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한중수교로 시작된 한류라는 단어는 이제 익숙하다 못해 우리나라 산업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름만 살짝 달라질 뿐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문화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수준에 이르렀죠. 다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한류라는 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사용했다고 해서 최초의 한류가 그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인데요. 최초의 한류는 지금으로부터 천년도 넘은 삼국시대에 시작됐죠. 특히 비운의 왕국 백제가 그 주인공입니다.
당시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서적과 문물을 받아들여 유학과 불교를 백제 사회에 맞게 받아들여 발전시켰는데 당시 일본은 이제 막 국가로서 틀을 잡기 시작했으므로 백제에 비해 기술도 문화도 상당히 뒤처져 있었는데요. 일본은 재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외국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그 파트너로 백제를 선택했습니다.
이에 백제는 일본과 수교를 맺고 많은 기술자와 학자를 일본으로 파견했는데 그중 왕인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먼저 일본에 갔던 아직기의 추천으로 일본 왕실의 초청을 받아 건너가게 됐는데 그는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건너가 까막눈이었던 일본인들에게 학문을 전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일본 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데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왕인은 분명 백제인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왕인과 관련된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사기나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 일본 측 사료에서 더 활발히 등장하는, 요즘 말로 하자면 진정한 최초의 한류스타입니다.
그가 일본에 한자를 전해주면서 이것을 변형해 일본 글자의 원형인 가나가 창안됐고, 일본 고유의 시조로 불리는 와카를 창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업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떠받들며 열도 곳곳에 왕인 신사를 세우고 왕인 축제를 거행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을 배출한 백제는 슬프게도 그 왕국 전체를 잃어버렸습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의 국제전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백제왕과 귀족들 상당수가 일본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수많은 기록과 유물이 소실됐죠.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제는 동아시아 최고의 문화 기술 대국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1993년 12월 12일까지는 말이죠.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3년 12월 23일, 주요 일간지들의 1면 톱기사는 상당히 이례적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늘 1면을 차지해 오던 단골 주제가 아닌 문화재 발굴과 관련된 기사가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문화재가 발굴됐길래 1면을 차지했던 것일까요? 그로부터 8년 전, 1985년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해 겨울 충남 부여군은 ‘잃어버린 왕국’ 백제를 기억하자며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논으로 사용됐던 이 지역에는 워낙에 물이 많이 났고 이를 빼내기 위해 배수로 공사도 함께 시작했죠.
그런데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연화문와당, 즉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가 몇 점 발견됐죠. 이런 기와를 썼다면 분명 품격 높은 건물이 무너진 것이라 확신한 당국은 즉각 주변 논을 포함한 사유지 3,000평을 매입했습니다.
그러고는 1993년 10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됩니다. 이 조사는 국립부여박물관이 맡았는데 조사비는 고작 2,880만원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이 비용은 개인으로 치자면 꽤 큰돈이지만 드넓은 논밭에 발굴 조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용인데요.
그래서 원래 12월 5일까지 조사를 종료하기로 허가받았지만, 배짱을 부려 벌써 일주일도 넘게 허가받지 않은 지역까지 추가로 조사 중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문화재보호법으로 고발당할 일이지만 그 비용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신광섭 당시 부여박물관장은 자신의 운을 내걸었죠. 그러다 한 수혈해서 심상찮은 기운이 감지됩니다.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진흙이 가득 찬 구덩이를 종이컵으로 한 컵씩 퍼내고 있었는데 언뜻 금빛을 띤 동물무늬가 보인 겁니다. 사자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었는데 처음엔 이것이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무엇인가를 덮는 뚜껑이 얻습니다.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 생각한 조사단은 즉각 야간작업에 돌입했고, 그 추운 엄동설한 밤중에 맨손으로 차가운 물이 나오는 진흙을 연신 퍼낸 후 그 주인공을 끌어냈습니다.
