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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에도 없고 오직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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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한국에서 가장 개발하기 어려운 도시를 꼽으라면 경주를 꼽을 겁니다. 천년의 왕국 신라의 수도였던 이유로 개발 허가를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죠. 그런데 경주만큼이나 개발이 어려운 곳은 서울입니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많은 왕국이 수도로 삼았고, 특히나 가장 최근인 조선왕조가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는 어떤 유물이 얼마나 매장되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조선왕조 한양의 중심지였던 종로는 굴착기 한 바가지에도 유물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끌려 나와서 고층빌딩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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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까지 유물에 발목 잡힐 수 없어 서울시는 2010년 ‘사대문 안 문화유적 종합보존 추진방안’을 마련해 개발을 허가하기로 하면서 만약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토대로 문화재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유존 구역이 발견되면 전체 개발 구역의 10%가량 면적의 땅을 파서 유물의 가치를 평가해 전면적인 발굴을 실시할지를 결정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즉, 개발은 허가하지만, 문화재가 매장됐다면 전면 발굴을 실시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사동 79번지가 딱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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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2가 귀금속 상점들 뒤로 형성된 피맛골에 대한 개발을 승인했는데 조사 결과 문화재가 잔뜩 매장됐을 가능성이 제기됐고 결국 전면 발굴 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6월 종로 한복판에서 상상도 못 한 유물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끌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최고 지식인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분이 선뜻 한 명을 꼽지는 못할 겁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라성 같은 조상들이 많아 한 명을 꼽기에는 망설여지죠. 그런데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발명가를 꼽으라면 아마 많은 분이 세종대왕을 꼽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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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즉 문자를 주도적으로 창제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어떤 원리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훈민정음이라는 압도적인 업적 때문에 오히려 세종대왕은 과소평가 되거나 다른 업적이 가려지고는 합니다. 오히려 서양 사람들은 세종대왕을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부르는데도 말이죠.

그는 백성의 편의를 위해 늘 고민했고, 노력했고, 장영실 등의 신하들을 재촉해 새로운 발명품을 내놨습니다. 여러분이 조선시대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이라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들이 시간을 제대로 알 수 없다면 혹은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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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계절을 알지 못해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고 내년도 농사 계획도 세울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는 굶주림의 반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조선시대 왕의 책무 중 관상수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관찰해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 변화 등을 살펴 시간과 절기를 백성에게 알려주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던 유교에서도 천문학이야말로 제왕의 학문이라고 일컬었고,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 임금은 반드시 천문학에 통달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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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고 이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으로 하여금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를 발명토록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2021년 종로구 인사동 79번지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2021년 5월 인사동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됐는데 발굴팀은 20세기 전반 문화층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6세기에 해당하는 3m 아래에서는 백자, 항아리, 화로, 총통 등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진귀한 유물들이 출토됐는데 고고학자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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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 피난을 떠나며 집안의 귀한 물건을 묻어놓고 이를 되찾지 못했을 것, 즉 전쟁으로 도성이 황폐해지면서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옛 집터들이 고스란히 땅속에 묻혔다는 것이죠. 그리고 굴착기가 잔뜩 파놓은 부지에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발굴에 매진하던 6월 1일 마침내 사건이 터집니다.

이날 발굴팀은 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등 15, 16세기 유물들을 잔뜩 발굴했는데 그중 하이라이트는 총통 조각들 아래에서 발견된 금속 조각입니다. 총통 조각 아래에 3개의 둥근 고리가 잘린 상태로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는데 조각들에는 각각 눈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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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문우주학과 명예교수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발굴팀은 전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자문을 담당한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이용삼 명예교수는 즉각 서울로 달려왔고 이 금속 조각들은 다름 아닌 ‘일성정시의’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바퀴 윗면에 세 고리를 놓았는데, 이름을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이라 한다고 그 형태를 전하고 있는데 인사동에서 발견된 3개의 둥근 고리가 바로 바퀴 윗면에 놓은 그 고리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 발견이 놀라운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세종실록은 총 4개의 일성정시의를 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간 실물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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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세종실록을 바탕으로 보관한 것일 뿐 실물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귀하디귀한 일성정시의가 인사동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대단한 발굴이 아닐 수 없죠. 그럼 어쩌다 세종대왕은 일성정시의를 만들게 됐던 것일까요?

사실 이 시계는 당시 천문과학기술의 집약체입니다. 농업이 주력 산업이었던 조선시대에 임금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백성들이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늘의 변화를 살펴 알려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과 절기, 계절 변화 등을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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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왕의 권력은 하늘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던 유교에서도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이라고 불릴 만큼 중요한 학문이었습니다. 이에 장영실, 이천 등은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낮에는 해시계의 역할을 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관측하는 주야 겸용 시계를 개발해 1437년 완성했습니다.

