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에는 에메랄드빛 지중해가 흐릅니다. 그 뒤로는 베수비우스 산이 감싸 풍수지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벽한 ‘배산임수’ 지형을 갖췄습니다. 산기슭으로 펼쳐진 포도밭에는 단내를 물씬 풍기는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렸고, 그 옆으로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사르누스강을 중심으로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농지는 신이 만들려 해도 만들 수 없는 완벽한 땅이었습니다.
배산임수의 비옥한 토지를 갖춘 덕분에 이 도시는 어마어마한 번영을 누렸는데요. 무려 3,200m에 이르는 성벽, 8개의 성문, 12개의 사각 탑을 갖춘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번화했던 도시 ‘폼페이’입니다.
신이 내린 땅에 재앙이 닥친 것은 서기 79년 8월 24일 오후 1시입니다. 폼페이를 감싼 베수비오스 산이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고, 무려 15분간 분출된 초고온의 화산재는 주변 도시를 전부 덮어버렸습니다.
이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수천 명의 시민은 그대로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로마제국의 찬란한 도시 문화를 꽃피운 폼페이는 화산재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죠. 망토로 입을 가리고 웅크린 채 죽은 남자, 목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몸이 뒤틀려 죽은 경비견, 바닥에 기이하게 누운 젊은 여인까지 잔인한 화산재의 습격은 후세에 그날의 풍경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폼페이에서 직선으로 9,000km 날아가면 ‘또 다른 폼페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서울 종로인데요. 2000년대 초반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조선시대 유물 덕분에 종로는 ‘조선의 폼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데, 이 조선의 폼페이에서 발견된 유물 중 으뜸은 불과 1년 전에 발굴됐습니다.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한국에서 개발하기 가장 어려운 도시를 꼽으라면 아마 누구라도 서울을 꼽을 겁니다. 더구나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지였던 종로 일대는 2000년대부터 고층빌딩이 들어서면서 문화재 보존 이슈가 큰 화두였습니다. 포크레인으로 한 바가지만 떠도 줄줄이 소시지처럼 문화재가 쓸려 나오는 통에 개발이 쉽지 않았죠.
이에 서울시는 ‘사대문 보존 방안’을 마련해 개발하기 전 의무적으로 테스트 조사를 거치도록 했죠. 전체 개발 구역의 최대 10%가량 되는 면적을 파서 출토되는 유물의 가치를 평가해 전면 발굴을 진행할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인사동 79번지가 딱 그랬습니다.
종로 2가를 대표하는 귀금속 상점들 뒤로 유명 맛집이 몰린 ‘피맛골’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2019년 서울시는 이 지역에 서울 공평 구역 15, 16지구 도시환경 정비 사업 부지로 개발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물론 테스트 조사가 진행됐고,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문화재가 잔뜩 매장됐을 것이라는 조사 결과에 따라 전체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결정됐습니다.
그리고 6월 1일, 마침내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날 늦은 오후, 발굴팀은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소형 화기인 총통 8점을 발굴했고, 그 옆에서 둥그런 모양의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이 둥그런 모양의 유물은 다름 아닌 ‘일성정시의’로 확인됐습니다. 이 유물은 세종대왕 시절에 개발된 독창적인 천문시계로, 낮에는 해시계 역할을 하고 밤에는 해를 이용하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별자리를 통해 시간을 관측하는 기구인데요. 세종대왕이 직접 명해 만들어진 시계입니다.
세종실록에 총 4개의 일성정시의를 제작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물이 확인되지 않다가 이날 발굴로 그 실물이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 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항아리였습니다. 최초 일부면이 깨진 항아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별것 아니겠지…’ 하며 들어 올렸는데, 그 항아리 아래로 공깃돌같이 작은 물체가 몇 개 떨어졌습니다. 가만히 그 돌멩이들을 확인해 보니 이제껏 단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한글이 새겨져 있었는데요. 바로 ‘금속활자’였죠.
보통 금속활자는 왕실에서 주로 제작하고 관리하는 희귀한 유물이라 드물게 발견되는데, 더 놀라운 점은 여기에 한글이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1446년, 새로운 문자를 반포한 세종대왕은 신숙주, 박백년 등에게 한자음을 통일시켜 표준음을 정하는 책을 편찬하라고 명했습니다.
다시 말해, 훈민정음으로 한자어를 읽을 수 있는 기준을 정한 책을 만들라는 것인데,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어진 책이 바로 1448년, ‘동국정운’입니다.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을 가진 이 책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현재는 국보 14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목적상 즉,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했기 때문에 한글자음이지만 마치 외계어 같은 기호들을 다수 사용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딱 한 번,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할 목적으로 만든 책이기 때문에 이때 사용된 금속 활자는 15세기 이후 사라졌는데, 인사동 깨진 항아리에서 그 금속활자 실물이 출토된 겁니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첫째, 훈민정음 반포 이전에는 훈민정음이 새겨진 금속 활자는 존재할 수 없고, 둘째, 훈민정음 반포 직후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할 목적으로 이 금속 활자를 만든 것이며, 셋째, 그러므로 이 금속활자야말로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인 셈입니다.
