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이 끔찍하게 생각하던 한 외국인이 있습니다. 눈 파랗고 콧대 높은 이 외국인은 일본군은 물론이고 일본 총리를 비롯한 고위급 면전에 대고 당장 만행을 중단하라고 호통치는 것은 기본이요, 3.1 운동 사진을 찍어 전 세계에 배포하는 것은 물론, 서대문형무소를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유관순 열사를 면담하는가 하면, 외국인 주제에 자꾸 “나는 오직 절절히 한국을 사랑하며 조선이야말로 나의 조국이다”라고 떠드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요주의 인물이었죠. 이에 조선 총독부는 그를 두고 “교활한 음모자요,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라고 낙인찍어 항상 감시하고 괴롭혔습니다. 조선 침략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일본 고위급 간부들의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고 조선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습관처럼 말하던 이 눈 파란 외국인은 누구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오늘은 기분 좋은 소식을 먼저 전해드립니다. 우선, 어제부로 저는 ‘다이아 TV’ 소속 인플루언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 채널을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소속사가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저는 오롯이 영상 제작에만 신경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영상을 준비하면서 디씨멘터리 채널이 드디어 구독자 50만 명에 도달했습니다. 모든 구독자분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지금껏 저를 믿고 구독해 주신 만큼 앞으로 100만, 200만을 넘어 더 유익한 지식 전달 채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짜 뉴스가 아닌 철저한 사실 바탕 위에 여러분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소식들을 전달하도록 더 신경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5년, 미국에서 방송된 프리즌 브레이크는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형을 구하기 위해 ‘마이클 스코필드’는 자진해서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감옥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면서 전 세계적으로 ‘스코필드 열풍’이 광풍처럼 몰아쳤었죠. 그래서 한국 팬들은 그에게 석호필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었습니다. IQ 300이 넘는 천재적인 두뇌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탈옥을 꿈꾸는 석호필이 만약 실제 인물이었다면 교정 당국과 정부에서도 얼마나 끔찍한 존재였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조선 땅에도 석호필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의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였으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운동은 1919년 3.1 운동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독립운동이 태동했으며 결국 1945년, 광복을 맞이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니까요. 1919년 1월 20일,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는 체계적으로 비폭력적인 조선 독립운동을 결의하면서 대연합 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는 타 종교와의 접촉을 시작합니다. 기독교를 시작으로 불교, 유림 측과 접촉했으나 유림 측과는 성사되지 못했죠. 결국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 15명, 이승훈 등의 기독교 16명, 한용운 등 불교계 2명까지 33명으로 구성된 민족 대표단은 3월 1일 오후 2시, 독립 선언서 낭독을 통해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했고 이를 각국 대사관, 정부, 신문사, 잡지, 학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독립 선언서 낭독은 일본 경찰에게 비상이었습니다. 3월 1일, 서울 등을 시작으로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하더니 4월 말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무려 110만 명이나 참여한 초대형 규모의 만세운동이었으니까요. 당시 조선총독부 및 일본 경찰은 독립선언서의 존재는 물론, 이러한 대규모 운동의 기미조차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할 만큼 비밀스럽게 진행됐었습니다. 그러나 쥐도 새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했던 이 거사를 미리 통보받은 유일한 외국인이 바로 스코필드입니다. 2월 28일 저녁,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원문과 함께 “내일 독립선언식과 만세 시위가 있을 예정”이라는 계획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 백악관으로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죠.
