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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전재산을 쏟아부은 조선 최고 갑부 6형제

  • 지식

보통 독립운동가란 ‘어떤 국가 또는 세력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강제 점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지배를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곤란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목숨 걸고 덤벼드는 이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으니까요. 반면 지배당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목숨 걸고 기어코 독립을 쟁취해내니까요.

한국에서는 19세기 중엽 개항 이후로 1945년 광복까지 일제강점기 시절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해 한민족의 독립을 수호해낸 인물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했지만, 이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한국의 독립은 1945년이 아니라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분들 중 조선 시대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가 집안답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자랑했지만 모든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굶어 죽은 한 가족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독립운동가의 사연을 소개해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한국어로 ‘거주지’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Habitat’가 있습니다. 1976년부터 미국에서는 ‘해비타트 운동’이 시작됐는데 미국인 변호사 ‘밀러드’와 그의 부인 ‘퓰러’ 여사가 텍사스에서 여러 사람의 돈을 모아 집을 지어 준 후에 무이자로 천천히 갚아 가도록 한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이 운동은 상당한 호응을 얻어 전 세계로 뻗어나갔는데 한국에는 1989년 고왕인 박사가 설립 준비에 착수해 1992년에 ‘해비타트 한국 운동 본부’가 발족되었고 우리에게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안락한 공간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집은 가난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자 한 가족의 따뜻한 보금자리입니다. 이에 한국 해비타트 역시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집과 마을을 지어 희망을 전하고 있는데요. 2008년, 천 번째 집을 헌정했고 2011년, 2천 번째 집에 이어 2020년에는 한 해에만 346세대의 가족이 안락한 보금자리를 얻었습니다. 최근 한국 해비타트에서는 특별한 캠페인을 진행 중인데 바로 대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분들의 후손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입니다. 정말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했던 분들의 후손은 하나같이 가난하다는 점입니다.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대한 독립을 가져왔지만 왜 이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지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기부와 후원으로 운영되는 한국 해비타트지만 문자를 보내는 것만으로 자동으로 2천 원을 후원하면서 3.1 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한용운 등의 책갈피 세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의 애국심을 잊지 말자는 취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위에서 잠시 말씀드렸다시피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목숨과 전 재산을 바친 이유로 그 후손들은 상당히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후손이 가난하게 살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모든 재산을 쉽사리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 명문가로 태어나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끝내 굶어 죽은 독립운동가, 아니 독립운동가 가족이 있습니다. 지난 2015년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조진웅 등 명배우들이 출연해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은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 제거를 시도하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930년대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신흥 무관학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실존했던 기관들이 등장하는데요. 극 중 신흥 무관학교 출신 추상욱을 연기했던 배우 조진웅은 일명 속사포 역할을 맡았는데 툭하면 “나 신흥 무관학교 출신이야”라며 자신의 출신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흥 무관학교란 1911년 만주에서 조직되어 1920년까지 운영된 항일독립군 양성기관입니다.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 무관학교는 독립군 사관을 길러내는 독립군 양성소였는데 신흥 강습소로 출발해 약 10년간 3,500명의 독립군 사관을 배출해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요. 아마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화끈하게 일본군을 섬멸시킨 전투로는 ‘청산리 대첩’을 꼽을 텐데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연합부대가 중국 길림성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섬멸했는데, 당시 2,500명으로 5만 병력을 맞아 무려 3,300명을 제거했죠. 이는 한국 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 대부분 신흥 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입니다. 대부분 북로 군정서군의 핵심 병력으로 일본군 섬멸에 가장 중요한 선봉에 섰죠. 그렇다면 이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우당 ‘이회영’과 그의 6형제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잘 살았지만 가장 불쌍하게 생을 마감한 이 씨 6형제죠. 6형제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잘 알려진 오성 이항복에서 시작해 9대조를 제외하고는 전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명문가 자제들이며 어마어마한 부를 지녔었습니다. 현재 명동성당 앞 YMCA 자리에 살았는데요. 이들의 부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우당 이회영의 경우 현재 명동 일대가 전부 자신의 땅이었으며 그의 둘째 형 이석영은 자기 땅만 밟고 남양주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죠.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경술국치에 분노한 6형제는 일제 노예로 살 수 없다며 전 재산을 처분하고 노비 40여 명과 온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합니다. 당시 형제들이 마련한 돈은 당시 돈으로 40만 원인데, 당시 쌀 한 섬이 3원이니 지금으로 환산하면 600억 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당시 일제가 모르게 급히 처분하느라 시세보다 헐값에 판 점을 감안한다면 족히 1,000억 원을 훌쩍 넘을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럼 이들이 이 재산을 전부 어떻게 썼을까요? 전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습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죠.

1,000억이 넘는 돈을 일제나 친일파에게 뒷돈으로 주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이들은 마음 편히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들이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곳은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사실 어려운 시기에 최대한 아낀다고 하더라도 군관을 길러내려면 토지뿐 아니라 건물, 교관, 식대 등등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합니다. 당시 형제 중 가장 부자였던 석영은 독립운동가들의 여비를 지급하면서도 학교의 설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전부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를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했으면서도 자신들 역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6형제 중 5형제가 순국하는 잔인한 최후를 맞이했죠.

우선, 6형제 중 첫째 ‘이건영’은 1940년 만주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은 전부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죠. 둘째 아들 ‘규면’은 신흥학교를 졸업한 후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다 병으로 사망했고, 셋째 아들 ‘규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후 귀국해 공군 대위로 복무하다 한국 전쟁 때 실종됐습니다. 형제 중 가장 부자였던 ‘이석영’은 자신의 농토를 전부 처분해 망명 생활비와 신흥 무관학교 창설 운영자금으로 보탰습니다. 전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쓰고 난 이후로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다 두부 비지로 끼니를 연명했습니다. 1934년, 상해에서 아사했죠. 그의 아들 ‘규준’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제거했으나 독립운동 중 20대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신흥 학교 교장을 맡았던 셋째 ‘이철영’ 역시 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넷째 ‘이회영’입니다.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배에서 내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 유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이상한 노인”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당시 이 인물이 이회영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경찰이 이를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실 6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만주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후 일본 경찰은 노인의 신체로는 감당하지 못할 고문을 가했고 모진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순국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회영 역시 엄청난 부를 자랑했지만, 그의 아들 ‘규창’의 증언에 따르면 일주일에 세 끼 먹으면 잘 먹는 편이었는데 그 궁핍이 그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규창 역시 친일파를 제거하고 13년간 징역을 살았죠. 6형제 중 유일하게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이는 다섯째 ‘시영’입니다. 임시정부에서 법무 총장과 재무 총장을 거쳐 광복 후 임시정부와 함께 귀국했는데 이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막내 ‘이호영’은 독립운동 중 1933년 북경에서 두 아들과 함께 행방불명된 후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뇌수를 거꾸로 솟게 만드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본에 가담해 그들의 정책을 지지하고 추종하며 같은 조선인을 악랄하게 괴롭혀 재산을 불린 친일파가 있는가 하면, 오늘 살펴본 이 씨 6형제처럼 명문과 타이틀과 재산을 모두 투입해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사리사욕을 버리고 끝내 순국한 6형제의 희생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영상에서 종종 독립운동가분들 이야기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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