지금에서 보자면 외계어 같은 기호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호이므로 그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사동 금속활자가 가치를 갖는 겁니다.
그런데 한글 금속활자와 함께 전문가들의 주목을 끈 것은 한자가 새겨진 금속활자 중 ‘갑인자’로 이뤄진 금속활자입니다. 갑인년, 즉 1434년에 제작된 활자기 때문에 ‘갑인자’라고 명명된 이 활자체는 그 어떤 금속활자보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청동으로 제작된 갑인자는 금속활자 인쇄술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활자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네 모퉁이가 평평하고 반듯한 갑인자는 ‘활자의 백미’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403년, 태종이 시작하고 1434년, 세종이 완성시킨 그야말로 30년의 노력이 배어 있습니다.
그럼 “임금이 명을 내려 주기적으로 금속활자를 만들면 되는데, 왜 갑인자만 유독 편애하느냐?”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역사적 사실을 보면 왜 그런지 답이 보입니다. 왕자의 난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3년, 금속활자를 만드는 ‘주자소’를 만듭니다. 훌륭한 정치를 하려면 서책을 읽어야 하는데, 조선에는 책이 부족해 훌륭한 유생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죠.
태종은 “목판도 있지만 판이 깎이는 약점이 있으므로 금속활자를 만들고 싶다.”라고 주장해 금속활자를 만들 주자소를 세웠죠. 그는 주자소를 세움에 있어 백성에게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고, 개인 재물을 투입했으며 부족한 금액은 대소신료들이 부담하도록 했는데요.
그리고 마침내 계미년인 1403년, ‘계미자’를 완성했고, 4년 뒤 1407년, ‘계미자’를 보완한 ‘정해자’를 주조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아무리 봐도 이 ‘계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쇄물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결국 그는 자신이 아는 최고 과학자들을 전부 활자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합니다.
당시 프로젝트의 수장은 ‘이찬’이라는 인물이 맡았는데, 그는 해시계와 혼천의 등을 지휘했던 인물입니다. 이찬은 약 7개월간 ‘계미자’와 ‘정해자’의 단점을 보완시킨 ‘경자자’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단점을 보완시킨 새로운 금속활자였기 때문에 꽤 완성도가 높았지만, 세종은 약 10년 뒤, 또 새로운 금속활자를 만들도록 명합니다.
어렵게 개발한 ‘경자자’는 훌륭하기는 하지만, 다소 글자가 작고 빽빽하다는 평가가 나오자 “내 아들들이 활자를 좀 더 크게 만들자고 건의했다.”라며 활자 제조 프로젝트를 재가동합니다. 그리고 현직에서 물러난 이찬을 다시 불러들이죠.
이렇게 개발된 것이 ‘갑인자’인데, 이 활자가 특이한 것은 옛 경전에서 따온 ‘왕희지체’를 롤모델로 하되, 경전에 없는 글자는 그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직접 썼다는 점입니다.
수양대군은 영화 [관상]에서 이정재 배우가 연기한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명대사를 남겼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500년 조선에서도 최고 명필이라 소문난 한 살 아래 동생 ‘안평대군’에 밀려 명필가 소리는 듣지 못했어도 워낙에 서체가 수려하고 시원시원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죠.
어쨌든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수양대군의 서체가 더해져 완성된 ‘갑인자’는 그간 모든 단점을 보완한 덕분에 어떤 내용의 책도 초고속으로 인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요. 이 덕분에 세종은 그간 펴내고 싶었던 마음의 양식을 마음껏 펴내 조선을 진일보시켰습니다.
지난 콘텐츠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금속 활자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최근까지 발견된 금속 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북한 개성의 만월대에서 발견된 금속활자인데, 이는 기존의 ‘직지심체요절’보다 우리 조상들의 금속 활자 제작 기술을 15년 앞당겨 구텐베르크와의 격차를 더욱 벌렸습니다.
여기에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선 금속활자 기록이 됩니다.
다만 한반도에서 금속활자를 개발하고 사용했지만, 조선시대 초기 실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번 인사동 금속활자 덕분에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한글 금속활자까지 실물을 보유하게 된 겁니다.
이외에도 금속활자 자체도 워낙에 일반인이 취급하기엔 어려운 물품입니다. 주자소를 궁에서 관리하고 있어 서민들은 가까이할 수도 없었지만, 모두 구리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구리의 가치는 워낙에 희소해 가치가 높았기에, 궁이 직접 구리 가격을 통제하고 매매를 금지했었습니다. 완성된 기물이라도 언제든 다시 녹여서 재사용했기 때문에 오래된 금속활자라도 활자가 상하면 다시 녹여 새로운 금속활자를 제조했죠. 그래서 조선 초기의 활자들이 귀중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사동 금속활자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유물 중 하나가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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