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서라고 불리는 책이 있습니다. 경쟁자 사이에서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읽는 책으로, 저자의 성공 비결이나 비법을 담은 책입니다. 자기 계발서는 전 세계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유독 인기가 높습니다. 오죽하면 베스트셀러 네 권 중 한 권 자기 계발서일 정도입니다. 자기 계발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순간 웬만한 판매량은 따놓은 당상인 셈이죠.
2010년 12월 24일 출간된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은 자기 계발서 중에서도 독보적인 기록을 남겼는데요. 출간 한 달여 만에 15만 부 이상을 팔아치웠을 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이용된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치열한 경쟁 사회 속 젊은이에게 전하는 격려와 위로가 담겼습니다. 인기가 많은 만큼 비판에서도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한국의 자기 계발서에 한 획을 그은 책이기는 합니다.
‘비기(祕記)’ ‘비결(祕訣)’ ‘비법(祕法)’은 그 단어만으로도 묘한 매력을 지녔습니다. 이러한 단어에 특히 열광하는 것은 삶에 지치고 힘들고 고단한 백성인데요.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에게 앞날을 예언한 비밀의 책이 있다면 어떨까요?
여기 조선시대 조선의 미래를 예언한 ‘비서(祕書)’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읽어서는 안 되었고, 그 누구도 소지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 최고의 금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조선왕조실록 정조 7년(1783년) 1월 15일의 기록을 보면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이 역적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임금께 고하며 축하 인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 같은 것이었는데 이날 정조는 기쁨에 취해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했습니다.
역모를 꾀하거나 국가 전복을 노린 중범죄자 등을 제외하고 웬만한 죄인은 모두 풀어 주라는 것으로, 이는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난리가 토벌됐기에 정조는 이렇게 큰맘을 먹고 사면령을 반포했던 것일까요?
그로부터 1년 전 1782년 창덕궁 인정전 앞에는 한 죄인이 포박당해 무릎 꿇린 채 임금을 마주합니다. 정조는 친히 천민 출신의 문인방이라는 인물을 심문하고 있었지만 그는 임금을 앞에 두고도 당당했습니다.
실록 정조 6년 11월 20일의 기록에 따르면 문인방은 “신이 역모를 한 것은 이미 박서집의 고발에서 드러났고, 또 백천식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낱낱이 바른대로 불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역모 사실을 실토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역모 고백은 충격적입니다. 자신은 무리를 이끌고 현재의 양양, 강릉, 원주를 거쳐 동대문으로 진출해 도성을 함락시키려 했다는 것인데 이는 3대를 멸족시켜야 할 그야말로 역모 중의 역모입니다.
그는 이미 이 계획을 위해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의 역할을 명확히 정해 두었다고 실토했는데요. 충격적인 것은 이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책 한 권이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조선 시대 최고의 금서 ‘정감록’입니다.
흔히 영조를 거쳐 정조 시대까지의 시기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이 당시 문화가 부흥했다는 것을 전제로 둘 정도죠. 그런데 이 르네상스 시기에 역모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문인방의 역모 사건(1782년)’이 수포로 돌아간 후 2년 뒤, 정조 9년(1785년) 3월에 또 다른 역모가 발발합니다.
지리산 청학동 일대에서는 정감록을 사상적 틀로 세우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는 역모가 발각됐는데요. 한때 정조가 자신의 근위대장으로 삼았던 홍국영이라는 인물의 권세가 너무 커지자 정조는 그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했는데요. 이에 원한을 품은 사촌 동생 홍복영이 새로운 정치판을 세우겠다며 역모를 꾀하다 발각된 겁니다.
‘홍복영 옥사 사건’ 또는 ‘문양해 역모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역모의 배후에도 역시 정감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리산의 선인’ 또는 ‘지리산의 산신령’ 등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소문을 퍼뜨렸는데요. 이게 바로 장차 나라가 셋으로 쪼개질 것이라는 ‘동국삼분지설(東國三分之說)’입니다.
조선이 삼국으로 분열될 징조는 산천과 천문, 지리에 나타나 있는데요. 이 셋으로 쪼개질 나라를 가질 인물은 강원도 통천의 유 씨, 전라도 영암의 김 씨와 정 씨라고 했죠. 그중 정 씨는 남해의 어느 섬에 숨어 있는데, 때가 되면 등장해 전국을 통일한 후 나라를 새로 세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성혁명, 즉 이 씨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정 씨 왕조의 출현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역모가 아닐 수 없는데요. 그렇다면 ‘문인방 역모 사건’이나 ‘문양해 역모 사건’ 등 3년 주기로 일어난 역모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정감록은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토록 빈번하게 역모 사건의 명분이 되었던 것일까요?