지금은 야간에 발굴한다는 것, 심지어 엄동설한에 맨손으로 진흙을 걷어 내도록 작업을 지시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 신광섭 관장은 자신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심상치 않아 보이는 유물을 그대로 두고 내일을 기약했다가는 그 정보가 새어 나가 도굴꾼의 손에 빼앗길지도 모를 일이고 그랬다면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는 눈으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백제 문화의 진수 금동대향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출토된 대향로는 즉시 차에 실어 박물관으로 가져가 미지근한 물로 씻어 미지근한 물에 적신 면봉으로 이물질을 닦아낸 대향로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대단한 자태를 뽐냈습니다. 높이 61.8cm에, 무게 11.8 5kg, 몸체 지름 19cm라는 완벽한 외형을 갖춘 향로는 문양 하나마다 대단한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신선이 보이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승이 보이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하나하나 조각되어 있었죠. 향로는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물건을 말합니다. 이런 물건은 대부분 고온다습한 기후로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는 인도에서 크게 성행했는데 향을 피우는 의식이 단순히 냄새와 습기를 없애는 것뿐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신을 태워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향로 자체는 인도 외에도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불교를 받아들인 국가에서 발견되는데 백제 금동대향로가 유독 특별하고 놀라운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와 도교가 결합된 형태를 보이기 때문인데요. 어떻게 그럴까요?
우선 대향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힘껏 날아오르는 봉황으로 이루어진 뚜껑, 똬리를 튼 용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받침대를 포함해 신선계, 인간계, 저승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뚜껑 꼭대기에는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 있게 서 있으며,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닮았고, 받침대는 그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을 치솟듯 떠받는 한 마리의 용이 되었습니다. 봉황의 가슴 상단에 두 개 구멍과 몸체에 구멍을 5개씩 2단으로 뚫어 향 연기가 자연스럽게 피어오르도록 했습니다.
연기가 밖으로 나오도록 하는 구멍은 7개이고 나머지 5개 구멍은 공기를 향로 안으로 스며들게 해 향이 더 잘 탈 수 있도록 설계해 과학 기술까지 겸비했습니다. 특히 도교에서 용은 음을, 봉황은 양을 상징하는데 이 향로 하나에 음양오행설을 심오하게 표현하였죠.
총 74곳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해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16명의 인물상, 꼭대기의 봉황, 받침대의 용까지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에 괜히 이 향로를 동아시아 고대 금속 공예의 최고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대기술로 조각하려 해도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이 기술이 1,400년 전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이 향로는 어떻게 1400년의 시간 동안 완벽히 보존될 수 있었을까요? 첫째 비결은 진흙입니다. 향로를 둘러싼 진흙이 공기를 완벽히 차단했기 때문에 진공상태가 되었고 이로써 부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진짜 비밀은 제작 기술 덕분입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구리 85%에 주석 15%를 합금해 형상을 만든 후 ‘수은아말감도금법’이라는 제작 기술을 썼습니다. 백제 장인은 수은과 금을 섞어 가열한 후 이를 헝겊으로 짜내 아말감을 추출한 후 향로 표면을 얇은 두께로 균일하게 도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향로를 가열하면 수은은 증발하고 미세한 금 입자만 표면에 남아 밀착되는 기법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백제가 얼마나 뛰어난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향로는 왜 백제시대 사찰이었던 땅속에서 발견된 것일까요? 1400년 전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3년이고 나당연합군의 공세는 의자왕 20년인 660년입니다. 당시 백제 왕릉을 지키던 스님들은 임금이 제사 때마다 향을 피우던 이 향로를 뺏기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전쟁은 곧 끝날 것이라 생각했지 이 전쟁으로 백제가 멸망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대향로를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쳤을 텐데 나당연합군이 이 사찰을 전부 불태웠으니 그대로 폭삭 무너져 1400년을 보낸 겁니다. 사실 백제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백제가 멸망할 것을 예상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의자왕 시대의 백제는 워낙에 강성했기 때문에 신라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일례로 신라의 성 40여 개를 함락시키는 등 오히려 신라가 멸망할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당나라가 백제에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 돌려주지 않으면 신라의 요청대로 백제와 결전을 벌일 것’이라는 협박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죠. 그리고 이 말은 현실이 됐습니다. 백제는 이 협박 편지를 받은 이듬해까지 당나라에 조공을 보낸 후 사실상 국교를 단절시켰고 마침내 660년이 됐습니다.
나당연합군과 엎치락뒤치락하던 백제는 일본과 연합해 최후의 일전을 치렀으나 패배했고 백제왕을 비롯 상당수가 일본으로 망명해 백제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죠.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굴된 후 국립중앙박물관은 역사상 최초로 오로지 백제 금동대향로 한 가지 유물만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어마어마한 관람객이 몰렸는데 아마 백제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는 많은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종종 발굴되는 유물은 백제가 얼마나 선진국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류의 뿌리와 정신이 그때 백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반도 최초의 한류 백제, 앞으로 더 많은 발굴을 통해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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