이를 준비하던 중 3월 1일 오전에는 다시 한번 그를 찾아와서는 “오늘 오후 2시에 파고다 공원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있을 예정이니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했죠. 스코필드는 아무 망설임 없이 자전거를 타고 파고다 공원으로 가 만세 시위 현장을 담았고 한국의 실상을 증거 사진과 함께 해외에 알렸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3.1 운동 초기 사진은 전부 그가 찍은 사진이죠. 그래서 스코필드는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기도 하죠. 그렇다면 당시 가뭄의 콩 나듯 볼 수 있었던 이 외국인은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된 것일까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는 1907년,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토론토 대학교에서 세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다 1916년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로 조선에 와,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게 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한국을 방문한 그 순간부터 스코필드는 묘하게 한국인에 대한 사랑이 싹텄죠. 그는 3.1 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을 뿐 아니라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방화 사건’ 현장을 직접 찾아 일제의 만행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죠. 그리고는 이를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영자 신문 ‘상하이 가제트’ 1919년 5월 27일 자 기사로 실었죠. 그 무렵 작성한 또 다른 ‘수촌 만행 보고서’는 비밀리에 해외로 보내져 미국에서 발행되는 ‘Presbyterian Witness’에 1919년 7월 26일 자에 실렸습니다. 일본 경찰은 3.1 운동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들을 강제로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는데 조선총독부 기관지나 다름없는 ‘서울프레스’가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를 내보내자, 이를 비판하고 직접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조선인들을 위로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였던 ‘노경순’을 비롯 형무소 당국을 압박해 수감되어 있던 ‘유관순’ 열사 등을 직접 만나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그 직후 그는 총독부를 직접 찾아가서는 “감옥 환경을 개선하라”며 “고문 등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라고 강하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일제의 비인륜적인 만행을 조사해 영국, 캐나다, 미국 등에 보냈고 이 자료가 1919년 7월에 미국에서 ‘한국의 상황’에 증거 자료로 실리기도 했죠. 현재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온라인 도서관에는 ‘한국 독립운동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 영문 사진첩의 사진은 전부 스코필드가 찍은 것이고 이 사진들은 후에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까지 전달됐습니다.
사실 그는 선교사였지만 일본군을 강하게 압박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1919년 8월에는 한국 선교사 대표로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사 8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고, 당시 ‘하라 다카시’ 일본 총리를 포함 일본 고위급 정치인들을 만나 “조선을 당장 원상태로 돌려놓으라”라고 강압하기도 했고 틈날 때마다 일본군을 세워놓고 호통치기 일쑤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하라 다카시’ 수상은 그와의 만남을 두고 “조선 선교사 캐나다인 스코필드가 내방해 조선의 자치를 허락하라고 했으나 나는 반대를 표했다”는 취지로 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코필드 역시 이날의 만남을 캐나다 ‘글로브’지에 실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만약 일본 정부가 동화 정책을 고집한다면 결과는 유혈 혁명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렇듯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일본 총리를 세워두고 협박을 일삼는 스코필드를 ‘가장 과격한 선동가’라고 일제가 낙인찍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죠. 실제로 이후 그는 일본의 미움을 사 항상 감시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사실 스코필드는 대학 2학년 때 심한 열병을 앓은 후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생겼습니다. 소아마비가 온 것이죠. 이 소아마비는 당시 의료 기술로는 치료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불치의 병이었기 때문에 이후로 그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몸이 불편한 와중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써 준 것입니다.
그런 스코필드가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했던 것이 바로 언론입니다. 일제 만행과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전 세계 언론에 호소함으로써 한국의 상황을 세계에 알렸죠. 일례로 그는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하는 기사를 ‘재팬 에드버타이저’ 1920년 3월 12일부터 3일간 연재했었는데, 당시 한국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펼치던 친일 선교사 ‘헤론 스미스’가 즉각 이를 비판하고 일제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때마침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기사에 대한 반박 기사, ‘한국: 프랭크 헤론 스미스 목사에 대한 답변’을 내기도 했죠.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론에 기고문을 냈습니다. 1920년 7월 7일, ‘한국 여성들은 힘을 가지고 있다’를 시작으로 7월 10일, ‘압제자의 멍에 아래 신음하는 한국’, 7월 17일,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 9월 4일, ‘한국의 미래: 하라 일본 총리와의 인터뷰’까지 지속적으로 언론을 활용해 한국의 상황을 알렸죠. 그러다 도저히 한국을 잊지 못했던 지 1922년부터는 “10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월급의 3분의 1을 저축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모인 덕분에 4년 만인 1926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동아일보에 ‘조선의 친구여’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보내 한국에서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한국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격려해 주었고, 1931년에 보낸 ‘경애하는 조선 형제에게’라는 공개 편지에서는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 생각된다”며 자신에게 있어서 조선은 또 다른 조국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그의 태도는 급변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고 기독교계를 비판하는 등 한국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죠. 하지만 이런 쓴소리는 한국이 미워서가 아니라 어렵게 광복을 되찾았음에도 제대로 된 길을 가지 못하고 헤매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이었습니다. 인트로에서 언급했듯이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입니다. ‘돌 같은 굳은 의지로, 강한 자에게는 호랑이의 강인함으로 저항하며, 어려운 사람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강한 의지로 일본의 만행에 저항하며 어려운 이들을 도왔던 그 덕분에 한국이 광복을 좀 더 빨리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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