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존의 정치, 안보, 사상, 풍속 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법률이나 명령에 의해 간행하거나 소유하거나 열람하는 것 금지한 책자를 말하는데요. 조선시대 최고의 금서는 단연 정감록입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로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온 예언서입니다.
그 종류도 족히 50종이 넘는데 정작 저자의 이름이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죠. 조선에서 발생한 역모 사건 중 최초로 정감록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사건이 위에서 언급한 ‘문인방 역모 사건’인데요. 이 책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산천의 기운이 계룡산으로 들어오니 정 씨가 800년 도읍할 땅이로다”라는 것입니다. 이 씨 왕조가 운명을 다하고 정 씨 왕조가 계룡산에 새롭게 들어선다는 겁니다.
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보통 계룡산을 최고로 꼽습니다. 높이는 해발 800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산 전체가 하나의 통바위로 되어 있어 어마어마한 자기장을 가지고 있다고 보죠. 이렇게 자기장이 강한 산에는 무당, 도사, 승려가 몰려들기 마련인데요. 실제로 TV에 등장하는 많은 무속인이 주기적으로 계룡산에 기도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계룡산의 연천봉 정상 바위에는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를 풀어 보면 의미심장한 글귀가 숨겨져 있습니다. 건국대학교의 조용헌 석좌 교수는 이를 “조선 왕조가 427년 만에 종말을 맞이한다”라는 의미로 풀었습니다.
방백(方百)은 네모진(方) 백(百)이라는 뜻인데요. 동서남북 4방이 100개라는 뜻으로 이는 400을 나타냅니다. 마(馬)는 자축인묘진사오미로 세면 오(午)에 해당하는데요. 오가 바로 말입니다. 오는 십이지 가운데 7번째에 해당하죠. 7을 나타냅니다. 각(角)은 뿔입니다. 뿔은 대개 2개이므로 마각은 12입니다. 따라서 방백마각이라는 글자는 472를 의미합니다.
구혹(口或)을 결합하면 나라 국(國)이 되고, 화생(禾生)을 결합하면 옮길 이(移)로 통용됩니다. 그러므로 ‘구혹화생’을 풀면 나라를 옮긴다는 의미가 됩니다. 계룡산 꼭대기 연천봉에 새겨진 8개의 글자는 조선이 472년 만에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감록은 두 인물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씨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 씨의 조상이라는 ‘정감’이라는 인물이 금강산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대화 형식의 이 책에서 이 씨 조선의 조상인 이심은 항상 질문자가 되고 정 씨 조상이라는 정감은 항상 해답자가 되어 왕조나 국군의 흥망성쇠에 대해 풍수지리에 근거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이 책이 금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조선을 이끄는 이 씨 왕조의 몰락을 예언하고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예고하니, 임금을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백성 사이에서 이런 예언서가 도는 것은 그 자체로 불쾌하고 불길한 징조니까요. 물론 풍수지리, 도교 등을 기반으로 한 허무맹랑한 예언서라고는 하지만 이 정감록이 백성 사이에서 몰래 읽혔던 이유는 당시 백성들이 오랜 왕정과 당파 싸움에 시달리며 고달픈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감록은 억압당하는 피지배자 계급인 백성에게 “이 씨가 망한 다음 정 씨가 등장해 세상을 구원하여 만민 평등의 세계가 열린다”라는 유토피아를 제시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있어 정감록은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희망과 꿈이었던 겁니다. 지금 읽을 수 있는 정감록이 초기 버전의 정감록과 다른 것도 매번 백성들의 바람이 계속 보태졌기 때문입니다.
정감록이 백성들 사이에서 빠르게 읽히기 시작한 시기는 꽤 아이러니합니다.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즉 한글을 만들어 배포했다는 점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영조와 정조대왕 시기, 즉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에는 사설 교육기관인 서당이 급속도로 확산됐습니다. 서민에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교육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기 때문이죠.
동시에 세종대왕 시절부터 보급된 한글을 읽을 줄 아는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홍길동전, 춘향전, 심청전 등 한글 소설이 널리 보급됐는데요. 백성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금서인 정감록의 한글판이 생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자는 해석이 필요하며 헷갈릴 수 있는 글자가 많지만 한글은 이를 압축하여 이야기하니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었죠. 일반 백성은 어려운 한자로 된 10권짜리 정감록은 읽지 않아도 한 권짜리 한글 정감록은 하룻저녁이면 족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글의 보급이 조선의 몰락을 예언한 정감록의 보급에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후대에 자신이 만든 한글이 조선을 몰락시키려는 혁명에 힘을 실어줄 것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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