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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동생 ‘명안공주’를 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허락했던 ‘이것’

역사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왕비 후궁 korea kingdom history

명안공주는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3녀로 본명은 이온희였습니다. 2명의 언니가 모두 요절했기에 사실상 외동딸로 자랐으며 아버지 현종과 오빠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기에 현종은 명안공주의 이름을 ‘온희(溫姬)’라 짓고 공주의 운수가 한없이 좋기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왕이 자녀의 이름을 직접 지어 적은 명안공주 작명단자는 현재까지 다른 것이 알려진 것이 없기에 현존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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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 아버지 현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녀의 오빠인 숙종이 조선 제19대 왕에 오르게 됩니다. 1679년(숙종 5년) 명안공주의 혼례가 결정되었고 서인의 핵심 인물인 전 참판 오두인이 아들이자 그녀보다 3살 어린 오태주가 부마로 최종 간택되어 종1품 해창위에 봉해집니다.

이듬해인 1680년 12월, 그녀는 혼례를 올리고 하가를 하게 되는데요. 당시 가뭄이 극심했지만 명안 공주의 살림집을 성대하게 지었기에 송시열 등 수많은 신하가 규모를 줄일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참고로 공주는 자신과 비교해 신분이 낮았던 양반가의 아들과 혼인을 했기 때문에 ‘하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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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숙종은 여동생인 명안공주의 집터를 일찍이 전례가 없는 크기로 내려주었는데요. 호조에서 측량한 결과 1,826칸이나 되어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조정의 논의에 못 이기어 집터를 1,400칸으로 줄이게 되는데요.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된 것을 보면 실제 지어진 집 크기도 역대 공주중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더불어 가장 크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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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아끼는 마음은 숙종이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새집에 가서 밤에 잠이나 잘 잤느냐, 어제는 그리 덧없이 내어 보내고 섭섭 무료하기 가이없어 하노라. 너도 우리를 생각하느냐. 이 병풍은 오늘 보내마 하였던 것이라. 마침 아주 만든 것이 있으매 보내니 치고 놓아라. 날 춥기 심하니 몸 잘 조리하여 기운이 충실하면 장래 자주 들어올 것이니 밥에 나물것 하여 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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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년 후인 1683년(숙종 9년) 오빠 숙종이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평소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어머니 왕대비 명성왕후는 숙종을 낫게 하기 위해 무당의 말을 따르게 되고 혹독한 겨울 날씨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게 됩니다.

이후 숙종의 병이 호전되지만, 명성왕후는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에 걸려 1683년 음력 12월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왕대비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궁녀 시절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난 희빈 장 씨가 재입궁해 곧바로 후궁인 숙원에 책봉되었는데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명안공주도 희빈 장 씨를 혐오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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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청나라에서 고급 비단이 들어오면 후궁들에게 주지 않고 명안공주에게 보낼 정도로 여동생에게 애정을 보이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1687년 5월,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숙종은 상복 차림으로 크게 슬퍼하며 말하길 “몹시 슬프고 애통스러워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비단과 쌀, 무명 등의 물건을 숙정공주(효종의 다섯째 딸)의 전례에 따라 시급하게 마련해라. 장례에 쓰이는 물품은 각사의 관원들이 몸소 친히 준비하여 미진하게 되는 일이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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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아버지인 평안감사 오두인을 밤낮없이 올라오도록 했고, 그를 대신할 이를 비변사로 하여금 논하게 해 윤이제를 임명합니다. 숙종은 여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10일 동안 소선을 행하도록 명했는데 약방에서 여러 차례 간절히 만류하면서 결국 4일로 줄이게 됩니다.

또한, 공주의 집에 친히 직접 방문하는 절차를 <오례의>대로 하도록 명했는데요. 이렇게 더운 날에 빈소도 차리기 전에 임금이 친히 조문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며 신하들이 간곡히 만류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듣지 않고 명안공주의 집에 직접 행차하여 슬픔이 다하도록 곡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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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안공주는 경기도 안산시 사사동에 묻혔으며 숙종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어제치제문을 남기게 됩니다.

“이제 배필을 만나는 예를 올려서 화락한 금슬을 이루고 장수를 누릴 것을 기약했는데 하루아침에 이와 같은 기별을 듣다니. 유유한 나의 정으로 그대를 일찍 영결하려니 소리쳐도 응함이 없고 불러도 대답이 없거늘 저 푸른 것이 하늘인데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환하고 밝은 세상을 버리고 저 어둡고 캄캄한 세상을 향해 가니 천장지구토록 이 애통한 심정 감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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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명안공주의 남편 해창위 오태주와도 친했으며 자주 그를 불러 시를 내리고 답을 구할 정도였습니다. 오태주는 숙종의 좋은 글동무이자 시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오태주는 뛰어난 글과 글솜씨로 숙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게 되지만 항상 겸손하였고 부마로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던 중 1689년 아버지 오두인을 비롯한 서인들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이 분노하여 가문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공주의 시댁이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고 삭탈되었던 오태주의 작위도 다음 달에 특별히 복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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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오태주는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고 서예를 즐기며 살았으며 1716년(숙종 42년)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명안 공주와 합장하게 됩니다.

오태주 묘역은 2003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18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해주 오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명안공주의 관련 유물은 해창위 오태주 문중에 보관되어 오다가 1995년부터 강릉시립박물관에서 입수해 관리하였고, 보물 제122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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