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2년 전인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전해진 소식에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알려진 송산리 고분 내부로 물이 흘러든다는 사실이 전해 졌기 때문인데요. 특히 6호분은 물이 줄줄이 스며들 정도로 취약하다고 알려지면서 그 옆에 배수로를 파기 시작했는데 공사 일주일 만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부가 배수로를 판다며 삽질을 시작했는데, 삽 끝에 둔탁한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났죠. 고분인 만큼 함부로 할 수 없어 조금씩 아래를 파내려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심상치 않은 벽돌벽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벽돌로 촘촘히 쌓인 문을 개봉하는 순간,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약 1,500년 간 외부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은 6세기 초 백제를 다스렸던 제 25대 국왕 ‘무령왕’의 무덤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서 출토된 유물이 무려 5,232점에 달했는데, 그중 으뜸은 단연 ‘금제 관 꾸미개’입니다. 드라마나 역사 영화에서 백제 왕족이 등장할 때 머리 위에 있는 그 관꾸미개가 실물로 드러난 것이죠.
우리나라 고고학의 역사를 바꿔 버린 무령왕릉 발굴과 관련해서는 너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차후에 다시 자세히 다뤄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전남 화순의 허름한 집 앞 마당에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국보급 유물이 줄줄이 끌려나왔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1971년 8월 무령왕릉의 발굴 열기로 전국이 뜨거웠던 그 해 여름은 유독 비가 잦았습니다.
전라남도 화순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 씨는 캬악 하고 손에 침을 뱉더니 삽과 곡괭이를 집어듭니다.
물길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배수로를 파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전해졌습니다. 돌에 닿는 소리라면 분명 퍽퍽 소리가 나야 하지만 이 소리는 분명 금속에 닿는 소리였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파내기 시작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금속이 맞았습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띤 이상한 쇠붙이였죠.
그 자리에서 끌어올린 쇠붙이만 11개였는데 ‘엿 바꿔 먹어야겠다’ 다짐하고는 이를 집 창고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집 앞에서 철컹철컹 엿장수 가위 소리가 들리자 구 씨는 창고에 방치해 둔 쇠붙이를 들고 나갑니다. 그리고는 쇠붙이 11개와 엿 몇 개를 바꿨죠.
사실 이 당시 많은 엿장수들은 고물상을 겸업하고 있었는데, 공짜로 고물을 받기가 뭣해 엿을 내주는 것으로 사례를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그간 수많은 고물을 봐왔던 엿장수는 아무리 봐도 이 쇠붙이들이 이상했습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것도 그렇거니와,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조각하기라도 한 듯 도끼처럼도 생겼고, 검처럼도 생겼고, 거울처럼도 생겼습니다. 그중 둥근구슬이 8개 붙은 쇠붙이는 군계일학이었죠.
사실 욕심을 부릴 법도 했지만 혹시 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엿장수는 전남도청에 들러 이를 공무원에게 넘겨주었는데요. 사례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일을 한 것 같다는 생각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4개월 뒤, 전남 도청이 발칵 뒤집히는데요. 문화재연구소 조유전 학예사는 출장길에 전남도청에 들렀다가 쇠붙이를 확인하기 시작했는데, 보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이 쇠붙이들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었기 때문이죠.
즉각 발굴팀을 꾸려 대곡리를 찾은 그는 마음대로 흩어진 흙 아래에서 무덤 구덩이를 발견합니다.
마침내 무덤의 윤곽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큰 목관 조각이 발견됐죠. 다만 아쉽게도 기대했던 유물이 더 출토되지는 않아 발굴은 중단했지만 마을 노인이 엿과 바꿔 먹은 청동기유물 11점은 엿장수 덕에 살아남아 3개월 후 국보로 지정됐습니다.
한국식검 3점, 청동도끼 1점, 청동새기개 1점 뿐만 아니라 정교함의 극치인 잔무늬거울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이 전부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 143호로 지정됐죠.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녔던 많은 분들은 ‘우리나라에는 청동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배웠습니다. 한반도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지 않다 보니 일본은 이런 가설을 세웠고, 그것을 그대로 교과서에 담았죠.
그런데 한반도에서 드디어 청동기 유물이 잔뜩 발견됐고, 일제의 가설이 완벽히 틀렸음이 증명됐는데요. 아마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고인돌이라는 거석문화를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인돌과 같은 ‘거석’은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자연석 등으로 무덤을 만들어 신을 숭배하는 숭배문화의 대표양식인데, 피라미드나 모아이석상 등이 거석 숭배문화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그중 고인돌은 바다와 인접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발트해,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아일랜드 등에 넓게 분포하고 있지만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은 한반도 지역에 있습니다. 50%라는 것도 추정치에 불과한데요.