원래 일성정시의가 등장하기 전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전해진 천문 관측기기인 간의를 변형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윤일을 반영하지 못했던 것이죠. 윤일이란 우리가 세는 1년의 길이와 실제 1년의 길이가 달라 발생하는 오차인데, 지구의 공전 주기는 약 365.25일로 우리가 아는 365일보다 0.25일이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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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성정시의는 이 윤일이 반영될 수 있도록 주천도분환에 1,461개의 눈금을 새겼습니다. 그래서 직접 4년에 한 번씩 하루씩 추가하지 않고도 매년 동지 자정에 주천도분환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0.25일을 보정했죠.

이런 치밀한 계산이 가능하려면 우선 공전주기와 1년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이를 해결할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고, 365와 1/4만큼 정밀한 눈금을 만들 수 있는 세밀함이 필요하고, 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다 매년 동지 자정에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기술력이 필요합니다. 천문학, 과학, 수학 이 모든 기술이 집약된 것이 바로 일성정시의이고 영국 캠브리지 대학 교수 조지프 니덤 교수도 서양에도 이런 것은 없었다며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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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일성정시의가 태어난 1437년 이전에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해시계를 먼저 고안했습니다. 바로 앙부일구라는 해시계인데요.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하루 24시간 1년 365일로 알고 있지만, 지금과 같이 표준 시간이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시간을 알고 측정했을까요? 바로 해를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이 때문에 태양과 그 그림자를 통해 시계를 만드는 방법이 고안됐는데 해를 보고 시간과 절기를 측정하는 방법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습니다. 특별한 장치가 없어도 간단하게 시간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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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땅 위에 막대를 수직으로 세워놓고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를 통해 시간을 파악하는 형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확인됩니다. 우리나라 유물로 남아있는 해시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7세기 이후의 신라시대 ‘화강암판 해시계’로 그 파편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우리 시계는 세종 때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앙부일구입니다. 천문의기와 시계들이 제작된 시기는 대략 1432년부터입니다. 천문, 역법 연구 결과가 각종 서적에 반영되었고, 이와 함께 실제 기구를 통해 입증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는데 앙부일구를 제작하면서 참고한 것은 원나라의 ‘앙의’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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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세종 16년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앙부일구의 형태는 완전히 다른데 앙부일구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모습의 해시계라는 뜻입니다. 다만 원나라의 앙의를 참고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형태의 해시계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물건입니다. 즉, 다양한 중국 시계를 관찰해 우리나라만의 독창 시계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죠.

앙부일구는 시계와 달력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데 구조를 보면 오목한 부분에 해의 그림자를 맺혀주는 영침이 있고, 가로는 절기선, 세로는 시간선이 있습니다. 세로선을 읽으면 현재의 시간을, 가로선을 읽으면 현재의 절기를 알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앙부일구의 숨겨진 과학기술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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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고도는 계절에 따라 다르다는 점은 잘 알고 계실 텐데 여름에는 그림자가 짧고 겨울에는 그림자가 긴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앙부일구는 천구상에서 일정한 주기를 갖고 회전하는 태양의 운행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구였습니다. 해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기선과 시간선의 눈금을 읽으면 별도의 계산 없이 시각과 절기를 파악할 수 있었죠.

아무래도 조선의 수도는 한양이기 때문에 한양의 위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영침을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췄습니다. 그러고는 이를 현재 종로구 광화문우체국 부근과 종묘에 각각 설치하면서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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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은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최초로 주장했는데 앙부일구는 해를 기준으로 시간을 측정합니다. 즉, 명확하지는 않았더라도 당시 조선 천문학자들은 태양계가 태양 중심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죠.

조선 초의 계산과 현대의 계산이 3천만 분의 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당시 조선 과학자들의 지식이 얼마나 앞섰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앙부일구에는 세종의 애민 정신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 시계는 1434년 혜정교와 종묘 두 곳에 설치했는데 이 장소는 한양의 동서를 가르는, 다시 말하면 유동 인구가 가장 많았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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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백성들이 시각을 알고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고,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시간을 볼 수 있도록 12지신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2개의 앙부일구는 현재 남아있지 않고 이후에 제작된 것들만 일부 남아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조선시대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력을 가졌던 우리나라가 현대에는 왜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냐는 탄식을 내뱉기도 합니다. 애초에 정확한 반구형 물체를 만드는 것이 조선시대에는 엄청난 기술력이었고, 그 오랜 옛날 태양을 보며 시간을 계산하고 이를 통해 애민 정신을 실천한 세종대왕의 추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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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는 많은 유산이 해외로 유출되거나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도 가끔 앙부일구가 해외 경매에 등장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모든 유물을 돌려받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선조의 자랑스러운 기록을 온전히 기억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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