된 휘신공주의 집을 대신하여 빈집을 주거나 아니면 빈집에 해당하는 면포를 주는 방식으로 보상해주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공주의 신분만은 끝내 되찾지 못하게 되면서 평생 구문경의 처로 불리게 됩니다.
휘신공주의 묘소는 남편 구문경의 묘소와 함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77번지에 있으며, 그녀는 구문경과의 사이에서 1남 구엄을 두게 됩니다.
한편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아들들도 처형되는 바람에 연산군이 죽은 후에는 그의 제사를 지낼 후손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휘신공주와 구문경 사이의 유일한 아들인 구엄이 연산군의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를 하게 되는데, 이 덕분에 구엄은 유배를 갈 때에도 가까운 곳으로 배정받는 등 조정으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구엄 또한 제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연산군의 제사는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참고로 이안눌의 증조할아버지인 용재 이행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연산군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았고, 이안눌의 아버지인 이형의 친외조부인 수찬 박은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연산군에 의하여 참수되어 효시 당했기에, 이러한 사연을 가진 그의 가문에서 제사를 물려받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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