왜냐하면 고인돌은 자연석으로 옮겨 사용한 경우도 많아 지금도 동네 어귀의 거대한 바위가 고인돌 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고인돌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고, 김해 구산동 고인돌의 경우 그 무게만 350톤이 넘어 최소 5천명 이상의 집단이 그 지역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청동기의 대표 유물인 고인돌이 한반도의 전세계 절반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가 전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추정할 수 있는 바, 유네스코는 2천년 고창, 화순, 강화도를 세계유산에 등재했습니다.
고인돌 중 전세계 유일한 세계유산이죠.
그런데 고물상이 엿과 바꾼 이 쇠붙이들의 그 면면을 보면 왜 국보급 유물인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문화재위원회 조유전 학예사는 발굴팀을 이끌고 서둘러 긴급 수습조사를 진행했는데요. 목관 조각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7년 뒤, 2008년 2월 국립광주박물관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며, 다시 한 번 재조사를 실시했는데요. 이 조사를 통해 무덤의 구조가 파악됐습니다.
무덤은 3m 크기의 구덩이를 파고, 그 가운데 다시 구덩이를 판 후 관을 넣은 후, 그 위에 돌을 쌓아 만든 ‘적석목곽묘’였습니다. 그런데 조사가 마무리될 때, 발굴에 참여한 연구원의 꽃 삽 끝에 무언가 턱하는 느낌이 나왔습니다.
조심조심 흙을 걷어내보니 흙 사이로 무언가 뾰족이 튀어나와 있었고, 흙을 다 걷어 내고 그것이 청동검 임이 확인됐습니다.
그렇게 한국식동검 2점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구재천 씨가 배수로 만들다 끌어낸 11점과 37년 뒤 국립광주박물관이 발굴한 2점까지 총 13점의 부장품이 나왔는데요. 그런데 그 유물의 면면을 보면 왜 이 유물이 대단한지 깨닫게 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고인돌과 함께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화순 대곡리에서 발견된 유물은 한국식동검문화를 대표하는 것들입니다.
한국식동검문화는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청동기시대 후기 또는 이 시기부터 철기가 사용되었다 하여 초기철기시대라고도 합니다.
대표적인 청동유물은 날이 직선인 한국식동검을 비롯해 투겁창, 꺾창과 같은 무기류와 잔무늬거울, 각종 방울류 등이 있는데요. 화순 대곡리에서는 길이가 다른 3개의 한국식동검이 출토됐습니다.
한국식동검은 검의 몸과 자루를 따로 만들었으며, 오목하게 들어간 어임부분과 마디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동검이라는 것이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지배자의 상징물로 여깁니다.
위에서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최소 수백에서 수천명의 노동력이 필요했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이 말인 즉슨 그 수백 명을 한 자리로 모아 작업을 지시하는 지배자가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수백, 천명의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이 되는 축이 있어야 하니까요.
잔무늬거울 2점도 출토되었는데, 이 역시 큰 의미를 갖습니다. 청동기 제작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화순 대곡리에서는 18cm짜리 1점, 14.6cm짜리 1점이 발견되었는데, 크게 바깥쪽 부분, 가운데 부분, 안쪽 부분으로 나뉘어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양이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지 현대 과학으로도 복원에 실패해 제작 기법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여러 연구 끝에 아주 가는 모래로 만든 거푸집을 사용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시대에는 볼 수 없는 청동팔령구와 청동쌍령구가 발견됐는데, 각 모서리에는 고사리 문양을 새긴 방울이 달려있습니다.
그 안에 청동구슬을 넣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데, 그 쓰임새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주술적인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한 도구로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이미 청동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청동을 휘고, 구부리고, 동그랗게 만드는 등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이 있었다는 의미, 즉 공예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팔령구나 쌍령구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한반도에서만 출토된 국보급 유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도대체 누가 왜 만들었는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가 말이죠. 청동 제품은 기본적으로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들며, 재질 개선을 위해 납이나 아연 등을 첨가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금속을 얻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광석을 채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광석을 녹여 얻은 용액들을 제품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비율 배합한 후 거푸집에 부어 만들죠. 거푸집에서 찍어낸 청동제품은 마지막으로 숫돌을 이용해 가장자리를 다듬거나 날을 세우거나 모양을 내 마무리하는데요. 이렇듯 청동 제품 한 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세심한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질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화순 대곡리 무덤의 주인공은 기원전 3세기 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 청동으로 만든 무기로 위세를 떨치던 족장이었을 뿐 아니라 청동거울이나 청동방울 등을 이용해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며, 제사장 역할을 함께 수행한 인물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는 재정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제사장의 권력이 상당히 높았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청동검으로는 힘을, 팔룡구 등으로는 자신의 신비로운 능력을 과시한 제사장의 무덤이라고 보는 겁니다.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도 만들기 어렵다는 잔줄무늬 청동거울이나 국립박물관은 물론 대학박물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청동검’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 한국에서는 아주 흔한 유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청동기 유물이 세계사에서는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세계 최고 박물관이라는 영국 대형박물관에도 완벽한 형태가 아니라 끝이 잘려나간 청동검 조각뿐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청동기 문명이 얼마나 화려하게 꽃피었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YouText의 콘텐츠는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